Home > 분류보기 > 전체보기 
북쇼핑
2001.6.20  통권 70호  필자 : 편집부  |  조회 : 4244   프린트   이메일 
[중국의 관문도시]
장자커우(長家口)

인구와 행정구역 : 전체 시는 6구1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동구, 교서구, 차방구, 선화구, 하화원구, 방가보구 등 6개 구와 나머지 1개의 현인 선화현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진다. 전체 시의 총면적은 2,964㎢이고 인구는 약 92만명 그 중에서 시구(市區)의 인구는 약51만명 정도이다. 

기후와 교통  :장자커우시의 기후는 한온대 대육성 기후에 속한다. 겨울에는 건조하고 매우 추우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서늘하지만 비교적 짧다. 그래서 피서하기에 아주 좋은 도시이다. 매년4,5월 경에는 서북쪽 네이멍구에서 불어 오는 모래바람이 시 전체를 덮을 만큼 황사 현상이 심한 도시이기도 하지만 6월 초순부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청명한 날씨를 계속 유지한다. 겨울철 최저 기온은 영하 25~26℃, 여름철 최고 기온은 32~34℃정도이다. 연평균 기온은 7.8℃, 연 강수량은 800~850mm정도이다. 시의 교통은 베이징과 가까운 관계로 대체로 편리한 편이고 경포철도(景包鐵路)가 시구 남부를 지나가며 북베이징과 네이명구의 교통 요충지와 연결되어 있다. 도로도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이미 장자커우는 주변 도로망에서 주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허베이성 각 도시와 해당지구 각 현의 도로망과 잘 연결되어 있다. 

산업과 경제  : 장자커우시는 지역 면적이 크고 토양은 비옥하며 관개시설이 편리하게 잘 되어 있다. 그 때문에 농, 목축업이 발전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지하엔 풍부한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데 특히 석탄, 철, 망간, 금, 진주암 등이 많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광산자원이 다량 매장되어 있다. 근래에 들어서 이 광산 자원들을 응용하는 산업이 발전하고 가속화되어가고 있는데 주로 철강, 기계, 화공, 방직이 주요 산업이다. 또 모피 공업이 유명한데  그 역사도 유구하며 ‘가죽의 도시(皮都)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수한 질과 풍부한 생산량을 자랑한다. 장자커우는 최근에 새롭게 개방된 신흥 공업도시이기는 하지만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도시 경제 수준은 다른 중소도시들에 비해 아직 낙후한 편이다. 

역사  : 장자커우가 언제부터 정식으로 행정단위로 정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된 바가 없다. 그러나 중화민족 형성 초기에 장자커우는 중국의 영역 내에 존재했었고 또한 국가의 중심지의 역할을 해 왔다. 중화민족의 광대하고 긴 역사의 중요한 보고인 [사기 史記]의 개편인 [오황본기]에는 중화민국의 공통선조인 황제(黃帝)가 장자커우 일대에서 중대한 정치, 군대활동을 진행했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승에 따르면 상조(商朝)시대에는 유주(柳州:지금의 허베이(河北)성 북부와 랴오닝(遼寧)성 남부에 있었던 주)의 땅이었고 춘추시대 때는 연 (燕)나라 북부의 경계, 변방이었던 곳이다. 이때부터 문자로 행정단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장자커우는 특수한 지리, 환경, 위치 때문에 전쟁시에는 전술가가 그 땅을 쟁취하려 다투던 곳이며 평화 시에는 상인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진나라 때 비로서 시의 행정단위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당시 16군의 상곡군에 해당되었고 후에는 다시 광안현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의 행정적 위치가 명나라까지 계속 지켜지다가 성루를 다시 수복하기 시작하면서 두 개의 성루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바로 하루와 내원루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현재의 장자커우 시구의 모습은 이때의 내원루라는 성루가 기초가 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된 모습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지금의 장자커우라는 행정명칭을 갖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성루 수축 기후에 당시 수비문을 지켰던 장수의 성(性)이 장(張)씨였는데 그가 전시 때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성을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성을 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1931년 9.18사변 장자커우 평원 일대는 잇달아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1937년 8월 일본군은 장자커우를 점령했고 1937년 11월에는 몽장연합 위원회를 결성했으며 1939년 9월에는 몽장연합 자치정부라는 괴뢰정부가 수립되어 지금의 장자커우시, 산시(山西) 북지구, 네이멍구 일부를 관할 지배했다. 항일전쟁 발발 후 팔로군은 장자커우 일대로 전진해서 항일 근거지를 세웠는데 먼저, 찰남, 평북을 세운 후에 각 현을 항일 활동 구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5년 8월 소몽(蒙蘇)연합군은 일본에 대항하여 선전하였고 파로군은 장자커우를 해방시켰다.

이로써 괴뢰 몽장(蒙藏)연합 자치정부는 무너졌고 차허얼성은 다시 회복되어 세워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계속하여 차허얼성이라는 행정명칭을 사용해 오다가 1952년 11월 중앙인민정부의 결정으로 그곳은 안북구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산시성으로부터 분리되고 장자커우 전지구는 허베이성에 속하게 되었다.


산악분지 지대의 특성과 길고 긴 역사가 흐르는 과정 속에서 여러 정권이 되풀이 될 때마다 전쟁과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이 많다. 

기독교 상황  : 언제부터 이 지역에 복음이 흘러들어 왔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800년대 후반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다고 알려진다. 그후 이곳은 문화혁명 때 핍박이 심하여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하교회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90년대 초 개방정책과 맞물리면서 서서히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중국 정부가 한창 동부 해안도시부터 개혁개방을 해오기 시작하면서 다른 도시들이 좀 더 복음에 대한 자유를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있을 때에도 이곳은 북서부 산간 분지 지역이라 그 영향을 크게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목회자의 수도 적었고 성경 보급도 많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대외적으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생기는 무지함 때문에 부당한 조치를 많이 당했던 곳이다.


최근 개방도시로 승격되고 경제적인 면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개발이 착수되었다. 장자커우의 도시 경제의 중요한 이점이 부각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교회도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 시의 교인은 약 1만명으로 추정되며 시구 안에 있는 삼자교회 교인 수는 약 3백~4백 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나머지 교인들은 3개구 1현에 있는 공인된 교회와 가정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가정교회는 집계가 안될 정도로 시 주위에 산재해 있다. 아직도 대부분 성도들이 가정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지리적인 불리함도 있겠지만 과거 그 이유로 받은 부조리함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면서 또 나름대로 형성된 그들만의 신앙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시 중심부에 있는 교회는 조만간에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교인들을 현재 예배당의 협소한 공간에서는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이 예배당 이전 문제로 3,4년 전부터 종교국에 계속 건의했지만 대답이 없었고 오히려 부당한 조치만 취할 뿐이었는데 최근 개방도시로 승격되면서 더 이상 괴롭히거나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자유로운 전도와 신앙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외국인과 삼자교회 교인이 접촉하고 교류하는데에도 당국에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매주 교회 지도자 훈련이 이루어지며 성도들은 대체로 성경 중심의 정신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차후 이런 부분들이 다른 복음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열매를 더 기대해 볼 수 있는 좋은 것이기를 소망해 본다.
 

정리/ 편집부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