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거행되는 제 16차 중국공산당대표대회(이하 全大)가 세계의 관심사로 더오르고 있다. 5년에 한 차례씩 개최되는 전대는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고, 중국 공산당의 중대한 정책을 결정하며, 당규(黨規)를 수정하기도 한다.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개최되는 이번 16차 전대는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부를 제3세대에서 제4세대로 넘겨주는 문제와 함께, 중국 공산당이 새 세기에 정상적인 권력교체를 달성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가의 관건이 걸린 대회다.
현재 상황으로는 장쩌민이 권력교체를 전면적으로 단행할 가능성과 유임할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명한 후진타오(胡錦濤) 현 국가부주석 겸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에게 전면적으로 권력을 승계하거나, 당총서기만 물려주고 당 중앙군사위 주석은 장이 그대로 보유할 가능성도 있다. 이 글에서는 차세대 중국 최고 권력자로 유력시되는 후진타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약력
후진타오의 본적은 안휘(安徽)성 지시(績溪)현이며, 1942년 상하이(上海)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칭화(淸華)대학 수리공정과를 졸업하고 수리전력부 기술원 비서,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 간쑤(甘肅)성 건설위 비서, 부주임, 공청단 서기,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중국공산당 19기 중앙후보위원을 거쳐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구이저우(貴州)성 당위서기를 지냈으며, 1993년까지는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당위서기를 지냈다. 1992년 중국공산당 14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다. 1988년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돼 현재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국가 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을 겸직하고 있다.
성장기
후진타오는 그리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는 후를 포함하여 1남 2녀의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할머니 손에 길러진 그는 시골 소년이었지만 매우 총명하여, 17세 (1959년)에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당당히 합격,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며, 2학년 때 이미 공산당의 ‘배양대상(培養對象)’으로 정해졌다. 당시 공산당은 상당히 인기가 높아 입당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공산당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고찰대상, 배양대상, 발전대상으로 분류하여 발전대상을 거친 젊은이들만 입당시켰다. 후는 대학을 졸업하기 한 해 전에 이미 예비당원이 되어 저학년들의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정치 보도원(報道員) 직무를 수행하였고, 졸업 직전에는 정식 당원이 되었다. 그는 문예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칭화대 문예공연단 무도대(舞蹈隊)의 지부 서기를 지내기도 했다. 이 시절에 부인인 류융칭(劉永淸)을 만났다.
문화대혁명 시기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칭화대학 역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과격한 문혁 양상에 충격을 받아 대학에 환멸을 느껴, 현실에서 발을 빼는 이른바 ‘소요파(逍遙派)’가 된다. 그후 1968년 하방(下放: 1957년에 시작된 중국공산당의 사상개조운동으로 지식청년, 공무원, 군인, 교원, 기업이나 단체 간부들을 농촌이나 공장으로 보내 노동자, 농민과 함께 생활하게 함으로써 오염된 사상을 타파하려 한 운동)되어 간쑤(甘肅)성 수력발전소 건설공사 노동자로 투입된다. 이듬해에 발전소 건설 담당 기관인 수리전력부 분국의 기술원이 되었고, 1971년 수리전력부 제 4공정국 기관(機關)당 총지부의 부서기로 승진한다. 간쑤성에 온지 5년이 지난 1974년에 성건설위원회 비서라는 고위직을 맡으면서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란저우(蘭州)로 진출한다.
문혁이 끝나고 장칭(江靑)을 위시한 4인방과 화궈펑(華國鋒), 왕둥싱(汪,東興) 등 범시파(凡是派: 마오쩌둥 사망 후 ‘마오의 사상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소위 ‘마오쩌둥 무과오론’을 견지한 세력)가 타도되었다. 반면 덩샤오핑(鄧小平)은 다시 재기하여 1978년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을 주창하였다. 1994년 덩샤오핑이 ‘내가 보기에 후진타오 이 사람은 아주 괜찮은 사람’ 이라는 평가를 내린 뒤부터 후는 장쩌민의 뒤를 이을 제 4세대 재목으로 거의 공인되다시피 했다. 중국 지도부가 ‘연경화(年經化: 젊은 지도자를 발탁함)’와 지식화를 내세우면서, 젊고 전문지식을 갖춘 후진타오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공산당 중앙당교
후진타오 부주석이 세력을 다지게 된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는 공산당 중앙당교(中央當校)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중앙당교는 중국 당(黨)-정(政)-군(軍)의 엘리트를 길러내는 간부양성 학교이다. 후는 차오스(喬石)의 뒤를 이어 1993년부터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다. 중앙당교가 후 부주석의 권력 강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측면 때문이다. 하나는 이곳이 개혁 개방 이론의 최선봉 기지라는 점이다. 새로운 이론을 연구, 검토하여 당의 이론으로 채택하느냐 여부를 이곳 당교에서 검증하게 된다. 최근 당교는 기초지식 분야에서 시장경제이론과 금융정책 등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강화했으며, 국내외 연사들을 초빙해 정부개혁 방안부터 WTO(국제무역기구)의 영향까지 갖가지 주제에 관한 강연을 마련하고 있다. 이같은 연구와 활동을 통해 후는 향후 중국이 나아갈 방향과 이론에 대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것이다. 하나는 중국 당정군의 모든 엘리트들이 이곳을 거쳐감으로써 후 부주석과 개인적인 인연의 고리가 맺어진다는 점이다. 이들은 21세기 중국을 이끌어갈 엘리트 중의 핵심 엘리트들이다.
후진타오의 시대
후 부주석은 1999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취임해 튼튼한 기반을 추가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에 이어 군사위원회 서열 2위가 됨으로써 인민해방군에 대한 장악력이 커진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자파 세력이 취약하고 실무 경험이 부족하다는 후 부주석에 대한 비판을 막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동안 당조직 사업과 사상∙이론 문제에 주로 관여하던 그는 1999년 중반부터 지금까지 경제, 과학, 교육, 외교, 군사 문제에까지 발언을 확대하고 있다. 당 사상공작과 관련해 후 부주석은 ‘3강(講) 교육’의 총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 이번 16차 전대 이후 자신의 정치기반을 확대하며,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보다 대담한 경제, 정치 개혁을 추진하리라 예상된다.
후진타오의 시대는 무엇보다 밑으로부터의 정치개혁 압력이 거센 시기가 될 전망이다. 인터넷 보급으로 정보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공산당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치의 틀은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권력의 향유보다는 공산당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도전을 해결해야 하는 권력의 고민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정리 | 김은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