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 광저우(廣州)에서 비밀리에 선교사업을 전개하며 중국에서 네 번째 기독교 선교의 거센 파도를 몰고 온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영국 런던회(London Missionary Society)소속 로버트 모리슨(Rober Morrsion, 馬禮遜, 1782~1834)이다. 그의 선교 업적은 너무나 위대하여 역사가들은 그를 ‘평민영웅’이라 칭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그의 업적을 살피면서 오늘날 당면한 중국선교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고자 한다.
모리슨의 소년 시기
모리슨은 1782년 영국의 소도시 노둠버랜드(Nor-thumgerland)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제이콥 모리슨(Jacob Morrision)은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노동자였다. 독실한 신앙인인 제이콥은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였다. 비록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성장하였지만, 로버트 모리슨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 열두 살 때 시편 119편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암기하여 어른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돕기 위해 외삼촌과 함께 제철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행극단에 가담하여 순회공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기 적성에 적합한 일을 찾지 못하고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려, 한때는 문제 청소년이 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부모님의 신앙의 힘으로, 15세 때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신앙 체험은 그가 후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거듭남은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버지와 함께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고달픈 노동 속에서도 성경과 천문학, 기타 관련 서적들을 늘 갖고 다니며 짧은 휴식 시간에 열심히 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들을 습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 주일학교, 기도회, 성경공부반 등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당시 교회 담임목사였던 아담 래디로(Adam Laidlaw)는 모리슨의 열심에 감동하여 개인적으로 라틴어를 가르쳐 주었다. 비록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지만, 소년 모리슨은 독실한 신앙환경 속에서 건전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세우고 고난을 극복하는 훈련을 철저히 교육받았다.
선교사로서의 헌신
새 사람이 된 모리슨은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17세 때 그는 복음잡지(The Evangelical Magazine)와 선교잡지(The Missionary Magazine)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해외 선교사의 꿈을 품게 된다. 그러나 막내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가 어머니 곁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 호스톤 신학원(Hoxon Academy)에 입학원서를 냈다. 스물 한 살이 되던 1803년 1월부터 모리슨은 런던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의 생애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우고, 정식으로 주의 종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이 우수하였을 뿐 아니라, 여가를 활용하여 런던순회전도회(London Itinerant Society)가 주도하는 국내 벽지 전도여행에도 열심히 참가하였다.
2년 간의 신학 수업을 마치자 그는 또 하나의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건강이 날로 쇠약해진 그의 부친은 모리슨에게 고향에 돌아와 목회하기를 간절하게 요청하였다. 한편 그의 열심과 재능에 감동한 신학교 교수들은 대학에 입학하여 계속 공부할 것을 권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도하고 결단한 끝에 모리슨은, 1804년 런던선교회에 허입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런던선교회는 그를 해외 선교사 훈련학교인 고스포트 선교학교(The Missionary Academy at Gosport)에 보내어 14개월 동안 선교사로서의 필요한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1805년 성 바돌로메 병원(St. Bartholomew Hospital)에서 1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그리니치 천문대에 가서 천문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가 해외 선교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원래 그는 아프리카와 중국을 선교대상으로 삼고 기도하였는데, 아프리카에 더욱 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출발하였으나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부득불 다시 영국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 영국의 모스레이(Willian Mosley)목사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에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고, 중국선교를 위한 선교단체의 설립과 중국어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편지를 각 교회와 신학교에 보냈다. 고스포트 신학교 총장인 보그(Dr. Bogue)박사는 이 편지에 깊은 감명을 받고 모리슨을 적극 추천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모리슨은 중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겸심하였고, 마침 광저우에서 온 청년 롱싼더(容三德)를 만나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1807년 당시 스물 다섯 살의 모리슨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인도로 파송 될 두 명의 선교사와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교 초기의 역경과 고난
동인도회사의 승선 거부
중국선교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중국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닥쳤다.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방으로 가는 모든 선박은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는데, 동인도회사는 그가 선교사 신분으로 중국에 가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중국 정부는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에 오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리슨이 중국에 가면 그들의 무역활동에 지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모리슨의 승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기로 했다. 영국을 떠나 109일 동안의 어려운 항해를 거쳐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미국 선교회 회장 그림 박사(Dr. Green)를 만나 따뜻한 접대와 도움을 받았으며, 미 국무성 장관으로부터 광저우에 있는 미국 영사에게 보내는 소개장까지 받게 되었다. 이 소개장 덕분에 모리슨은 이후 광저우에 도착하여 미국 영사와 상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트리덴트 호 (Trident)의 선주 브레이크맨(Capt. Blakeman)은 모리슨에게 무료 승선의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트리덴트호를 타고 뉴욕을 출발, 113일의 항해 끝에
청의 쇄국 정책
그 당시 중국은 방대한 국토와 풍부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어 물자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대외무역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은 조공무역의 형식으로 국제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천조(天朝)인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국들은 해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조공품 이상을 하사하였다. 조공무역에 의한 국제관계는 평등관계가 아닌 종속관계로 이루어졌다. 서방국가들은 중국의 풍부한 물질이 필요해 평등한 무역을 원했을 뿐, 중국의 종속국이 되기는 원치 않았다. 중국은 이러한 서방 무역상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광저우 한 지역만 개방하고 많은 제한과 엄격한 규제 속에 무역을 허락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어려운 환격에서 대중국 무역을 했기 때문에 모리슨이 중국에 가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청의 금교(禁敎)정책
1727년 옹정제(雍正帝)는 금교령을 내려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기독교의 전래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모리슨의 광저우에 도착하였을 때 이 금교령은 여전히 법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그는 선교사의 자격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이 미국 국무성의 소개장이 있었기에, 미국 영사 캐링톤(Carrington)은 그를 자기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거주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영사의 집에 거주할 경우 신분이 쉽게 노출될 것을 우려한 모리슨은 얼마 후 변두리에 살고 있는 미국에서 온 상인 밀나(Milnar)의 집으로 옮겼다. 비록 선교의 꿈을 안고 중국에 오기는 했지만, 수많은 어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어 학습의 어려움
그가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어려움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당시 청 정부는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만약 중국인이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다 발각되면 그 중국어 교사를 사형시킬 정도였다. 모리슨은 가까스로 중국어(표준어)와 광둥어 선생을 초청하여 비밀리에 중국어를 배웠다. 그 두 선생들은 호주머니에 늘 독약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만약 발각되면 사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
경제적인 문제 또한 그를 괴롭혔다. 미국 상인 밀나의 집에 살다보니 방세와 음식비 등 생활비가 의외로 많이 들었다. 물론 런던선교회가 생활비를 규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활이 매우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몇 개월 후 밀라의 집을 떠나 창고와 같은 방으로 이사했다. 그는 중국식으로 식사하고, 중국인처럼 변발과 손톱을 기르고, 의복까지도 중국식으로 바꾸는 등 절약과 검소한 생활로 전환하였다.
천주교도의 방해
모리슨은 광저우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마카오에 도착하여 이곳에 얼마동안 머무르려 하였으나, 천주교인들의 심한 반대로 인해 광저우로 가야만 했다. 모리슨 이후에 온 런던회 선교사들도 천주교인들의 반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가정 생활의 어려움
모리슨이 중국에 온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마카오에서 머튼(Dr. Morton)박사 가정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모리슨은 머튼의 딸 메리(Mary Morton)와
모리슨의 선교 업적
동인도회사의 통역관
1809년 2월 20일은 모리슨에게 또 하나의 뜻깊은 날이었다. 그가 중국에 오는 것을 반대했던 동인도회사가 그를 회사의 통역관으로 초빙하였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이 되면서 광저우에 거주할 수 있는 법적인 지위를 획득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이 해결되었다. 동인도회사는 그에게 연봉 500파운드를 주었다.
그가 동인도회사의 직원이 되자 선교 사명을 버리고 세상 일에 몰두한다는 선교회 본부의 오해도 받아야 했지만, 선교활동에는 오히려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모리슨이 회사에 들어간 목적은 첫째, 거류문제가 보장되고 둘째, 직업을 통해 중국어를 더욱 잘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월급을 주기 때문에 선교회의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었고, 동인도회사의 선교사에 대한 편견을 고칠 수 있다는 점 등이었다. 그의 예견대로 그 후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은 모리슨의 중국선교 활동에 실제적인 도움과 정신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성경번역
모리슨이 런던회에 가입할 당시 모스레이 목사는 중국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798년 3월 7일 협회를 설립, 동방민족 성경번역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6년이 지난 후 영국성서공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를 설립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번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공회는 모리슨을 초청하여 중국어 성경번역을 일임하였다. 모리슨은 영국 상인 로버트(Roberts)와 스타운톤(Sir George Staunton)경의 지지를 얻어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1810년 9월 드디어 사도신경이 완성되었다. 중국에 온지 겨우 3년 밖에 안 되는 시기에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는 중국인 인쇄공을 고용하여 목판을 조각하는 동안 인쇄공 양발(梁發)을 알게 되었다. 양발은 후에 최초의 중국인 목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모리슨의 중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준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다.
그 이듬해 누가복음과 전도책자를 본국에 우송하였고, 1813년에는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하였다. 청 정부는 모리슨의 이러한 행동에 민감하여 모든 기독교 서적을 인쇄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엄한 명령을 반포하였다. 다
행히 당시 런던선교회에서는 모리슨의 요청에 따라 밀러 목사(Rev.Willian Miller)를 중국에 파송하여 모리슨의 선교사역을 돕도록 하였다. 1813년 7월 7일 밀러 목사가 광저우에 도착하였지만, 청 정부와 마카오를 통치하고 있던 포르투갈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장기간 머물 수가 없었다. 모리슨은 밀러 목사와의 상의 끝에 동남아시아의 말래카(Malacca, 馬六甲)로 가서 선교기지를 설립하고 선교사업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밀러 목사는 1815년 5월 21일 부인과 양발 등의 동역자들과 함께 말래카에 도착하여 모리슨의 지도 하에 인쇄소와 학교 등 선교에 필요한 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되어 말래카는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방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리슨은 신양성경 번역에 이어서 1819년 구약성경 번역을 완성하고, 1823년 말래카에서 성경을 출판하였다. 1823년 영국에 돌아가면서 모리슨은 중국어 성격을 직접 영국성서공회로 가지고 갔다. 모리슨의 중국어 성경 번역은 인도에서 출판된 말스맨(Marshman, 馬土曼) 역본보다 1년 뒤지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 중국선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중국성경 번역과 출판은 중국선교 역사에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였다.
영화서원
밀러 목사는 말래카에 온지 3개월 후 자신의 처소에서 어린이들을 모아서 수학, 자연과학, 푸젠어(福建語)를 무료로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광둥어(廣東語) 반을 증설하였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학생 수가 80명까지 되었다. 이 학교가 후에 설립된 영화서원의 전신이 되었다.
밀러 목사는 정부로부터 공지를 분양받아 선교사들의 숙소와 학교, 인쇄소 등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817년 완공하였다. 이로서 말래카는 동방선교의 본거지로 활약하게 되었다. 1815년 모리슨은 런던 선교회에 영화서원(Anglo-Chinese College, 英華書院) 건립계획과 그에 필요한 경비를 신청하였다. 선교회에서 500파운드를 지원하고 모리슨 자신이 1,000파운드와 매년 100파운드를 5년 동안 헌금하기로 하였다. 동인도 회사도 매년 1,200파운드를 일반 경비 명목으로 헌금 하기로 하였다.
1818년 11월 11일, 정식으로 영화서원을 설립하여 동서문학과 기독교 교리를 주로 교육하였다. 학생들은 유럽 학생들과 중국 학생들이었는데, 유럽 학생들에게는 중국어와 종교, 경제학 등을 가르쳤고 중국 학생들에게는 영어, 지리, 역사, 수학과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중국 학생들은 화교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가난한 화교자녀들을 무료로 기독교 교육을 시켜서, 장래에 그들로 하여금 중국 본토에 들어가 선교할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으로 남경 조약이 체결되자 영화서원은 홍콩으로 이주하여 신학교로 바뀌었다. 이 학교는 비록 중국 밖의 말래카에 세워졌지만 처음으로 중국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워진 근대식 학교였다.
출판사업
당시 청 정부가 기독교의 전래를 엄격히 금하였기에 공개적인 전도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출판사업은 모리슨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교사업이었고, 가장 주력한 사업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광저우와 마카오가 출판활동의 중심지였지만, 청 정부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말래카가 출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827년 서방에서 남으로 주조하여 만드는 활자인쇄 기술을 도입하여 출판사업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모리슨은 성경 번역 이외에도 각종 전도책자를 번역 또는 저술하였다. 「진도문답(眞道問答)」,「신도론(神道論)」,「구속구세총설진본(救贖救世總說眞本)」,「문답천설(問答淺設)」,「예수구법(耶稣求法)」등 다수의 문서를 출판하였다. 또한 종교서적 이외에 후세들이 중국어를 배우기에 편리하도록 「중국어 문법(中文文法)」,과 「화영자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