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란 말을 들으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서양 선교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지난 100년 동안 중국인들은 안에서 밖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선교사역에 있어서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중국 교회의 100여 년 선교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본토 개척선교 시기
중국자립회(中國自立會)
1906년, 상하이(上海) : 중국 성도들의 선교 헌신은 일찍이 21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 교회는 의화단 사건(청조 말기인 1900년 중국 화북(華北) 일대에서 일어난 배외적(排外?) 농민투쟁-편집자 주)의 자극을 받아 자립(自立)과 자전(自傳)에 힘쓰고 있었다. 1906년 위쭝저우(?宗周)가 상하이에서 <중국자립회>를 발기한 후, 전국 각지에 자립 교회가 세워졌고, 현지인 전도자들도 계속 세워졌다. 띵리메이(丁立美), 왕졍팅(王正廷) 등 여러 전도자들의 대중 전도는 중국 교회의 대외복음의 열정을 선도하였다.
중화학생입지전도단(中華學生立志佈道團)
1910년, 산둥(山東)성 웨이(潍)현 : 1910년 산둥성 웨이현 광원(廣文)학교에서 발기한 <중화학생입지전도단>은 띵리메이를 간사로 추대하고, 평생 동안 복음 전도에 헌신할 뜻을 세우도록 그리스도인 학생들을 도전하였다. 총 단원은 1,170명이었고, 전도에 헌신하기로 한 사람은 530명이었다.
지역 선교단체
<호남축호전도단(潮南逐家佈道團)은 1911년 후난성 창샤(長沙) 내지선교회(內地會)의 거인화(葛蔭華) 목사와 쑤무꽝(蕭慕光) 목사에 의해 발기되었다. 총 28명의 단원들이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였는데, 이들은 전도지와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집집마다 나누어주었다. 5년 동안 거의 10만 7천여 가구에 말씀을 전했다. 이외에도 각 지역마다 선교단체가 세워졌는데, 예를 들면 1912년 광둥(廣東)의 <河南佈道團>, 1913년 <上海東夫聽道處>와 <福州旗族佈道團>, <回民佈道團> 등이 있다.
중화국내전도단(中華國內佈道團)
1918년, 윈난(雲南)성 : 1918년 전국 기독인의 역량을 연합한 <중화국내전도단>은 중국 복음역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선교단체는 윈난성에서 시작하여 122년에는 동북의 헤이룽장(黑龍江)성까지 확대되었고, 1923년에는 멍구(蒙古)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연해로부터 점점 먼 변경 지역까지 국내선교의 범위를 확장해 나갔다. 이 선교단체 외에 <변경전도단(邊疆佈道團)>도 유사한 사역을 담당하였다.
보터리전도단(伯特利佈道團)
1931년 : 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년 간의 대부흥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중국에 많은 선교단체를 통해 복음의 불길을 일으키셨다. 1931년에 세워진 <보터리전도단>도 그중 하나이다. 지쯔원(計志文), 쑹상제(宋尙節) 등 국내외로 유명한 복음 전도자들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는데 그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다.
해외선교시기
중화국외전도단(中華國外佈道團)
1929년, 광시(廣西) 우저우(梧州) : 최초의 중국인 해외선교단체는 1929년에 창설되었다. 1928년 여름 광시자치구의 선도회건도성경학교(宣道會建道聖經學校)의 원장 제프리 목사(R.A. Jaffray)가 중국인 전도자 왕짜이(王載) 등과 담소를 나누다가 그에게 남양군도(남태평양)로의 선교여행을 권면하였다. 그 이듬해 귀국한 왕짜이는 제프리 목사와 남양군도선교회를 결성하기로 다시 남양군도로 선교차 떠났다. 이들은 1929년 9월 광시 우저우(梧州)에 총본부를 결성한 후 <중화국외전도단>으로 개칭하였고, 첫 번째로 주싱훈(朱醒魂) 목사를 베트남에 파견하였다. 그 후 린정예(林?耶) 목사와 리엔꽝린(練光臨) 목사 등을 인도네시아에 파견하였다. 창립 8년 후에 이르러서는 현지 파견 선교사가 평균 21명을 파견하였고, 남양군도의 여러 나라에 교회를 세워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였다.
편전복음단(遍傳福音團)
1947년, 산시(陝西)성 펑샹(鳳翔) : 1940년대 중국내지선교회가 세운 서북성경학원(西北聖經學院) 교수와 학생들이 기도하던 중에 중국 교회가 세계 각국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부학장이던 마마커(馬馬克) 목사는 이를 위해 1947년 기도회를 결성하고, 특별히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기도했다. 마 목사는 하나님께서 중국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예루살렘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맡기셨다고 생각했다. 후에 따이융미앤(戴永冕) 학장(허드슨테일러 선교사의 손자)의 주재 하에 교수와 학생 70여 명이 뜻을 모아 서북지역 다섯 성을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기도했고,얼마 후 이들이 중심이 되어 <편전복음단(Chinese Back to Jerusalem Evangelistic Band)>을 창립했다.1949년 편전복음단에 소속된 몇몇 학생들이 잇달아 서북의 간쑤(甘肅), 닝샤(寧夏), 칭하이(靑海), 시짱(西藏), 신장(新疆) 지역에 파송되었다. 그중 자오마이자(趙麥加)와 허언정(何恩?)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갔다. 편전복음단은 중국 서북에서 시작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 이란,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등을 경유하여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하는 비전을 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0년 신장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점령되고 국제적인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중국 국경을 넘어 더 전진하지 못하고 이 사역은 정체되어 버렸다.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편전복음단의 사역자들도 한 사람씩 사역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사역 초기에 품었던 소망과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것은 “신장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은 철대문으로 굳게 잠겨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루지 못한 사역을 우리의 자녀들이 계속 담당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라고 한 자오마이자의 말에서 잘 알 수 있다.현재 편전복음단 단원들의 손자, 손녀 중 일부가 중국 최서쪽인 카쉬가르에까지 정착해 있다. 이들은 지금도 이 사명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예루살렘까지 복음 전할 길을 열어 달라고 울며 기도하고 있다.
서북영공단(西北靈工團)
1946년, 산둥성 웨이현 : 1946년 장꾸취엔(張谷泉) 목사에 의해 산둥성 웨이팡현 러따오위안(樂道院)에 기도원이 세워졌다. 장 목사는 이 곳에서 매일 성경을 공부하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많은 젊은 사역자를 길러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서북지역에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부르심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분명했기에, 이들은 얼마 후<서북영공단>을 창설하여 신장까지 전진할 것을 결정했다. 두 목사의 인도로 다섯 차례 지역과 시기를 나누어 출발했다. 서북영공단의 목적 또한 복음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산둥에서 중국 서북으로 그리고 중동을 거쳐 예루살렘에서 주의 재림을 맞기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순종의 걸음을 옮겼다. 개인전도, 축호전도, 어떤 지역에서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힘껏 복음을 전했다.1947년에서 1949년까지 서북영공단은 사역의 역점을 신장의 하미(哈密)에 두었다. 각 단체에서도 신장의 남북 각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1951년을 기점으로, 카쉬가르(喀什)의 사역자가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1952년 쟝구취엔 등도 하미에서 체포되었다. 곧 이 사역은 완전히 중지되었다.1970년대에 이르러 일부 서북영공단 사역자들이 신장으로 돌아와 가정집회를 시작하였다. 초창기의 기적과 사명감에 또다시 불이 붙었다. 청년시절에 서북영공단에 가입하여 이제는 백발 노인이 된 사역자들이 오늘날까지 줄곧 서북의 변경지역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 그들의 복음의 횃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것이다.1949년 이후 해외 중국인 교회 가운데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동일문화권 혹은 타문화권 선교사역을 확대해 왔다. 현재 전세계의 중국인 선교사는 1,200명을 넘어섰고 중국인 선교사 파송단체는 약 50개이다.
가정교회의 이주선교
오늘날 중국 가정교회에 새로운 복음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바로 ‘이주선교’이다. 이주선교란 교회가 한 가정을 유사문화권 혹은 타문화권에 파송하여 그들이 그 지역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부 가정교회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주선교의 비전을 품기 시작했다. 진리의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고 사역의 경험도 풍부한 부부 선교사를 선발하여 공동체 훈련을 시킨 후 각 지역으로 파송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변경지역, 소수민족 지역 등으로 떠났는데, 도시로 간 경우도 있었다. 대체로 시짱(西藏), 칭하이(靑海), 신장(新疆),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쓰촨(四川), 광둥(廣東), 하이난(海南), 푸젠(福建), 장시(江西), 후난(湖南) 등지였다. 재정적으로는 교회가 초기 3년만 지원하고 그 후부터는 사역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비량하여 믿음으로 생활하도록 하였다.이들의 사역은 처음 6개월 간은 주로 본 교회와의 연결과 개척에 주안점을 두었다.
어떤 사역자는 지역 교회와 연결하여 임시 거처를 얻어 이후 소수민족 지역 혹은 미개척지에 들어가 선교하기 위한 조건을 준비했다. 어떤 이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도하며 교회를 건립했다. 언어의 장애, 사단의 방해, 이단의 훼방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이들은 각지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이주선교의 비전을 가진 교회들은 소수민족 선교와 함께 해외선교에 대해서도 계획을 가지고 있다. 주로 미얀마, 인도, 북한,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 등 주변국에 대한 영적 부담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해외선교 사역이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21세기 세계선교의 사명을 담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중국 교회는 인접국가 선교,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소망을 결코 버리지 않고 있다. 전국 각지의 일반 성도, 지도자, 신학생들은 때가 되면 어디라도 떠날 수 있도록 일찍부터 언어, 성경말씀, 봉사를 묵묵히 준비하고 있다. “21세기는 중국인이 선교에 헌신하는 세기”라는 말이 결코 구호에 그치지 않고 머지 않아 곧 실현될 것을 굳게 믿는다.
출처|‘宣敎的中國 , 「擧目」2001년 5월호
번역|이원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