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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0  통권 78호  필자 : 샤오위에한(小約翰)  |  조회 : 2989   프린트   이메일 
[내가 만난 하나님]
행복한 전도인의 삶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의 미(米) 자매(37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현재 가정교회 전도인으로 사역하고 있다. 이 글은 그녀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상한 아버지 

나는 부모님, 동생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과 친척이 기독교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큰 출혈로 생명을 잃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를 낳기로 결정하셨다. 인큐베이터에서 숨이 끊어질듯 말듯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의사인 어머니조차 나를 면회할 수 없었다. 일주일 후 어머니는 담당의사의 반대를 뿌리치고 나를 퇴원시켰다. 어머니는 새끼 고양이보다 작은 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강한 믿음을 가지고 세심하게 양육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가장이셨으며, 늘 풍성한 사랑으로 나를 돌보고 지키시는 아버지이셨다. 우산 없이 외출했다가 비를 만나서 그치게 해 주시길 기도하면 정말 비가 멈췄다. 버스를 타면 다시 내리기 시작하고, 버스에서 내리면 또 멈추곤 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성장하면서 나는 성경을 알기전부터 신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1979년 이후 교회가 다시 개방되어 예배가 허가되자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혼자 성경을 공부하면서, 성격속의 하나님이 바로 내가 믿는 그 하나님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친구를 전도하였는데, 그 친구가 자기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주님을 영접한 그 친구에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내게는 그와 같은 죄사함과 회개에 대한 깊은 체험은 없다. 물론 나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만,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께서 보호해주셨기에 심각한 죄의 경험, 상처와 고통이 별로 없을 따름이다. 후에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하면서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많이 깨닫게 되었지만, 내 또래들에 비해 심각한 어두움이나 갈등을 겪어본 적은 없다.

 제생이었던 어린 시절 

어렸을 때 나는 공부를 못하여 지진아 취급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1년 동안 늘 낙제생이었다. 수리와 어문 분야의 차이조차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는 학교 생활에서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런 나를 꾸중하거나 무시하기는 커녕, 내가 책을 꺼내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오히려 밖에 나가서 놀라고 하셨다. 비록 성적에 대한 열등감으로 수많은 실패를 맛보았고, 학교 가기 싫어 아침에 눈뜨는 것조차 싫었지만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하나님과  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내 정신은 언제나 건강하였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고 매일 주님께 기도 했다. 그래도 매번 낙제를 면치 못했지만 기도를 쉬지 않았다. 

대학입시를 3개월 앞두고 있던 고3의 어느 날이었다. ≪마오쩌둥선집(毛澤東選集)≫을 읽다가 문득 내용을 훤히 이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지난 11년 동안 끊임없이 기도하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좌절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진실로 말씀을 이루는 분이셨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하나님께는 11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의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르심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항공회사에 취직하였는데, 대우도 좋았고 일도 재미있었다. 나는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고통 받은 세대였기 때문에 대부분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했고, 성실한 기독교인은 이 사회에서도 탁월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할수록 두렵고 긴장되었으며,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당시 남동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유학의 권유가 들어왔다. 곧바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았고, 다시 다른 일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일 중에 주님의 아름다운 계획이 있음을 믿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3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내가 사역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교회 봉사는 하면 할수록 좋았지만, 한편으로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 당시 교회에는 몇 가지 고정관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여자 전도인은 결혼하면 안 되고, 화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가치관에 수긍할 수 없었다. 1985년 당시 젊은이들은 신세대 전도인들을 갈망하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왕밍따오(王明道)의 영향을 받았지만, 내게는 너그러우셨고 많은 기회를 주셨다. 오늘날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당시 나의 옷차림과 외모엔 숨겨진 뜻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조금 아름답게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전도하러 나가면, 사람들은  '전도인 맞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이든 분들의 모임을 인도할 때는 검정색 옷으로, 청년 모임을 인도할 때는 산뜻하고 밝은 옷으로 갈아 있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도 나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고, 사역은 평안과 기쁨이 넘쳤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던 중,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라'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그에 맞서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시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성경구절이 바로 시편 16편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편 16:5~6). 이 성경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부르심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동요는 있었다. 세상을 포기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회 목사님과 상의하자 그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너는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말하는 것이나 차림새나 전도인 타입이 아니다. 또한 전도인이 되면 너를 부양해 줄 사람도 없고 결혼도 못할 것이며, 노후 보장도 없다." 사실 목사님이 내가 전임사역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시는 이유는 그 자신이 신앙 때문에 20년 간 옥살이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부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부르심을 입은 후 표면적으로는 별 변화가 없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여가 시간에만 사역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모든 시간과 마음을 다하여 전적으로 주님의 일을 시작하였다. 노인들을 섬기면서 그들이 매우 진지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며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느꼈다. 청년 모임은 시작하자마자 부흥하기 시작했고, 동역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자매들이 많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형제들이 늘어나면서 남녀의 비율이 평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결혼과 유학 생활 

곁에 있던 동역자들이 하나 둘씩 결혼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내가 스물 여덟살 이전에 결혼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해 오신 부모님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전도인으로서 결혼은 정말 쉽지 않았다.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며 청혼해 왔으나 내겐 그 어떤 감동도 없었다. 그러다가 1994년 초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당시 그는 막 교회에 나온 초신자였다. 우리 교회에는 주일예배 후 초신자였다. 우리 교회에는 주일예배 후 초신자를 위한 성경공부반이 있었는데, 그는 교회 온지 3개월만에 다른 형제의 인도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처음 교제를 시작했을 때 그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였고 믿음이 매우 단순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믿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1995년에 결혼했는데, 나는 조금씩 그에게 영향을 미쳤고 모든 면에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처음에 성경을 마치 문학서적처럼 읽기 시작했지만 차츰 성경을 실제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다. 

얼마 후 우리는 함께 외국에 나가 신학을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의 신앙에 있어서 유학은 큰 성장의 시기였다. 친구도 별로 없고 외국인과의 거리감으로 무척 외롭고 힘들었다. 비록 중국인들이 있었지만, 모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오로지 주님 한 분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처리해야 했다. 이 또한 주님의 특별 훈련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신학을 하는 동안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나는 자주 그의 리포트 작성을 도와주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 일은 계속 되어, 그가 강의를 나가게 되면 내가 강의안을 검토해 주었다. 그러나 1년 후에는 오히려 그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남편을 빠르게 성장하였고, 교회 사역에도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지금은 나보다 더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있다.

선교사로부터 받은 교훈 

나는 상당 기간 외국인 선교사에게 배우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자신의 역할이 조력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상의하면 교회 목사님과 직접 상의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스로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많은 부분을 간섭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내게 우리 교회 사역자 20여 명을 데리고 자신이 있는 곳에 와서 배우게 했는데, 나는 이것이 현명한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의 말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교회의 질서가 문란해졌다. 심지어 그는 일부 교회 사역자들에게 직접 월급을 주기도 했다. 여러 가지로 선교사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나는 신학공부를 위해 바로 출국하였지만 귀국한 후에도 여러 가지 마음 상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비록 중국 교회에 부족한 점이 많을지라도 성숙을 위해서는 적당한 좌절과 고난이 필요하다.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듯이…. 이때 최선의 도움은 돕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야말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커다란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사실 문화에 대한 문제가 없는 곳은 없으며, 더욱이 서양인이 중국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한국인이 중국을 이해하는 것은 좀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문화가 중국 교회에 적용된 것 역시 문제가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쓴 ≪사모의 길≫이란 책을 보면 아내가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성우월주의의 산물로서 중국 성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 한국 성도들은 새벽기도가 교회 부흥의 원인이라고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새벽기도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나라의 문화까지 그대로 전하기 때문에, 신도들이 믿음을 갖게 된 후에는 외국인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동역자 간의 협력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역자들이 교회가 커지면 예배당부터 세우려 하는 것이다. 이때 동역자 간에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동양 사람들은 감성과 이성, 일과 인간관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데, 불화의 원인도 사실 개인차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길 원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배척하기 마련이다. 중국 교회 성도들이 영적으로는 많이 성숙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아직 미성숙한 점이 많다.

모든 모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어야 하고, 모임을 통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잘못되기 쉽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모임에 속한 모든 사람이 서로 친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친구가 되려면 성격이 맞고 의기가 투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역자는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관계이다. 친구가 아니라고 해서 대립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소한 일에 연연하여 분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하며, 동역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교회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경험과 정확성이 필요하다. 우리 중국 교회도 점점 각종 규칙과 제도를 세우고 있는데, 교회는 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법을 마련하여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사람에게 맡겨서도 기분대로 해서도 안된다. 또 재무에 관련된 제반문제, 즉 전도인의 월급 등은 반드시 규정대로 해야한다. 이처럼 제도가 전혀 없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제도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의 개척자로서 늘 창의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개척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중국 교회의 나아갈 길

현재 삼자교회는 정부의 규제를 받고 있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수 있는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삼자 내의 신실한 형제 자매들은 그 안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아직 많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해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빈번한 접촉에 대해 나이 많은 사역자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우리는 삼자교회 내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충성된 일군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의 가정교회는 대부분 소규모이고, 교회로서의 면모도 부족하고 규제도 많다. 전도인 단체와 총회의 수립이 시급하다. 이런 면에서 서양의 교회제도를 분석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도인들 간의 연합의 역사가 길지 않은 관계로 성례나 훈련, 사역에 있어 많은 마찰이 일고 있다. 또한 농촌 교회는 너무 토착화되어 있다. 도시의 교회들은  '도시가 농촌을 감싸안는' 전략들을 실천해 가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가  '법'에 제한 받는 현실에 대해서는 인내 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장소나 전도인이 자주 바뀌면 성도들의 성장에 불리하긴 하지만, 이것 또한 많은 사역자가 필요한 현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라 볼 수 있겠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더 일찍 철이 드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가정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더욱 성숙할 것이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부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흥의 장소에 마침 내가 있었을 뿐이다. 교회의 성장은 배우거나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나는 세례 요한을 본받고 싶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면 사용하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물러나 기다리는 것이다. 많은 전도인들이 그들의 사역 이후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하는데, 그것은 '고난과 역경의 삶'만이 주를 위한 삶이라는 오해 때문인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세실리아는 비록 십자가와 고난에 대한 수많은 찬송시를 썼지만, 그녀 자신은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와 결혼하여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처럼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럽다. 또한 나 역시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입었음을 알고 감사드린다.


출처 | www.21sz.org
번역 | 이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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