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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웨슬리의 아쉬움 1807년,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 한 알의 밀알로 중국 땅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키워진지 이제 200년이 지났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중국에서 행하신 크신 일을 돌이켜 보며 그 분을 경외하게 된다. 더구나 중국에서 사역하는 우리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생각하노라면 내가 우리 한국 교회의 한 지체인 것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하는 말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난 십 수 년 동안 선교 현장에서의 우리 사역은 요한 웨슬리가 남긴 일기의 한 대목을 연상하게 한다.
웨슬리는 1년 9개월 남짓한 그의 첫 선교 사역지인 아메리카의 조지아에서할 수 있는 만큼은 하였으나, 꼭 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한아쉬움을 안고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1737년 12월 2일의 일기 中) 중국기독교 200주년을 맞으며 앞으로 언제가 중국 땅을 떠나야 할 우리 선교사들의 마음에 웨슬리의 마지막 아쉬움이 결코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란다.
하늘의 아쉬움 중국이라는 선교 현지에 있어서하늘의 아쉬움이란선지자적인 선교사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구약의 선지자와 오늘날 선교사와의 연속성을 신학적으로 찾지 않아도 우리는 둘 사이에서 많은 관계적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고 굳게 믿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했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존재는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을 혼돈케 함으로 하늘의 탄식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고 믿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러나 선교사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로 인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중국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음은 과연 어떤 선교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교사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선지자적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임재하심을 그 스스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내적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과 심령 속에 넣어 주신 신탁(神託)의 말씀이 있다. 그들은 메시지, 즉 사업과 교육과 의료적인 접근에 우선한 신탁된 말씀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자들이다.
자기 마음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친 거짓 선지자의 존재처럼 오늘의 중국에도 자기의 구상과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짓 선교사들은 하늘의 탄식을 자아내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들은 더 많은 선교사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무리(눅12:32),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심령과 입술에 두신 신탁의 선교사 바로 선지자적 선교사를 찾고 계신 것이다.
중국기독교 200주년을 맞으며 선지자적 선교사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선교와 선교사란 이름을 가지고 선교 현장에서 행해지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생각과 행위들로 인한 것이다. 미숙한 경험으로 감추기에는 너무 많이 노출된 우리들의 안일함 욕심과 타성에 무디어진 우리를 경책함으로 일깨울 선지자의 일갈(一喝)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인한 죄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허무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소위 '성전신학(聖殿神學)'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예루살렘 불패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무참히 깨뜨리심으로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정확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선교하고 있다는 화려한 확신가운데 너무 많은 부끄러운 일들을 묻어 둔 체, 사역해 왔다. 아무도 그것을 말하며 경책할 수 없었기에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200주년을 맞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선교라는 하나님의 일 가운데 숨겨져 왔던 개인과 선교단체, 교회와 교단의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벗어 버리고 여호와 앞에 정결함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 곧 진정한 회개는 중국기독교 200주년을 맞으며 선교에 동참하는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땅의 아쉬움 두번째 아쉬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중국 땅의 교회에 대한 아쉬움이다. 중국에는 중국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그리고 선교사에 의해 개척되고 있는 중국교회 등이 공존하고 있다. 중국의 교회는 실제로 교회를 보지 못한 채 교회가 세워져 왔다. 그러나 오히려 조직화되지 않은 교회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터가 되었고 그 결과 약 1억의 중국교회 성도 가운데 85%이상이 가정교회 성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200주년을 맞는 이즈음에서는 이러한 중국 가정교회의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어야 한다. 즉 목회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급증하는 성도들의 다양한 요구 등 교회 성장에 따른 교회의 조직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교회의 조직화는 교회의 세속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제한되지 않는 중국 상황에 적합한 교회의 조직화를 모색해야 한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그 역사의 핍박을 감내하며 지하에서 그리고 소규모로 그리고 가정에서 교회의 형태를 유지해 왔다. 이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교회를 세워 그 모델을 보며 성장해 갈 수 있는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라'라고 하신 명령에 따라 '중국'에 와서 그 목적하신 바인 '교회'를 개척하고자 한다. 그 중국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교회'여야 하고 분명한 '중국의 교회'이어야 하며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중국'의 기초가 되는 교회이어야 한다. 가정교회의 합법화는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가정교회가 합법화되는 시점에서의 교회는 기독교 역사가 보여 주듯 교회의 세속화란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가정교회의 합법화 이전에 선교중국의 꿈을 실현할 건강한 가정교회의 조직구조를 모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 현지의 상황은 다행스럽게도 가장 이상적인 교회 조직화의 상황을 마련해 주고 있다.
현 중국 상황에서의 가장 적합한 모형은 결국 셀 교회일 수밖에 없다. 셀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담아내는 21세기 세계선교의 가장 중요한 전략임에 틀림없다. 중국선교 200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교회의 최대의 관건은 향후 10년 내에 그 모형적 교회를 중국에 얼마나 잘 심을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강한 교회의 조직이 실현되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목회자를 양육함으로 중국교회의 부흥과 세계선교의 거대한 물결이 중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꿈을 꾸어 본다.
벽의 아쉬움 그런데 이런 꿈의 실현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장벽은 심리적인 장벽이다. 그것은 특히 중국 현지의 공안에 대한 심리적인 위축감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공안은 선지서의 바벨론 혹은 고레스와 같을 수 있다. 잠든 이스라엘을 깨우고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은 바벨론과 고레스라는 믿지 않는 나라와 사람을 목자로 활용하셨다. 선지자는 선지서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죄에 대한 임박한 심판과 용서의 은혜 사이에 있는 신앙적 긴장을 호소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중국을 심판하고자하시는 하나님과 그 중국이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신앙적 긴장감으로 이 심리적 장벽을 돌파해야 한다.
두 번째 장벽은 이슬람권과 티베트불교권이라는 종교적 장벽이다. 특히 중국의 이슬람은 가장 견고한 장벽인데, 그것에 대한 최선의 전략적 방법은 '신탁(oracle)'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곳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그 보내실 자에게 주신 선포되어야 할 예언적 말씀만이 그 견고한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 형제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부인하지 못할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의 신탁된 말씀을 심령 속에 간직한 자만이 그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장벽은 지역적 장벽인데 이것은 선교사의 편중과 관련이 된다. 편중은 또한 경쟁으로 연결되어 선교 현지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슬람권과 티베트불교권에는 집중적으로 선교사가 배치되어야 가시적인 교회 개척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못한 선교사들의 자의적인 배치라는 지적이나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 삼은 바울(롬15:20, 새번역)과는 달리 선교사의 명예에 합당치 못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네 번째 장벽은 종족적 장벽으로 이것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균형과도 관련이 있다. 아직 교회라고는 전혀 있어 본 적이 없는 곳 한 번도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종족에게 우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전회의에 참여해 보지 않은 우리 모두의 허물이 될 것이다.
중국선교 200주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우리가 떠나야 할 때의 임박함을 시사한다. 이제 마지막 남은 우리의 핵심적 과제는 장벽을 뚫고(Breakthrough walls) 건강한 교회를 배가해나가는(Build a church) 선지자적 선교사(Be a prophetic missionary)에게 있다고 하는 선지서의 외침이 귀에 울려 그 멍멍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우윤 | 본지 편집자문위원, CUM 중국선교연구소장, 선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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