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지난호 
북쇼핑
2006.10.31  통권 98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4784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에서 수정주의(修正主義) 노선까지

지난 호에 우리는 1950년대의 중국 기독교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대약진운동(1958~1960) 시기와 수정주의 시기(1960~1965) 중국의 정치와 사회의 전체적인 배경을 이해하면서 1960년대 중국교회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약진운동
중국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던 1958년, 마오쩌둥(毛泽东)은 전국적으로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건설총노선(社會主義建設總路線)>, <농공업생산대약진(農工業生産大躍進)>, <인민공사(人民公社)> 등 사회전반을 사회주의로 개조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이상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실험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마오쩌둥은 국민들이 적극적인 태도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경우 빠른 시일 안에 사회주의 과정을 거쳐 가장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이념 하에서 전 국민을 일제히 생산활동에 참여케 하였다. 
그러나 경제 건설 계획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며 공사화(公社化)는 중국 전통사회에 미치는 변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의 공산주의 건설에 대한 열의가 마오 주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에 걸쳐 금세기에 볼 수 없는 재해가 연이어 발생하여 경제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 8월에는 중국과 사회주의 노선 문제로 긴장 상태에 있었던 소련이 자국의 경제 고문단들을 중국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마오쩌둥은 국가 주석을 리우샤오치(劉少奇)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수정주의 노선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대해 중국 정계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생겨나면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심각한 상태로 발전되었다. 
국가주석 리우샤오치와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소위 말하는 수정주의파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그 운동의 근본 방침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보고 중국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용적이고 기초산업부터 철저히 건설해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생산활동을 중시하고 개인의 이익과 자유를 긍정하며 정치사상의 통제나 압력을 최대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그 방침이나 방향의 잘못이 아니고 그 운동의 추진력이 철저하지 못하고 열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비록 마오쩌둥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당의 선전기관을 통해 정치사상과 인민들의 희생정신을 교육하여 국민들이 다함께 난관을 극복하도록 강력히 호소하였다. 
이처럼 60년대 초 중국은 정부 행정계통을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와 당을 중심으로 한 사상교육의 서로 다른 노선이 대립하면서 두 파벌 간의 투쟁이 심각해져 급기야는 1966년 문화혁명(文化革命)으로 발전되었다.

 

문화혁명 이전(以前)의 종교정책
이같은 정치적 변화 속에 중국교회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대약진운동시기에는 성도들이 모두 생산활동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이미 큰 타격을 받았던 중국교회는 결국 문을 닫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종교정책이 다소 완화되어 고전하던 중국교회는 잠시나마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958년 12월 18일에서 이듬해 1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한 전국통전회의(全國通典會議)에서 처음으로 민족과 종교 문제에 관한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중앙통전부 차장 왕펑(王鋒)은 과거 중국정부의 종교 정책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반드시 인민들의 신앙의 자유와 비신앙의 자유를 관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부는 강제적인 명령으로 국민의 신앙자유를 제한하거나 탄압하지 말고 더 나아가 성직자 중에서 성경을 비판하거나 종교문제를 변론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1년 9월, 중앙통전부 부장 리웨이한(李維漢)은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 간부회의에서 당의 <종교신앙자유정책(宗敎信仰自由政策)>을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종교신앙자유정책>이 유신론자들에게는 그들의 종교적 영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이용할 것으로 예기되지만 현재의 중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자유정책이 인민들의 신앙생활을 촉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종교 활동을 축소시키는 데 더욱 유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도 통전부의 이와 같은 태도를 지지하고 1962년 전국정치협상회의(全國政治協商會議)에서 종교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마르크스주의의 관념으로 일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처사라고 인정하고 사상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이며 특히 종교 신앙에 관한 문제들은 더욱 장시간에 걸쳐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 신앙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민들이 단결하여 민주통일전선(民主統一路線)을 확대해 나가 혁명 과업을 완수하여 조국을 건설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60년대에 중국은 리우샤오치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파들이 집권하여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결국은 그들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종교에 대한 변론과 종교정책의 변화
1963년 중앙통전부는 전국적인 주요한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정부의 종교 자유정책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리우샤오치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파의 지도자들도 이에 대응하여 변론을 전개했다. 정부를 대표한 야한장(牙含章)은 온건파로, 당을 대표한 요우샹(游?)과 리우쥔왕(劉俊望)은 급진파로 대두되었다. 
야한장은 미신과 유신론은 반드시 종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종교는 교리가 있지만 미신은 단지 귀신을 쫓아낼 뿐 교리가 없고, 유신론은 하나의 사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종교의 자유는 필요하지만 미신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신론 교육을 강조하면 유신론 문제는 인민들의 판단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급진파들은 종교는 인민을 착취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온건파와 급진파는 종교에 대한 명확한 견해의 차이를 보이듯 하나 실제로는 모두 마르크스적인 종교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만 급진파들은 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에 인민들의 사상을 염려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온건파들은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도태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온건파들은 해외의 종교단체는 국내의 종교 활동을 간섭할 수 없으며 종교 활동은 반드시 제한된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하며 교회는 반드시 국가와 당의 관할하에 활동해야 한다는 제한된 자유만을 허락하였다.  

 

사회주의와 중국 기독교
1958년 이후 교회에서도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되면서 목회자들도 다양한 노동활동에 참여해 자아반성과 사상개조의 태도를 보여야 했다.
1960년 초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국인민대회에서 우야오종(吳耀宗)은 목회자들은 당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만 여전히 유산계급과 제국주의 사상이 강하고 당의 민중운동과 지도노선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며 적극적인 자세와 노력으로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우야오종의 발표가 있은 후 기독교 잡지 <톈펑(天風)>에는 삼자애국운동에 참여하면서 당에서 주최하는 각종 정치학습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자아개조에 성공했다는 리우량모(劉良模)의 이야기를 실어 중국교회에 본보기를 보였다.
이와 같이 중국교회에 자아개조의 풍토가 생겨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각종 정치학습과 노동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교회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당시 주일예배를 제외한모든 활동은 정지되었다. 심방, 집회 등 모든 활동은 허락되지 않았고 심지어 설교내용도 먼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설교의 내용은 자연적으로 정부의 정책에 부합하는 순종, 사랑, 절약 등으로 국한되었다.

 

전국 기독교대회
리우샤오치의 수정주의파가 집권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완화 정책을 채택하고는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사회주의 교육과 계급투쟁을 추진해야 했다. 
한편 1960년 1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 기독교대회>에는 전국 25개 성, 시와 자치구 대표 등 모두 390명이 참석하여 삼자회(三自會)의 지도적 위치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앙통전부 차장 장즈이(張執一)는 당의 종교정책과 기독교 인사들의 자아개조에 관해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생산활동에 적극 참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사상과 노동의 개조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홍색목사(紅色牧師), 홍색신부(紅色神父)와 홍색승려(紅色和尙)이 되자고 촉구하였다.
삼자회의 부주석 우이팡(吳貽芳)은 1954년에서 1960년까지의 삼자회 업적을 보고하면서 1954년 이후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원칙을 실천하며 당의 노선을 명확히 이해하고 지도를  받아드려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자 노력하였다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다.
특히 이번 회의를 통해 이미 통과되었던 <제3조>를 완전히 삭제하여 각 교파가 사라지고 기독교가 삼자회의 지도하에 대연합되었다. 결국 중국 기독교는 과거 150여 년 동안 서양 교파의 영향을 받아서 각 교파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자체의 신앙과 교리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지만 이 회의를 통해 교파를 탈피하여 삼자회의 지도하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그 조직을 재편성하게 되었다.
또한 회의에 참석했던 대표들은 조국의 사회주의 건설은 전 인민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는 사업이므로 마땅히 사회주의 건설사업에 복종해야 하며 생산활동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共同聲明)을 발표하였다. 또한 누구든지 종교를 이유로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며 기독교 내 불법행위와 불법인사들은 반드시 폭로할 것을 밝혔다.

 

가정교회의 형성
1960년대 초, 가정을 중심으로 집회를 드리는 가정교회가 생겨났다. 정부는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여 엄격히 규제했지만 가정교회는 목회자도 없고 예배형식이나 제도가 일정하지 않는 소규모의 형태로 운영되면서 도시와 농촌에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가정교회가 형성된 요인은 첫째, 삼자교회의 설교 내용이 제한적일 뿐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적인 내용들이 많아 신도들의 갈급한 심령을 채워주지 못했다. 둘째, 삼자교회는 주일학교가 미제국주의의 산물이라며 주일학교 활동을 금지시켰다. 셋째, 삼자교회는 세례를 받을 경우 개인 신상에 관한 자료를 종교사무국에 보고하고 세례를 받은 후 국가의 이익에 위배되는 행위를 일체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해야 하는 등 많은 규정이 있었다. 넷째, 삼자교회는 목회자들이 목회활동 이외에도 노동에 참여해야 하고 목회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많은 신도들을 돌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때문에 중국은 정부에서 인정된 크게 삼자회 계통의 교회와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가정교회로 구별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