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강(靖康)의 변(變)’- 영토도 인구도 반으로 줄어든 송 제국
12세기 송(宋) 나라가 당쟁으로 인하여 내부적인 혼란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중국 동북부에서는 요(遼)의 지배하에 있던 반농반목의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1115-1234)나라를 세웠다.
송은 이 시기에 연운 16주(燕雲16州)의 실지를 회복하고자 새로 일어난 금과 동맹을 맺고 요를 공격하여 12세기 초에 요를 멸망시켰다. 송은 요를 멸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금과 직접 국경을 접함으로써 또 다른 위협을 받게 되었다. 목적을 달성한 송은 금에 대해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옌징(燕京, 지금의 베이징)을 손에 넣었지만 그 약속을 잘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의 분노를 샀다. 그리하여 금의 군대는 옌징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수도 카이펑(開封)을 위협하였다.
금군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낀 휘종(徽宗,1100-1125)은 황제 자리를 흠종(欽宗, 1125-1127)에게 물려주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조정에는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어 다투었고, 새로 제위에 오른 흠종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뿐이었다. 1126년, 수도 카이펑을 포위한 금은 많은 금은재물을 요구하고, 산시(山西)의 중산(中山)·허젠(河間)·타이위안(太原)의 3진(三鎭) 등지를 할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송은 어쩔 수 없이 금의 요구를 수락하고 화약(和約)을 맺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화약을 맺고 금군이 철수하자, 송 조정 내부에는 주전론자들을 중심으로 한 강경론이 대두하였다.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고, 3진 할양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도리어 금의 치하에 있는 거란인들에게 모반을 부추기는 등 내부 교란을 획책하면서 항전의 태도를 취하였다. 거듭되는 송의 배신행위에 격노한 금은 1126년 11-12월에 재차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일으켜 40일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카이펑을 함락하였다. 금은 카이펑을 점령하고 많은 재물을 몰수했다. 금은 송조를 멸하고 흠종 시대의 정방창(張邦昌)을 내세워 초(楚)국을 세웠다. 그리고 1127년 3월, 흠종, 휘종을 비롯하여 황족과 궁녀·관료·기술자 등 3,000여 명을 포로로 삼아 End베이(東北) 지방의 오국성(五國城: 지금의 黑龍江省 依蘭縣)으로 압송해 갔으며, 휘종이 많은 돈을 들여 수집한 귀중한 서화, 골동품 및 궁중의 온갖 보물들도 모두 가져갔다. 이로써 송조는 일시 끊어졌는데, 이 사건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강의 변’(1127)이라고 한다.
남송의 성립
‘정강의 변’으로 여러 황족들이 모두 금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흠종의 아우 강왕(康王) 조구(趙構)만이 수도를 떠나 허베이(河北)에 머물러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부친과 형인 두 황제가 북으로 끌려가자 천하의 인심은 강왕에게 쏠리고 있었다. 1127년 5월, 흠종의 동생 강왕이 북송의 남경이었던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河南省 商丘)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고쳤다. 이가 고종(高宗; 재위 1127-1162년)으로서 송 왕조를 다시 일으켰는데, 역사적으로 그 이전 흠종 시기까지를 북송(960-1127), 그 이후를 남송(1127-1279)이라 부른다.
고종은 황제가 되자 곧 미증유(未曾有)의 국난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우선 주전파 관료를 기용하여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군대를 소집하여 방위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러한 고종의 태도는 금을 크게 자극하였고, 금은 마침내 다시 남침하기 시작하였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도피하며 지내다가 1132년에 린안(臨安, 오늘날 항저우)에 도읍하고 금에 대항하였다.
송군은 금군에 비하여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에, 고종은 금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지에 의용군을 편성하여 대항하였다. 그런 부대 가운데에는 한세충(韓世忠), 악비, 장준(張俊) 등 유명한 장수도 있었다.
금군이 남송 영내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 왔지만 남송을 멸하지 못한 것은 이런 의용군들의 호된 반격 때문이었다. 그래서 금나라의 지배 영역은 대체로 황하 이북의 허베이 산시 지방에 국한되어 있었고, 허난 산둥 이남은 위성국으로 삼아 중국인으로써 중국인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에 금은 1130년에 유예(劉豫)를 옹립하여 카이펑을 수도로 삼아 제(齊)국을 세워 금의 전위대 역할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악비와 진회
금과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남송에서는 주전론과 주화론,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주전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악비이다. 악비(岳飛, 자는 鵬擧, 1103-1141)는 허난성 샹저우(相州) 탕인(湯陰)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농민 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학식과 무예를 닦아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북송 말기, 금나라가 자주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자 이에 맞서 각지에서 의용군이 일어났는데 악비는 1122년에 카이펑을 방위하고 있던 종택(宗澤)이 모은 의용군에 참가하여 군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금군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고, 나아가 남송의 유력한 군벌세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북벌에 나서 후베이성에서 허난성까지 진격해 큰 공을 세웠다. 악비군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은 크게 환영하였으며 중원 각지의 부대는 ‘악(岳)’ 글자를 깃발에 새겨 넣어 악비와 연합하여 금군 토벌에 나섰다. 악비군의 연전연승은 중원 천지를 크게 고무시켰다. 이 때문에 금나라 군대에서는 “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대를 무너뜨리기는 정말 힘들다.” 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잃어버렸던 영토를 다시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주화파(主和派)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주화파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진회이다. 진회(秦檜, 자는 會之, 1090-1155)는 장쑤(江蘇)성 난징(南京) 출신이다. 그는 1115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정강의 변’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1130년에 탈출하여 고종에게 돌아온 사람이다. 그는 포로로서 금에 있을 당시 금의 중신 다란(撻懶)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묵계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진회가 다란과 함께 모의하여 양국의 화의(和議)를 성립시키기 위해 밀정으로서 일부러 석방시켰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닐 정도로 진회는 열심히 화의를 추진하였다.
진회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자 고종은 금의 사정을 잘 알면서 주화파에 있던 그를 환대하고 곧바로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앉혔다가 그 이듬해에 재상(宰相)을 삼는다. 그 후 일시 재상 직에서 물러났으나 곧 바로 복귀하여 화친 교섭에 나섰다. 그는 1131년부터 1132년까지, 그리고 1138년부터 115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금과의 굴욕적인 화약(和約)
당시 주화파의 우두머리였던 재상 진회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교섭의 장애가 되는 일선의 장군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인들의 힘이 계속 커지는 것을 우려한 진회는 화평을 갈망하는 고종의 뜻을 받들어 강경수단으로 악비, 한세충 등 주전파 군벌세력의 실권을 박탈해 버렸다. 진회는 일선의 장군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한다는 구실을 붙여 소환하였다. 악비는 금과 화친에 반발하여 장군직을 내놓고 물러나게 된다. 그러자 진회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계략을 세워 악비를 옥에 가두고 악비와 그 아들 악운에게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반란을 꾀했다는 터무니없는 반역죄를 뒤집어씌운 후 옥중에서 극비리에 독살, 처형해 버렸다. 그때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1142년에 또다시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이로써 송과 금은 회이허(淮河)와 따산관(大散關)에 이르는 선을 양국의 국경선으로 정하고 송은 금에 대하여 신하에 예를 다하기로 하며,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바치기로 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화약의 결과 고종의 생모와 휘종의 시체가 반환되었다, 진회는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며, 그 후 20년간 재상에 있다가 1155년에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린안에 수도를 정한 남송은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에 힘입어 그 후 몽고에 멸망할 때까지 1세기 반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민족의 영웅’에서 ‘충성스런 군인’으로
항저우에 가면 ‘악왕묘(岳王廟)’가 있다. 시후(西湖)의 서북단 치샤링(棲霞嶺)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간신들의 모함으로 죽은 남송의 충신 악비의 공덕과 충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것은 1221년 남송 때에 지어진 것인데, 악왕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충렬사(忠烈祠) 대전 안에 자리 잡은 악비의 좌상이다. 이곳의 악비는 모든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앉은키가 4.5m나 되고, 화려한 보라색 비단옷을 걸치고 있다. 악비의 좌상 뒤편으로 검은 액자에 황금색으로 ‘환아하산(還我河山)’ 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다. 금나라에 빼앗긴 강산을 자신이 돌려받겠다는 뜻이다. 또 그 앞에는 악비를 모함에 빠뜨린 진회와 심복들의 철상이 꿇어 엎드리고 있는데, 전에는 이들 상에 침을 뱉고 난후 악비의 묘에 참배했다고 한다.
이 악비 좌상의 좌우와 뒤쪽 벽면에는 악비의 생애를 보여주는 큼직한 기록화들이 있다. 이 벽화 중에는 악비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악비가 전쟁터로 나갈 때 그의 어머니가 떠나는 아들의 등에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지키라는 글을 써 주는 벽화이다. 그의 어머니는 ‘정충보국(精忠報國)’ 이라는 네 글자를 악비의 등에 썼는데, 마지막 글자인 ‘국(國)’자의 마지막 점은 찍지 않았다고 한다. 악비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살아서 다시 돌아오면 그때 마지막 점을 찍어주겠는 것이다. 그러나 악비는 전장에서 여진족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동족의 모함에 의해서 목숨을 거두게 된다.
악비묘는 중국의 한족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이 악비묘를 단체로 찾는다. 세계 여러 곳에 퍼져서 살고 있는 화교들도 찾아와 악비의 애국적인 행동을 높이 평가한다. 악비는 위기에 빠진 송나라를 구해 한족들의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그의 투철한 충성심은 중국인들에 의해 크게 칭송을 받아 왔다.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외부의 침략과 압박에 저항하는 정신을 가진 무장으로서 존중되어 왔다.
반면 이 묘 앞에는 초라한 철상(鐵像)이 만들어져 있다. 악비가 죽어 묻힌 곳 앞에 있는 철상은 악비를 모함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한 진회 부부와 다른 간신 2명의 철상들이다. 이들은 무릎을 꿇고 손은 뒤쪽으로 포승줄로 묶인 채 돌 바닥 위에 수백 년간 고정되어 있다. 악비를 죽인 이들은 생전에는 가까스로 징벌을 면할 수 있었으나,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무리들의 철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림으로써 민족 반역자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진회부부의 상에 ‘침을 뱉지 마시오.’라고 경고문을 써 놓았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침을 뱉어 증오하고 있다. 진회 자신도 악비를 죽이는 것에 갈등을 겪으며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인의 종용으로 끝내 사형을 결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허난성에도 주시엔전(朱仙镇, 지금의 河南省 開封縣西南) 악비묘(岳飛廟)가 있다. 이것은 명대(1478)에 세워진 것으로, 주시엔전은 악비가 금군을 대파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1986년에는 허난성 인민정부가 이 사당을 성급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진회에 대해서는 당시의 금과 송의 역관계를 볼 때, 화북을 탈환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로 화평의 길을 택한 것은 남송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화약을 추진한 진회는 시세를 잘 읽었다는 옹호론도 있다. 또 송 왕조는 태조 이래 문치주의로서 군벌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니 송의 국책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북에서 쫓겨나와 불안정한 왕조를 안정시킨 것은 진회의 정치적 수완에 힘입은 바 크다는 이론이다. 이처럼 근년에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다.
또한 최근 중국에서 악비에 대한 평가에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002년 ‘중·고교 역사교육 지침’을 개정하면서 ‘악비는 더 이상 민족 영웅이 아니다.’ 라고 내부 역사서술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악비가 ‘민족영웅’에서 ‘충성스런 장군’으로 격하된 일부 내용이 유출되어 네티즌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 당국이 악비를 민족 영웅이 아니라 충성스런 장군으로 역사적 위치를 격하시킨 것은 악비가 무찌른 금나라 역사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입장에서 더 이상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는 설명인데, 이것은 최근 중국에서 일고 있는 역사 왜곡의 선상에 있다.
당시 송나라는 현재의 중국과 같이 한족 주변의 소수민족을 통일하지는 못한 나라였다. 당시 한족으로만 이루어진 송나라에서 악비는 말 그대로 한족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전쟁을 중국 내부의 분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사를 그들의 민족사로 보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시대와 민족을 넘어 침략에 항거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악비에 대하여 오늘의 현대인들이 역사를 왜곡하여 기술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