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이번호 
북쇼핑
2006.2.20  통권 94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4246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훈정(訓政)시기의 중국 기독교


1928년 장제스(蔣介石)총리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국은 훈정시기(1928-1937)로 진입하게 된다. 이 시기는 무력으로 통치하는 군정시기에서 헌법에 근거해 통치하는 헌정시기로 전환하는 과도기 형태의 특성을 갖는다.

필자는 중원대학교 종교연구소 차스제(査時傑)교수의 『민국 훈정시기의 기독교회』라는 논문을 참고하여 이시기의 중국 기독교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훈정 시기의 시대적 배경
1927년 3월,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한 북벌군이 양자강을 따라, 난징과 상하이(上海)를 회복하고, 화중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1928년 12월 29일, 만주지역의 대군벌 세력인 장쉐량(張學良)이 국민정부에 귀순하면서 중국은 군벌시대의 혼란한 국면을 잠시 종식하고, 전국을 다시 통일하면서, 국민당이 이끄는 정당정치의 새로운 훈정시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통일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투쟁과 분열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1921년에 성립한 중국 공산당은 표면적으로는 국민정부와 협조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적으로는 농민폭동운동을 책동하여 국민정부와 투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1937년까지 다섯 차례의 공산당 토벌 작전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훈정시기에 중국은 내정 뿐 아니라, 외교에 있어서도 여전히 사면초가의 상황 이였다. 비록 소련 등 일부 열강들이 불평등조약을 포기하고, 주제띠(租借地)를 반환하고, 영사재판권을 중국에 환원하는 등 외교적으로 소기의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강제로 점령하는 918사건으로 또 한 차례의 외교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와 국제연맹을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해 오히려 젊은 학생들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정부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키고 말았다. 또한 소련은 중국을 공산화 하기위하여 암암리에 공산당을 지지하고 도와서 중국은 일본과 소련의 야심적인 침략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비록 내정과 국제정세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지만 정치적 안정과 장기적인 집권을 도모하기위하여 훈정강요(訓政綱要)를 제정하였다. 국민정부는 사회, 경제, 교통, 종교와 교육 등 다방면에 개혁을 단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풍조를 개선하며,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종교 정책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군벌 소탕의 목적 하에 북벌을 단행하여 순조롭게 난징과 상하이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1927년 난징과 상하이를 회복한 후 쌍방 간의 사상과 노선이 달라 협조관계를 종식하고 다시 분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계속 북벌을 추진하여 이듬해 마침내 그 대업을 완수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국민당의 주도하에 정국을 이끌어 가게 되어서 국민당의 종교 정책은 중국 기독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민당은 전국의 정권을 장악한 후 당의 혁명 정책에 의해 군정시기를 종식하고, 바로 훈정시기로 진입하여 헌정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28년 10월 3일,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전부 6개 조항인 훈정강요(訓政綱要)를 통과시키고, 신속히 훈정시기약법(訓政時期約法)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5월 5일에서 17일까지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중화민국훈정시기약법”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에는 전국에서 각성의 지방대표와 농·공·상· 자유업과 당대표 등 모두 520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약법은 모두 8장의 89조항으로 되었는데, 훈정시기의 헌법과 같은 국가 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약법의 2장 6조에 종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었다.

“중화민국 국민은 남녀, 종족, 종교와 계급의 차별이 없고, 법률아래 누구나 일률적으로 평등하다.”

이 약법에 규정한 것 같이 중국 국민당이 주도하는 국민정부의 종교 정책은 국민의 종교 자유가 보장되었고, 모든 합법적인 종교는 법률아래 동등한 자유와 발전의 기회를 보장 받고 있었다. 비록 약법에서 국민의 종교자유가 보장은 되었지만,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기까지 교회는 많은 고통과 역경을 극복해야 했다. 

정치와 종교간의 논쟁
국민정부가 북벌군을 조직하여 북벌을 단행할 때에, 기독교는 북벌군에 대해 많은 염려와 우려를 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벌군이 점령하는 곳마다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학교, 병원과 교회에서 적지 않은 분규와 소란을 야기 시켰을 뿐 아니라, 국민정부가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제창하는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 사상이 중국 기독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계는 이토록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정치와 종교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했다.

1927년 1월, 교계를 대표하여 왕쯔씬(王治心) 교수는 교계 잡지인 문사월간(文社月刊)에  “손문주의(孫文主義)와 예수주의”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문장에서 손문선생이 제창한 삼민주의는 자유, 평등, 박애정신에 입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신을 가장 처음 제창한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손문주의는 바로 예수주의라고 말할 수 있고, 바로 이러한 정신에 의해서만이 국가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왕교수는 기독교와 혁명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부상조하는 위치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교계의 일부를 대표하여 국민정부의 관원들과 국민당 당원들이 삼민주의의 입장에서 혹은 혁명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반대하고 탄압하지 못하도록 손문과 예수의 공통점을 강조하였다. 이토록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지면을 통하여 사회여론을 환기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인 방법을 통하여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노력하였다. 상하이의 기독교 지도자인 위르짱(余日章), 청찡이(誠靜怡)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위르짱은 당시 전국중화기독교협진회의 회장을, 청찡이는 총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협진회는 초교파적인 전국 교회의 연합회로 중국교회를 대표하는 최고의 조직이었다. 그들은 직접 국민당 중앙 정치회의에 반영하여 종교의 자유를 취득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노력이 매우 주효하여, 1927년 5월 13일 중앙정치회의 93차 회의에서 이를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은 훈령을 발표하였다.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명목으로 혹은 다른 어떠한 세력으로 국민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박해하지 못하도록 민중들을 선도해야 한다.”

비록 국민당은 이와 같은 국민의 신앙 자유의 훈령으로 중국 기독교에 선의의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이를 실행하지까지는 많은 노력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왜냐하면 국민정부가 이끄는 북벌군이 점령하는 지역에서 북벌군에 의해 교회와 학교 병원들의 시설이 군에 점령되거나 파괴되는 등 여전히 반기독교의 여론과 행동이 기세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침묵과 자성의 자세로 인내하며, 관망하고 있지만 일부 극진파의 지도자들은 교계의 잡지와 신문 등을 통해 깊은 관심을 표하고, 국민당의 종교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스짱(張仕章)은  “국민당의 종교화”라는 글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국민당은 이미 종교화가 되었다. 손총리는 그의 교주이고,《건국책략》,《건국대강》,《삼민주의》와《제1차전국대표대회선언》은 바로 그의 성경이며, 총리 기념주는 바로 그의 예배의식이었다. 그리고 당화 교육은 그의 강압적인 종교교육이 되었다. 국민당의『이당치국』이라는 구호는 바로 국교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장스짱은 표면적으로 삼민주의가 국교로 변신할 것을 염려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국민당의 미온적인 종교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조속히 당과 교회, 정부와 교회 간에 정상적인 관계를 건립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국민당 내부에서도 정치와 종교, 정당과 종교 관계에 비교적 관심있는 일부 인사들도 기독교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에 동조하여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여 종교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짱즈쟝(張之江), 뉴용젠(紐永健)은 중앙정치위원의 신분으로 제128회 중앙정치회의에 「종교 자유를 실행하여, 기독교를 반대하고, 각종 종교를 반대하는 구호 등을 취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들이 제안한 주요 내용은 종교 자유는 세계적인 통례이고, 특히 기독교의 교리가 평등, 박애와 자유를 제창하고, 이를 신도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기독교 신도들이 이에 감화되어 영국,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 각국에서 혁명을 발기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손총리와 많은 혁명동지들이 기독교 정신에 감화하여, 혁명을 감행하고, 구국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복음 자체가 극히 선하고, 혁명 정신이 강하여 불쌍한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이고 절대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들의 제안은 이 회의에서 어떠한 결의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 핵심 국민당원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기관지인 『민국일보』와 『각오(覺悟)』등의 잡지에 그들의 제안에 반대하는 글들을 수없이 발표하고, 강력히 기독교를 반대하였다. 그 중에 예청수오(葉聲所)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종교는 정치 보조품의 하나이고, 그 정책을 실행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인류가 종교적인 속성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종교가 사회를 개혁하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는 견해에는 절대 반대한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현재의 기독교는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도구가 아니면 타도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취소하자는 제의는 먼저 기독교를 본토화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반대하겠다.”

예청수오는 종교가 정치의 보조품이고, 정책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도구인 기독교가 아직도 제국주의의 도구이며, 아직까지도 국민정부의 도구가 아니기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빈곤한 현재의 중국에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종교를 과감히 개혁하고, 종교 인사들을 생산대열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장쩐전(張振振)도 『각오(覺悟)』에 『나의 종교관』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장즈쟝과 뉴용젠의 주장을 강력히 반박하고 나섰다. 그가 반대하는 주요한 이유는 국민당 안에 종교의 좋은 점을 모두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당원들은 최선을 다해 당을 건설하기만 하면 되고, 종교문제까지 간섭할 여가와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손문선생은 예수와 모세보다 위대한 지도자이고, 그가 주장하는 자유, 평등과 박애사상은 그 어떠한 종교보다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당의 힘으로 힘들고 어려운 백성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장즈쟝과 뉴용젠이 제안한 「종교 자유를 실행하여, 기독교를 반대하고, 각종 종교를 반대하는 구호 등을 취소하자」는 안건이 이토록 국민당 내부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자 교회 지도자들은 방관하지 않고, 교회 잡지 등에 국민당의 반기독교 여론에 반발하며 장, 뉴의 제안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장스짱은 『문사월간』에『나도 종교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취소하자는 제안에 할 말이 있다』는 문장을 발표하면서, 종교는 개인의 문제이지, 결코 어느 당이나 정치 세력에 의해 강제로 집행하거나, 무력과 총칼로 핍박해서도 안 된다. 만약 중국국민당이 진정으로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먼저 백색 제국주의와 적색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고 있는 40만 중국 기독교인들의 고통을 동정하고, 기독교와 합력하여 제국주의를 물리쳐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쌍방 간의 논쟁이 그칠 줄 모르고 치열해 갈 때, 1928년 2월 26일 국민당 중앙상임위원회의에서는 인민들의 종교자유와 각종 종교단체들을 보호한다는 결론을 지었다. 이와 같이 국민당 상임위원회의 결정은 치열한 종교 논쟁의 막을 내리게는 했지만, 실제적인 갈등과 모순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5월, 국민정부가 난징에서 전국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약법(約法)을 통과시킬 때에도 반기독교 인사들이 약법 제2장 제11조항의 『국민의 신앙자유』를 폐기 수정하자는 제의를 하여, 다시 한 번 종교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다수의 대표들이 종교는 인민들을 선도하여 법률의 부족한 면을 보충할 뿐 아니라 과거 유럽의 역사에서 정치가 종교를 간섭해서 수많은 분쟁을 일으킨 역사적 교훈과 중국에서는 국민의 신앙을 통제하는 전례가 없었다는 설득력있는 이유로 무사히 통과 시켰다.

이로써 국민정부의 종교정책은 더욱 명백해 졌고, 기독교도 법률로써 그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국민정부와 국민당의 영도자인 장제스주석이 부인 송메이링(宋美齡)의 영향으로, 1930년 10월 23일, 상하이에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물론 이는 한 개인의 신앙 변화에 불과한 것이지만, 정부와 당의 유일한 영도자인 장제스 주석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당과 기독교와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1934년 2월 19일, 국민정부는 난창(南昌)에서 신생활운동(信生活運動)을 발기하면서, 당시 군사위원회의 장제스 위원장은 교회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사회와 민중생활을 개선하는데 기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교회는 장위원장의 요청에 즉각 선의의 반응을 보이고 신생활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민정부와 당, 그리고 기독교와의 긴장된 관계가 점점 해소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 협조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론
1928년 12월 동북 만주의 군벌세력인 장쉐량이 국민정부에 귀의하여 중국은 다시 통일의 국면을 맞이하면서, 군정시기를 종식하고, 헌정시기를 위한 과도기 정치체제인 훈정시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국민정부가 국민당의 영도 하에 정국을 주도하면서, 훈정시기약법을 제정하여 훈정시기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경제, 사회, 교육과 종교 등 각계각층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비하여 갔다.

비
록 국민당은 “훈정강요”와, “훈정시기약법” 등을 통해 국민의 종교자유를 보장했지만, 국민당 내부의 일부 보수 세력들은 여전히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생각하여 종교 자유를 적극 반대하였다. 또 일부는 삼민주의를 과도하게 숭배하여 삼민주의 사상에 모든 종교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어, 종교의 존재 필요성을 무시하며 종교의 자유를 반대하였다.

교회는 이러한 풍파 속에서 지면을 통해, 이성적인 변론과 교계 자체의 조정으로 국민정부와 정당과의 긴장된 관계를 해소하며, 약법 등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취득하고, 신생활 운동과 농촌의 재건 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중국 기독교의 발전의 토대를 공고히 다져나갔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