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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20  통권 94호  필자 : 김평화  |  조회 : 2884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여성사역자, 그 존재의 아름다움
냉장고 안의 달걀이 닭이 될 수 있나요?
여성사역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남편을 향한 이 말씀을 마음속에 꼬옥 새긴 채 96년 8월 서울의 한 중국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 9월 초임선교사의 신분으로 두 달이 채 안된 갓 난 딸아이를 데리고 중국 A성에 첫발을 내딛었다.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중국 현지인을 품고 사랑하겠노라는 굳은 결심을 했었다. 미혼이 아닌 기혼 여성으로 중국 현지에 살면서 내게 찾아온 크고 작은 변화들을 나누고자 한다.

아줌마로 향하는 신체의 변화
당시 중국 A성에 갓 난 딸을 데리고 살면서 당장 부딪히는 큰 문제는 아이의 분유와 우유를 구하는 것이었다. 수소문 끝에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한 모백화점에만 우유 아닌 우유(오래 보관해서 먹을 수 있는 탈지분유 같은 제품)를 판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달려가 자전거 뒤에 우유 한 박스를 가득 실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서는 완전히 넉다운 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당시 중국 분유는 가짜가 많았기에 아이에게 그것을 먹인다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미국 등의 분유를 선호하였는데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에 분유 값을 절약하느라 첫째 아이에게 1년 2개월 정도 모유수유를 하였다. 2000년 중국에서 둘째 딸을 낳았는데 둘째 역시 1년이 넘도록 모유수유를 하느라 젊은 나이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여성들보다 가슴이 많이 처져버렸다. 작년 여름 무더운 어느 날, 비교적 타이트한 상의를 입고 밖에 외출하였는데 한국에서 온 한 자매가 눈이 동그래지며 "○○엄마, 그거 안 했어? up(업)해 주는 것이 없나 보지?" "……" 무심코 내게 던진 그 말에 순간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여유롭지 않은 환경에서 아이들에게 모유수유를 오래 해서 그래요"라는 변명 아닌 변명이라도 꼭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교의 경험이 없이 넉넉히 살아온 그 자매가 날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신분의 변화
같은 부르심을 가지고 같은 선교사의 신분으로 남편과 함께 중국 땅을 밟은 우리 부부는 지금 중국 B성의 G족을 섬기고 있다. G족은 55개 소수민족 안에 포함되지 않은 그야말로 소수민족이지만 우리에겐 너무도 소중한 민족이다. 남편은 특히 주말과 공휴일을 이용해 G족 마을을 자주 방문하고 있다. 시골 산길을 2시간 이상을 걸어가야 그 민족을 만날 수 있는 외롭고 힘든, 그렇지만 당장 열매를 보기도 쉽지 않은 그 일을 남편은 늘 기쁘게 잘 감당하고 있다. 그렇기에 남편의 잦은 부재 속에 자녀교육과 가정의 모든 일을 혼자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부인 선교사'로서 가정사역에 많은 비중을 둘 수밖에 없는 신분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작년 8월 우리 가정은 B성으로 G족 사역을 위해 이사를 했다. B성 B시에는 한국인 두 가정, 외국인 5명만이 S대학에 공식등록이 되어 있다. 갓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 마음을 나눌 친구,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첫째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데 현지 학교 전교생 중에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래서 외국인을 쉽게 접해보지 못한 대부분의 소수민족 아이들에게는 우리 아이가 마냥 신기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중국어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 곳에 도대체 왜 왔는지', '무얼 입고, 무얼 먹고 사는지'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큰애가 방 후 엉엉 울면서 돌아왔다. 옆 반 짓궂은 남자아이 4명이 '??老外(외국인)'라고 놀리며 아이의 머리를 여러 대 때리고 심지어 한 아이는 집까지 쫓아와 옷에 침을 뱉고 도망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나를 향한 또 그 철없는 아이들을 향한 분노를 절제할 수 없었다. 아이가 맞고 돌아온 것이 벌써 두 번째 라는 것과 남편의 부재 속에 긴 시간 아이들과 씨름하며 힘들게 지낼 때 갑자기 당하게 된 억울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영혼만을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정체성의 흔들림과 아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보호해 주지 못한 나 자신의 무력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날 저녁, 상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소서 엡 1:18) 붙들며 나의 소명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앞조차 보지 못할 때 주님께서 이렇게 위로를 해 주셨다.

"평화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누군지 아니? 그것은 나를 아는 사람이란다. 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는 소망과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있지."

이어서 하박국 3장 19절 말씀을 주셨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내가 너를 보냈기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게. 일 잘하는 선교사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더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렴."

난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기도했다.

"
합당치 않은 이유로 분을 내고 정체성까지 상실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주님 제 두 아이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온전히 맡겨드리지 못한 죄를 용서하소서.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미리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처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닮는 선교사가 되게 하소서."

난 그 일 이후로 B성에 살면서 가정사역에 대한 중요성과 내가 매달려야 하는 분은 오직 고독 속에서의 나를 현재의 나로 만드시는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처절히 깨닫게 되었다. 

난 자신을 가끔 냉장고 속의 달걀로 비유할 때가 있다. 달걀은 원래 반드시 닭이 되어야 하는데, 냉장고 안의 서늘한 온도로 인해 달걀은 닭으로 변할 수 없다. '이 선교지의 환경이 마치 냉장고 속의 환경 같기에 기혼여성, 부인선교사라는 신분만으로 내 본분의 삶을  실현할 수 없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난 이제 그런 착각을 깨고 그리스도의 능력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승리할 수 있다. 

오늘도 예쁜 구두 대신 굽 낮은 운동화를 신고 세련된 핸드백 대신 물건을 최대한 많이 담을 수 있는 등산용 가방을 짊어지고 내가 사랑할 중국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들의 장을 보기 위하여 시끌시끌한 시장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아줌마 이기에 가능한 패션이 아닐까? 비록 그날 저녁 과로와 피로로 잠을 못 이룰지라도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기쁨을 누리며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감할 것이다.  


김평화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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