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대 문화의 성격
1368년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운 태조 홍무제는 몽고풍속을 타도하고 한문화를 부흥시켜 나갔다. 호복(胡服)과 호어(胡語)를 금하고 아울러 당송의 제도를 모범으로 한문화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특히 유교이념을 확립하고, 육유(六諭:1397(홍무 30)년에 태조 홍무제가 반포한 6조로 된 교육 칙어)를 제정하여 적극적으로 민중을 교화하여 나갔다. 그 결과 명대문화에는 민족주의적이고 복고적인 성향이 짙게 깔리면서 문화의 독창성이 결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고,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등을 편찬하여 과거 시험의 참고도서로 삼아 학문의 획일화를 꾀하였으니, 자연히 사상과 학문은 극심한 침체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편 명대에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생산의 발달로 상업도시가 번창하고 도시문화가 일어났다. 이와 함께 서민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더불어 사상적으로는 16세기에는 주자학의 형식화에 반발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일어났다. 양명학은 침체한 사상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나, 후에 일어난 극단적인 행동주의, 양명학의 진의를 버린 공리공담 등은 지식인들에게 위험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고, 사회를 바로 잡아 나갈 수 있는 사상으로서는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때 명말 학문계를 주도한 것은 ‘경세실용(經世實用)’의 사상이었다. 이것은 서양학문의 전래와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른 것으로, 제도의 틀을 벗어나서 ‘실(實)’을 추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며, 학문의 관심도 중농, 중상, 부민, 금융 등 실제로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에 쏠리게 되었다. 명말의 이러한 실용성·서민성의 경향은 기술과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져왔던 것이다.
명말 기술과 자연과학의 발달
명 말기는 실용주의 학문의 부각으로 기술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이 나타났다. 먼저 중국의 전통적인 약초와 식물학에 대한 백과사전인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이 유명하다. 그리고 계성(計成)은 정원의 이론과 조성 기술을 설명한『園冶(일명 奪天工)를 지었고, 서광계는 농업 기술에 관한 백과사전인『농정전서(農政全書)』와 서양 역법을 받아들여 중국 역법을 근본적으로 개혁한『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하였으며, 서하객(徐霞客)은 전국 각 지방을 직접 답사하고 각지 산하, 지형, 풍토, 습관 등을 기술한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를 내었는데, 이것은 지형학의 원조요, 암석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또한 병학의 뛰어난 업적을 남긴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 음악·율력 혹은 수학 계량학 등을 다룬 주재육(朱載堉)의 『악률전서(樂律全書)』, 역학적 기계를 설명한 선교사 鄧玉函(Johann Terrenz Schreck)의 『원서기기도설(遠西奇器圖說)』, 총포의 구조를 설명한 조사정(趙士禎)의 『신기보(神器譜)』, 산업 과학기술 백과사전인 송응성의 『천공개물(天工開物)』 등 새로운 과학기술 서적이 출판되었다.
이런 자연과학의 발달은 명 중기 이후 상공업의 발달과 그에 따른 서민생활의 향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더욱이 명 말에 유럽인들이 중국으로 건너옴으로써 서양의 과학 지식이 전해진 데 자극을 받았다. 특히 크리스트교 선교사가 들어와 포술, 천문학, 역법 지리학 등의 새로운 학문을 소개하여 실용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명 말 학문의 저류에는 실학 존중의 정신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술·과학서 저술
『천공개물』의 저자 송응성(宋應星1587-1664, 자는 長庚)은 1587년에 장시(江西)성 펑신현(奉新縣)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송경(宋景)은 명 가정 25년에 도찰원좌도어사를 지낸 인물이며, 그의 가문에는 과거 합격자도 여러 명 있는 사대부 집안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사물에 집중력이 강하였다고 전해진다.
1615년(만력 43년)에 형 송응승(宋應昇)과 함께 29세의 나이로 지방에서 치르는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향시 합격자)이 되었다. 이때 장시성의 수험생 1만여 명 중에 합격자는 겨우 83명에 불과하였고 그것도 펑신현에서는 송씨 형제밖에 없었기에 그들을 “奉新二宋(봉신이송)”이라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5차례나 베이징에 올라가 회시(중앙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한 잦은 베이징에의 여행은 그로 하여금 견문을 넓히는 계기를 안겨다 주었다. 남쪽 강남으로부터 북쪽 베이징까지 여행하는 도중, 직접 보고 들은 각지의 생산 활동에 관한 지식은 책에서만 보아오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중국과학기술사의 권위자로서의 토대를 쌓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1634년 장시성 펀이(分宜)현 현학의 교사가 되어 지방교육 행정에도 간여하였다. 이어 1638년, 푸젠(福建)성 팅저우(汀州)부 추관(推官, 정8품으로 성 관찰사의 속관으로 부의 형옥과 감찰을 담당)이 된 후, 1641년(숭정 14)에는 안후이(安徽)성 보조우(?州)의 지방장관(知州)으로서 주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는 이 때 지방관으로서 명말 동란으로 인하여 유랑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일에 힘쓰기도 하였다. 1644년,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징산(景山)에서 자살하고 명의 왕조가 멸망하고, 그 후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송응성은 이민족에게 벼슬하기를 꺼려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였는데, 자손들에게도 청나라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적극 만류하였다고 한다.
『천공개물』은 송응성이 장시의 지방학교 교사로 몸담고 있을 때 만들어졌다. 그는 틈만 있으면 고대 과학 계통의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그가 서술한 중국의 산업 기술서는 곧바로 친구의 도움으로 1637년(숭정 10년)에 출판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천공개물』은 중국 전통적인 생산 기술을 폭넓게 모아 과학적으로 기술한 일종의 백과전서이며, 숭정연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천공개물』의 초판을 흔히 ‘숭정판’이라고 부른다.
민족의 수호자이며 과학자였던 송응성은 청나라 강희 연간(1661-1722) 초기에 80여 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장시성 펑신현에 안장되어 있는데, 지금도 그의 묘소에는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절개와 과학에 대한 공로를 기리는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천공개물』의 내용 및 특징
『천공개물』은 상·중·하 3권, 18부로 구성되어 있는 일종의 산업 기술 백과전서다. 그 내용은 곡류(穀類), 의복, 염색, 조제(調製), 제염(製?), 제당(製糖), 제도(製陶), 주조(鑄造 : 녹인 쇠붙이를 거푸집에 부어 물건을 만드는 일), 주거(舟車), 단조(鍛造 :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필요한 형체를 만드는 일), 번석(燔石), 제유(製油), 제지, 제련, 병기 주묵(朱墨) 양조, 주옥(珠玉) 등 18개 항목에서 30여 종의 산업 기술을 소개해 놓았다. 그 배열은 농업기술을 가장 중히 여기고 사치 기술을 뒤로 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농업 중시 사상이 은연중에 들어 있는 듯 하다.
『천공개물』의 서술 내용은 전체적으로 식품에 관한 부분이 전체의 1/3을 차지하며, 채광을 포함한 금속 가공부분도 상당 분량 기술하였다. 금속 가공은 주로 일용기구의 제작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병기(兵器)에 관해서 한 항목을 할애하였는데, 특히 화기를 다룬 까닭은 유럽의 영향과 명나라 말기 사회정세, 곧 명말 농민기의라든지 여진족의 침입이라는 긴장된 사회정세를 반영한 것이라 보인다. 그리고 제염, 제당, 착유, 벽돌제조, 도자기 제조, 제지, 제련, 병기, 화약 제조법, 석회, 유황, 백반의 채취법과 제조법, 각종 제품의 원료 가공법 등 각종 산업을 거의 총망라하여 기술하였는데, 제조공정도 요령 있게 잘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23폭의 삽화까지 그려 넣어 독자들의 이해를 크게 돕도록 배려했다. 다른 서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자 대상을 지식층에 두었으며, 기술지도서 역할도 얼마간 의식한 듯한데, 기술현장에서 얻은 것으로 여겨지는 세세한 주의사항까지 기록하고 있다. 예외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송(宋)나라 이래의 뚜렷한 실증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는 실증서이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은 교훈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명말 관료들이 호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이 누리고 있는 생활 자료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과정도 잘 모른 체 그저 부패와 호화 사치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이러한 관료들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송응성은 의분을 가지고 이 책을 썼던 것이며, 농업, 제염, 철강 등 국가 기간산업에 상당 부분 할애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철학적인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천공개물(天工開物』의 ‘천공(天工)’이란 ‘인공(人工)’에 대한 자연력을 가리키는 말로, 모든 물(物)은 대자연에 의해 생성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물’이란 이 자연력을 이용하는 인간의 힘을 뜻하는 말로, 자연력은 인간의 개발에 의해서 비로소 요구되는 물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천공’이 근본으로, 거기에 순응하면서 이용가치를 가진 물질을 만들어 내는 곳에 인간의 기술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람과 물질과의 관계를 유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천공개물』이라는 서명은 이와 같은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것은 송응성의 철학 사상의 진수인 동시에 중국 철학 사상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술관은 자연을 신의 손에서 해방시켜 그것을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생각한 서양의 근대적 기계관과는 크게 대조되는 사고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한 사람이 농업, 수공업, 생산 계통 등 폭넓은 기술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점, 둘째, 이해를 돕기 위해 다수의 삽화를 넣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 셋째, 저자 자신의 직접 관찰과 경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 자료에 의해 서술되었다는 점, 넷째, 방술서나 본초학 등의 미신적 태도를 배격하고 사실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점들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명대의 학술이 공리공담에 치우쳐 있었기에 그 반동으로 명말에 서하객의 『서하객유기』나 송응성의 『천공개물』등이 출현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술을 단순한 시대적 반동으로만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명말 공리공담이라 하는 것은 양명학으로 대표되는 유교 분야에 국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근대적·실증적 정신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실학으로의 지향은 이미 송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것은 원에 의한 이민족 지배를 통하여 주로 강남의 서민층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고, 그 실용의 지향성이 명말에 표출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천공개물』이 출판된 후 푸젠의 서적상인 양소경(楊素卿)이 청초에 제2판을 간행하였으나 반청사상가의 저술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귀중한 저서가 청대에 들어와 완전히 무시되고 그 존재조차도 불확실하게 된 데에는 송응성이 반청 학자로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말 청초기에 이 외에도 『관상(觀象)』, 『악률(樂律)』,『야의(野議)』,『화음귀정(畵音歸正)』등 자연과학, 인문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모두 19종의 저술을 내었으나, 청의 통치자들이 이 저술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멸되고 말았다.
그래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1725), 『수시통고(授時通考)』(1737) 등 관찬 서적에서 널리 인용되어 당시 많은 학자들이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 책은 17세기 말 일본에 전해 1771년에 오사카(大阪)에서 출판되어 에도시대(1603-1686)의 중요한 서적으로 읽혀졌고, 18세기에는 조선에도 전해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화민국 수립 후 베이징도서관에서 저장(浙江) 닝뽀(寧波)에 있는 모하이루(墨海樓)에서 기증 받은 고서 가운데 『천공개물』의 수정판 원본이 발견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중화민국 초에 딩원장(丁文江)이 책을 다시 널리 알림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더불어 송응성의 생애와 그의 업적도 밝혀지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천공개물은 화기(火器)에 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서양 과학 기술에 관한 서술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중국 재래의 산업기술에 쏠리고 있었다. 따라서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중국 기술의 전모를 전망할 수 있는 서적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유롄(Julien)은 이 책을 ‘기술백과전서’라 하였고, 영국의 니담(Joseph Needham)은 송응성을 ‘중국의 아그리꼴라’( G. Agrico1a, 서양 르네상스기의 야금학자)로 평하였는데, 그만큼 이 저술이 세계 과학사 중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중국의 과학 기술사가 부각되고 있는 즈음에 『천공개물』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혀지기를 기대한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본지 집필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