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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  통권 93호  필자 : 강진구  |  조회 : 2295   프린트   이메일 
[중국 영화]
영화는 중국인에게 화해와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지앙 샤오 감독의 ‘영화소년 샤오핑(電影往事)’-

토토와 마오
이탈리아에 <시네마 천국, 1988>이 있다면, 한국에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1994>가 있고 이제 중국은 <영화소년 샤오핑, 2004>으로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아련한 추억들이 영화 속에서 영화와 더불어 새록새록 돋아나는 이 같은 영화들은 영화를 보며 지냈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며 인생의 회한과 감흥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영화가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특별한 경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밝고 넓은 스크린에 비춰진 움직임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낯설고 신기한 경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이상하거나 기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며 동시에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이것을 쉬운 말로 우리는 영화의 ‘꿈꾸기 기능’이라 한다. 어른들은 영화를 통해 타인의 행동을 몰래 지켜보는 ‘엿보기 기능’에 탐닉하는 경형이 짙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새로운 삶과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나곤 한다.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영화 속 장면들을 고스란히 수집을 한다. 마치 우표를 모으고, 만화캐릭터 카드를 차근차근 모으듯이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반복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닌 다른 놀이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실이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대한 기억이나 어디 놀러갔던 일들을 기억해 낼 수는 있지만 그 경험을 일부러 의식 속에 끄집어내고 그 속에 자신을 투입시켜서 상상의 세계를 펼치는 일은 영화나 문학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 예술 형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추억담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서른 살에 본 영화나 마흔 살의 본 영화가 끼친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간 첫 경험이나 멋진 주인공 배우를 보기 위해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았던 십대시절은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있다. 그런데 잊지말아할 것은 어린 시절 영화에 대한 그 기억들이란 대부분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행복한 이미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즐기기 위해서 보는 영화 가운데서 안 좋은 추억을 만들 일이 있을까? 함께 울고 웃으며 공통의 경험의 장을 제공하는 영화관이야말로 정치가들이 꿈꾸었을 이상적 사회상이 아니었을까?  

영화와 행복
지앙 샤오 감독의 <영화소년 샤오핑>을 이해하는 방법의 시작은 <시네마 천국>이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와 같은 유사 구조를 가진 영화들과의 공통점을 찾는데서 출발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일반 영화평론가들처럼 단지 영화의 독창성을 부정하거나 비슷비슷한 유형을 가진 장르영화의 특징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영화를 보는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새삼 일깨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전거를 타고 생수를 배달하며 어렵게 사는 소년 마오 샤오핑은 한 여자가 난데없이 휘두른 벽돌에 맞아 정신을 잃고 만다. 알고 보니 그 여자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화광이었던 것. 그녀의 비밀 노트에는 여배우가 되기를 소망했던 엄마의 못다 이룬 꿈을 달성하려는 소녀 링링과 링링의 주변을 맴돌며 장난을 치는 어린 샤오핑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남녀 어린이를 친구로 묶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영화란 사실이다. 문화혁명 이후인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영화란  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계몽적 성격의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마을 광장에 모여 함께 떠들며 즐겁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행복하기만 하다.

적어도 이 영화를 만든 지앙 샤오 감독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화는 허망한 환상도 아니고 결코 배부를 수 없는 ‘꿈의 빵’도 아니다. 사회과학자들이 그동안 비판해오던 영화의 탈현실성은 여기서 전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영화를 보고 행복해하는 영화 속의 모습은 적어도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인 까닭이다. 즉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이전에 영화 관람이 주는 사회적이며 개인적인 행복에 감독은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 있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화사회학자들은 구체적인 영화의 내용에 따라서 관객의 행복감은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고, 비현실적인 장면에 관객을 빠뜨리는 영화일록 현실의 문제로부터 사람을 도피시키는 경향이 있는 바람에 적절치 못한 영화라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실례로 1930년대 미국 공황기에 등장한 5센트 극장의 영화들은 주로 대저택과 화려한 파티 그리고 멋진 자가용과 부유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철저히 노동자들의 현실과 너무나도 동 떨어진 것은 물론, 이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혹독한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극장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어떠한 다툼이나 분열 그리고 반목과 갈등 같은 사회적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화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일은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극장안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영화로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다
주인공 소년 마오 샤오핑은 누구나 짐작하듯이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인 마오쩌뚱과 실용노선을 주창하며 오늘날의 개혁과 개방정책의 초석을 놓았던 덩샤오핑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영화 소년의 이름에 중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두 정치가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 영화가 중국 내에서 일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은 서로 다른 정치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다름이 아닌 숙청의 주체와 대상으로 사상적 대결을 벌였던 인물인 까닭이다.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부패한 정부 관료를 척결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마오쩌뚱의 권력에 대항하는 어떠한 세력도 분쇄시키고 중국의 모든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를 송두리째 뒤집어 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와중에 마오쩌뚱은 소위 덩샤오핑을 포함한 이른바 실권파를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고 보고 퇴각시켜버렸다. 역사 속에서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은 서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영화는 이 두 정치가의 화해를 시도하려는 것일까? 덩샤오핑의 개혁적인 실용노선의 결과로 중국은 오늘날의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오쩌뚱에 대한 평가가 서구사회의 대중들에게 비춰진 것처럼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데는 실패했지만 자본계급의 착취로부터는 해방되어 가난하지만 나름대로 주체적이며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현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빈부격차에 따른 계층 간의 위화감이 날로 커져간다는 점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고층건물들 사이로 더욱 더 깊고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의 고통을 어떠한 식으로라도 풀어야하는 숙제가 중국인들에게 주어져 있다.

<영화소년 샤오핑>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소망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방법은 주인공의 이름처럼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의 화해를 뜻하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자 농민들이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발전을 이뤄가는 역사를 이뤄가면 더 이상 좋을게 없지만, 최소한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에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던 때를 기억하면서 화합과 일치된 중국을 영화는 기대하는 것이다.

‘광장엔 스크린이 걸리고, 어두워질 때를 기다리면 모두가 바라던 영화가 시작됐다. 샤오핑과 엄마, 아빠와 함께 나의 과거로 돌아갔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함께 숨 쉬고 함께 꿈꾸게 한다.’  


강진구| 크리스천문화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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