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은 중국 지식층들에 의해 폭력이 아닌 언론을 통하여 전개되었지만, 의화단 이후 눈부시게 발전하는 중국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교회와 신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며,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중국교회의 연약한 점들을 발견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노력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깊은 오해로 인해 중국 기독교가 불평등조약과 서양 문화적 요소에서 벗어나 중국화 된 교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본토화 운동이었다.
시대적 배경
1920년대에 이르러 중국교회는 비록 서양의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이 중국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중국인 신도의 수적인 증가와 중국인 목회자의 배양과 성장, 그리고 그들의 교회 내에서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증가되고 있었다. 1907년 기독교 전국대회에 일 천 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하였지만, 중국 목회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1913년에 개최된 회의에는 115명의 대표 중 중국인 목회자가 무려 1/3을 차지하였다. 1919년 <중화귀주회의(中華歸主會議)>에는 중국인 목회자가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중국교회내에서 중국인 목회자의 역할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1900~1920년에 이르러 중국교회 신도들은 무려 4배나 증가하여 366,000여 명이 되었고, 1920년에 중국인 목사의 수가 처음으로 서양 선교사의 수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교회의 모든 운영권은 2/3가 여전히 서양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신도와 목회자들의 영향력은 점점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능가하여 20년대에 이르러 도시와 향촌에서 자립교회들이 신속히 증가하였고,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진정한 중국교회의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20세기 중국교회의 본토화 운동은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형과 과정을 거쳐 건설되어져 갔다. 하나는 중국인 스스로 독립된 교회를 건설하여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중에 어떤 교회들은 여전히 서양 교회와 그 조직이나 사상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서양 교회의 지도자들은 현대 중국에서의 민족주의의 팽창과 교회에서의 중국인들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를 감지하고, 중국교회의 자립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양종 세력이 합류하여 20세기의 중국교회가 새롭게 건설되어 갔다. 이러한 모습은 19세기의 중국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면모와 특성을 구비하게 되었다.
본토화 교회의 목표
본토화에 대한 정의가 상당히 넓고 각자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된 중국교회를 건설하여, 중국교회가 서양 교회의 원조와 관리에서 벗어나 중국인 스스로 치리하고, 스스로 운영하며, 스스로 전도하는 독립된 중국교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을 적극 추진했던 기독교협진회(基督敎協進會)의 회장인 청쩡이(誠諍怡)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최근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본토교회 운동은 협진회에서 제창하였다. 그 중요한 목적은 중국 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의 문화를 선양하여 기독교가 양교(洋敎)라는 불미스런 관념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토록 짧은 문장을 통해, 당시 중국교회가 추구했던 본토화 교회의 목적과 임무를 정확히 말하고 있다.
본토화 교회의 임무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국 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교회는 바로 자치, 자양, 자전을 목표로 경제적, 행정적, 경영적 측면에서 중국인 신도들이 주축이 되고, 서양 선교사들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보조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대하여 일부 소수의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교회가 자기들을 배척한다는 의심과 오해를 했지만, 대부분의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교회의 입장과 처지를 잘 이해하여 이 운동이 잘 진행되도록 협조하였다.
두 번째 임무는 동양 고유의 문화를 선양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 중국 문화가 서로 결합하여 교회 내의 서양 문화를 제거하여, 기독교가 양교(洋敎)라고 하는 중국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배의식을 불교식으로 바꾸어 향불을 피우고, 무릎 꿇고 염불 외우듯이 경문과 기도문을 암기하자고 대담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에서 실제로 이러한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중국식 곡조가 있는 찬송가를 특별 제작하기도 하였고 전통적인 서양식 곡을 개조하여 중국식 곡조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효과도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분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본토화를 주장하며, 먼저 중국 사상을 연구하고, 또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여 이를 서로 조화롭게 결합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 학자들이 이 방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회잡지(敎會雜誌)에 많은 논문과 글을 발표하였고, 이 방면의 저술도 적지 않았다. 우레이촨(吳雷川)의 「기독교와 중국 문화(基督敎與中國文化)」, 쉬바오치엔(徐寶謙), 짜오쯔천(趙紫宸), 시에푸야(謝扶雅)등은 이 시대 기독교를 대표하여 중국 문화와 기독교를 접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기독교 학자들이었다.
1922년 5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중국 기독교 전국대회>에서 서양 선교사와 중국인 신도 대표 1,180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9항목의 “교회의 선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본토화에 대해 설명하고, 본토화에 대한 중국 기독교들의 심성과 태도를 정확히 발표하였다.
그들은 중화 기독교가 중국인이 스스로 자치, 자양, 자전의 원칙하에 운영하여, 기독교가 불평등조약의 보호아래 전래되었다는 중국인들의 오해를 해소시킬 뿐 아니라, 중국 신도들이 교회의 조직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점점 성장하면서, 외국 교파들의 교리나 조직 등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드리고, 모방하는 것에 점점 불만을 느끼고, 중국인들의 습성에 적합한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취지하에 조직된 <자립교회(自立敎會)>, <진예수교회(真耶稣會)>, <취회소(聚會所)>,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 <예수가정(耶稣家庭)교회> 등은 대표적인 독립교회들이다.
본토화 교회의 성립
중국예수교자립회(中國耶稣敎自立會)
1906년 상하이에서 리우궈쩐(兪國楨)이 완전히 독립된 자립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취지로 <중국예수교자립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창립 회의에서 과거 중국에서 발생한 수많은 교안들이 중국 기독교들의 마음속에 많은 상처를 남겨 놓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며, 자립과 자치의 정신아래 <중국예수교자립회>를 설립한다고 강조하였다. 자립회가 설립되면서 각처의 반응이 열렬하여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후베이성, 후난성 등 각 곳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자립회가 설립되었다. 1920년에 <제1차 전국 자립교회의>를 개최하고 80여 명의 각 곳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1924년에 전국에 약 330여 소의 자립교회가 성립되었다.
진예수교회(真耶稣敎會)
1917년 베이징에서 왕베드로(王彼得) 등이 <진예수교회>란 자립교회를 설립하였다. <진예수교회>는 설립초기에는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제1차 전국대회를 베이징에서 개최하였다. 1922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기독교 전국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각 교회의 명칭을 <예수교회>라고 통일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서양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주최측으로부터 받아드려지지 않자, 회의 장소에서 <진예수교회>를 선전하여, 많은 대표들이 이에 호응하며 가입하게 되었다. 1926년 <진예수교회>의 총본부를 난징으로 옮기면서 그 활동무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48년의 통계에 의하면 국내에는 600여 소의 분회가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한국, 대만, 일본, 미국과 유럽각지의 해외에도 널리 분포되었다.
취회소교회(聚會所敎會)
<취회소>는 중국에서 신속하게 발전한 자치 교회 중의 하나이다. 1921년 왕짜이(王載) 박사가 푸저우(福州)에서 전도 활동을 할 때에, 푸저우 성공회 서원에서 공부하던 니시성(倪析聲)이 그를 도와 함께 전도 사역을 하면서 <취회소>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초대 교회를 모방하여 매주 성찬 예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취회소>가 최초로 창립되었을 때는 왕짜이부부와 니시성 모두 세 명에 불과하였지만, 그 이듬해 왕짜이박사는 18명의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들은 후에 각 지역의 <취회소> 지도자가 되었다.
<취회소>의 최초의 구호는 "교파를 떠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로 어떠한 교파의 전통 교리나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교리를 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교회 혁신 종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석성은 이 운동의 중심을 상하이로 옮겨, 「기독보(基督報)」와 「부흥보(復興報)」를 발행하여 적극적으로 그들의 교리나 목적을 선전하였다. 니시성은 또 「소군시가(小群詩歌)」라는 찬송가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 찬송가집의 “소군(小群)”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이 교회를 <취회소교회>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니시성은 왕짜이와 신학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각자 독립하여 발전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 전도에 열중하는 한편, 신도들의 자본을 통해 기업을 경영하여, 신도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취회소>의 규모가 비교적 큰 지역은 대만, 홍콩, 마닐라와 상하이 등이다.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
초기의 자치 교회 운동 중에서 산둥지역에서 발전한 <중화기독교회>를 빼놓을 수 없다. <중화기독교회>는 1918년 산둥에서 리우서우샨(劉壽山)에 의해 설립되어 직예성과 산시성 등 화북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중화기독교회>가 형성되어 점점 그 세력이 발전하면서 화중, 화남지역의 원래 각 교파에 속해 있던 교회들도 원래의 교파에서 탈퇴하여 자립, 자양과 자전의 목표아래 교회를 <중화기독교회>라 개칭하였다. 이 계통에 속한 교회들이 전국 각지에 매우 널리 분포되었고 특히 의료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는데, 이 계통에 속한 교회 병원이 무려 67곳이 있었다.
예수가정
1920년대에 이르러 농촌 교회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 해의 통계에 의하면 전국 150,000여 소의 교회 중에 2/3가 농촌에 속해 있었고, 3/4의 신도가 농촌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농촌 교회가운데 자립 교회가 또한 신속하게 증가되었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예수가정교회>이다.
<예수가정교회>는 1928년 찡쭌잉(敬尊瀛)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산둥성 태안현의 조그만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세례를 받고, 졸업 후에는 병원에서 전도사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얼마 후 그는 가난한 농민들을 돕고 싶은 부담 때문에 병원 사역을 사임하고,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과 동거동락하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회의 어두운 면과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지 못하여, 무형 중에 많은 인력과 물질들이 손실되고 낭비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신도들의 자본을 이용하여 완전히 신실한 기업을 경영하여 기독교의 아름다운 빛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예수가정교회>는 종교와 조직 그리고 경제적측면의 어느 쪽으로 보아도 자립교회의 특징을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예수가정교회>의 종교 사상은 독특한 점이 많았다. 첫째, 그들은 종교 지도자에 대해 매우 순종하였다. 찡쭌잉은 예수 가정에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여, 예수 가정에 속해있는 서양 선교사들조차 그를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둘째, 찡쭌잉은 초대교회와 같이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위해 인간의 감정과 물질적인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을 본받아, 예수 가정에 가입하는 모든 신도들은 반드시 가족과 재산, 사회관계, 명예와 지위 등 모든 개인적인 물질과 관념을 철저히 희생해야 하고, 반드시 개인의 노동 생산으로, 의식주와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셋째, 그들은 “중생”의 경험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신도가 예수 가정에 가입하면,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되어, 의식주는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고, 기꺼이 서로 사랑하며, 빈곤한 생활을 즐겨야 했다. 넷째, 그들은 성령 충만한 생활을 열심히 추구하여, 매일 방언 기도, 영가의 찬양과 무용 등의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그들의 생명이 늘 거듭나고, 새롭게 변화되도록 신앙생활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예수가정교회>는 20년대에서 40년대에 생산 수준이 비교적 낮은 화북 지역의 농촌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점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19세기의 중국 기독교는 서양 선교단체나 선교사 위주의 교회 형태로 발전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이 깨어나고, 반기독교 운동의 자극아래 중국 기독교인들의 각성과 검토의 소리가 부각되면서, 중국교회는 자치, 자양과 자전의 본토화 교회로 새롭게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본토화 교회는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의 강렬하게 반영되었고, 중국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며, 더욱 사회 활동과 구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중국교회의 이러한 갈등과 변화에 대해 소수의 서양 선교사들은 오해도 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서양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은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시대적인 조류로 받아들여, 적극적이고, 협조적인 태도로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중국교회가 새롭게 발전하도록 섬겼다.
강인규 |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