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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0  통권 92호  필자 : 이우윤  |  조회 : 2591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중국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중국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으로
오직 믿음으로

 

허드슨 테일러(1832-1905)는 만21세의 나이에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어 51년간 중국에서 사역하였다. 1854년에 사역을 시작한 그는 중국에서의 사역 기간 동안 20여 개의 선교지를 개척하고, 849명의 선교사를 중국으로 불러 들였으며, 약 700명의 중국 사역자들을 훈련시켰다. 적어도 3만 5천명이 그에 의해 개심되었으며, 5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를 설립한 이후, 그의 모든 것을 드린 숭고한 헌신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책무를 다하고 1905년 주님 곁으로 돌아갔다.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난 현재, 중국선교를 생각하는 모든 이와 우리 한국교회가 그를 추억하는 것은 단지 한 위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의 삶과 사역은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 중국 땅을 밟고 있는 우리의 삶과 사역이 너무 가벼움을 질책하듯 다가오고 있다.

중국이라는 선교 현장에서 그의 삶과 사역이 주는 실제적인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과 선교적 환경
허드슨 테일러가 활동하던 그 당시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열강의 침략과 잇따라 체결된 여러 조약으로 인해 많은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와 각 방면에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진행되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선교사들은 합법 입국자 혹은 외래문화 전파자란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되었고,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종교개방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59년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된 이후 1911년 이전까지, 130여 개 선교단체에 소속된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반(反)서양, 반제국주의적 사상에 의한 교안(敎案) 즉 서양종교반대안으로 많은 장애와 고난이 있었다. 

특히 19세기 말에 발생한 의화단의 난을 통하여 피와 땀을 흘려 세운 많은 교회와 선교사들이 희생되었다. 19세기, 중국에서 일하던 일반 선교사들은 대체로 몇몇의 안정된 항구도시에 선교했으며, 이런 항구도시에서는 법적으로 선교사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힘든, 전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과 모든 내륙지방에 선교사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이 엄청난 계획은 그의 불굴의 의지와 헌신적인 노력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중국을 달구어 놓았다. 

모든 내륙지역을 대상으로 
1866년, 허드슨 테일러가 아무런 경험과 보장 없이 교파를 초월한 일단의 선교 그룹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떠나, 외국 함대의 보호구역을 멀리 벗어난 산간 내륙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그들은 문인과 상류 계층의 선동을 받은 미신을 숭배하는 농민들의 적대적 자세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둘씩 짝지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중국 내지로 침투해 들어갔다. 내륙 선교에 따르는 이러한 특별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국내지선교회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더 많은 사역자들이 모였다. 

허드슨 테일러의 내지선교회는 “중국의 영적 필요와 간구”라는 책을 통해 전 세계 선교사를 동원했는데, 그 결과 850여 명의 선교사가 들어와 사역을 전개했으며, 중국 전역의 200여 개 이상의 선교 지역에서 5만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다. 1882년에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모든 지역을 제한 없이 오갔으며, 세 개의 성(省)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 선교사를 주재시켰다.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이나 교통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의 이러한 사역은 참으로 개척적인 것이요, 헌신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한 사람이 품은 비전과 열정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중국내지선교회’ 사역의 전개과정과 분포를 보면, 절강성(1856년), 강소성(1867년), 강서성(1868년), 안휘성(1869년), 호북성(1874년), 산서성. 사천성. 귀주성(1877년), 섬서성?산동성(1879년), 운남성(1881년), 하남성(1884년), 호남성(1901년), 신장(1908년)에 이르기까지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중국 선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역사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 사후 10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의 선교적 상황은 100년 전 그 때처럼 중국의 동부와 북부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선교자의 집중 문제와 재배치 문제를 거론하지만 아직까지 소수의 사역자들만이 내륙으로 들어갈 뿐이다. 

100년이란 시간은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실제적인 시간들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내륙, 더구나 서북부 지역은 동부에 비해 상당히 어려운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사역자들이 이미 100년 전에 미리 밟아 복음의 씨를 뿌려 놓은 곳이다. 전 중국의 내륙지방을 상대로 한 전면적인 이러한 선교사역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하여 가능하였을 것이다. 

든 사람을 선교사로
그때까지 기존의 선교단체들은 대학교육과 안수 받은 자들을 선교사후보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어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선교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의 중국에 필요한 것은 학자나 신학자들이 아닌 복음전도자들이라고 본 테일러의 시대적 통찰력은 합당한 것이었다. 

테일러는 선교사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학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렇게 선교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선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이 넓게 열렸다. 

또한 이전까지 대부분의 선교단체에서는 여성을 단독으로 선교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테일러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 여성들을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 선교사들은 가정에 매이지 않고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고, 아울러 비교적 빨리 현지에 적응할 수 있는 선교적 잠재력을 발휘함으로 중국에서의 하나님나라 확장에 기여했다. 

전 생애를 사명을 위해
전통적인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와서 서구문화의 혜택을 포기하지 않았음에 비해 중국내지선교회의 선교사들은 서양복장을 버리고 중국 전통복장인 치파오(旗袍)를 입었다. 일찍이 테일러는 변발을 하고, 치파오를 입음으로써 가능한 한 중국인과 같이 되려고 노력했다. 

러나 이런 중국내지선교회의 모습은 선교사들이 중국의 풍습을 따름으로 인해서 선교사들의 권위와 체통을 손상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전도자였고 주로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졌다. 내지선교회에서도 학교와 병원들이 개원되고 경영되었으나 그에게 그러한 것은 이차적인 문제였다. 그는 이 과업의 완성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고, 생각했고, 기도와 정력을 쏟았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선교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던진다. 황금 어장처럼 펼쳐진 오늘날의 중국선교 현장에서 과연 선교사들이 무엇에 전력해야 하는 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든 고통과 환란 중에도
러한 사역을 감당하는 가운데 허드슨 테일러의 삶은 실로 천로역정과 같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중국선교를 결심한 후, 사랑하는 약혼자와 결별했으며, 중국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가 33세에 아들을 낳고 1주일 만에 아들과 함께 그의 곁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맏딸 그레이시와 아들 사무엘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또한 선교 사역 기간 중에 지병이었던 결핵과 이질이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내지 선교를 위해 오랫동안 가정을 떠나 있느라 자신과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평생에 걸쳐 수많은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허드슨 테일러의 임종 전, 마지막 남긴 고백은 그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감당한 고통과 환난이 어떤 것이었나를 보여 주는 것이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내게 땅 위에 무슨 안식이 있으리.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이 땅에서 그 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 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 주신 그 분, 그 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직 아니리.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위대한 비전에는 큰 고난이 있다. 주님을 위해 큰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자 만이 주님의 위대한 비전을 보고 말하고 성취할 수 있다. 중국을 위해 큰 비전을 품고 있는 우리 사역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듯 허드슨 테일러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진 이 십자가를, 내가 감당한 이 고난을 너도 감당할 수 있겠니?“ 

직 믿음으로
그는 1857년에 중국복음선교회를 사임하게 되는 과정에서의 갈등 가운데 죠지 뮬러의 믿음 운동(Faith Movement)을 상기하게 되었고, 죠지 뮬러처럼 전적으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었다. 믿음은 실제로 그의 전체 신학의 모퉁이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으로 살기를 고집하였고, 그것은 그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공급하는데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사역은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라는 믿음으로 그는 만일 자신의 방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실 것을 확신했다.  

기금이 줄어들게 되었을 때, 중국내지선교회의 신참 선교사부터 시작하여 총감독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교사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중국내지선교회 공동체는 신앙 안에서 하나로 결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체험적 과정을 통해 테일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림으로써 급속히 확장되는 막대한 선교 책임을 감당했다. 테일러의 믿음 선교(Faith Mission)의 영향력은 중국내지선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 모든 지역에 3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5백여 선교단체가 채택하고 있는 믿음 선교 운동(Faith-Mission Movement)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금의 중국 선교현장에서의 중국선교사는 그 존재와 삶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구령에 대한 미친 듯한 열정, 공안의 위협에 대한 의연함, 고난을 삼켜내는 속 깊은 충성심, 전 중국을 바라보는 애끓는 기도의 열정을 현지 선교사들의 삶에서 느껴 본 지가 얼마이던가!

짧은 기간 중국을 오고 가며, 책과 컴퓨터로 책상 앞에서 선교전략을 궁구하는 내 존재가 허드슨 테일러의 삶 앞에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허드슨 테일러의 삶을 되돌아보며, 수많은 말들, 허다한 회의, 유학 같은 생활에서 이제 벗어나 우리 앞에 놓인 치열한 영적 전쟁에 마음을 다하여 임하여야겠다는 절박감을 어찌할 수 없다.       
                                   

이우윤/ CUM 중국선교연구소장, 선린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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