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테일러는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끄는 선교사이다. 그는 참으로 큰 비전을 가지고 체계적인 전략을 세워 광대한 중국 땅을 복음으로 덮은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만들어 그의 생전에 8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6천명까지 증가했다. 본 글에서는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전략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현재 중국선교의 상황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전도 내륙 지역을 향함 허드슨 테일러는 1854년 3월 1일에 중국 땅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당시의 선교는 모두 해안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졌다. 그 당시의 모든 선교기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해안지역이나 태평양상의 섬들에 그들의 선교를 국한시켰다. 육로와 육지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가 내륙 깊숙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과거의 전통을 깨고 과감하게 내지 깊숙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외국인에 대한 금지조항에도 불구하고 내지의 수로를 따라 순회전도여행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시도였지만, 테일러는 이 여행을 하면서 중국 내지인들의 실제적인 영적인 필요를 절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주장하고 행동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해안지역에도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는데 왜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뜻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선교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자족감과 함께 선교열이 식어질 때, 그는 아직 선교가 상륙한 것에 불과함으로 내지 선교가 남았음을 주장하면서 선교에의 열정을 다시 불태웠다. 그의 눈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이 미치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높이 들어 쓰셨던 것이다.
믿음에 근거한 선교 테일러는 선교가 철저히 하나님의 일이며 그런고로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는 선교회에 소속된 모든 지체들에게 재정 지원과 개인 후원의 문제에서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자신들의 필요를 하나님께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즉 선교비는 오직 하나님께 요청하도록 하였고, 인간적인 도움을 의존하지 않도록 헌금을 호소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의지하였으므로, 그가 중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동쪽에 무릎을 꿇지 않는 채 태양이 떠오른 날이 없었다. 아울러 그의 이같은 강력한 믿음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영향력으로 수 백명의 남녀들이 중국 내지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믿음선교 정책을 따르는 많은 믿음선교 (Faith mission) 기관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수단내지선교회’, ‘아프리카내지선교회’, ‘아프리카중심부선교회’, ‘복음화 되지 않은 지역 선교회’, ‘미개척지선교연맹’ 등이 바로 그런 기관들이었다. 또한 허드슨 테일러의 영향으로 인해 신생 교회들은 선교사들과 힘을 합하여 전도활동을 편다면 남은 미개척 지역들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춘 선교 테일러는 위대한 선교 전략가였다. 수천의 선교회 동역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거대한 중국 땅 깊숙이까지 복음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한 훌륭한 행정가였다. 뛰어난 조직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성공적인 사역의 결과로 학교와 병원 같은 커다란 기관들이 생겨났고 선교회의 규모가 매우 커졌는데 이런 것들을 매우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그는 또한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하였다. 기아 구제활동에 아주 적극적이었고 중국인들의 행복을 위하여 아편 매매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펼쳐나갔다. 또한 집필가이기도 한 테일러는 그의 아내와 함께 <중국의 영적인 궁핍과 요구들” (China’s Spiritual Need and Claims)>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이것은 캐리의 “탐구”와 함께 19세기에 선교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중요한 책이다. 그
러나 이 모든 것들은 테일러의 주된 관심 밖에 있었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오로지 영혼 구원이었다. 테일러는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중국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해박한 지식이 있거나 유창한 설교를 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향한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4억의 중국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영혼 구원의 과업 완성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고, 이 일만을 생각했고, 이 일을 위해 기도와 정열을 쏟아 부었다.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선교 테일러는 첫 6년의 중국 사역을 마치고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하여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선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브라이톤 해변을 거닐다가 함께 사역할 선교사들을 모집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그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의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노동자들 중에서 헌신된 남녀 일꾼들을 모집하였다.
물론 그 자신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였다. 그는 중국의 미전도 지역으로 보낼 수 있는 숙련된 지원 사역자 24명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1865년 테일러는 ‘중국내지선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킬 수 있었고, 다음 해에 먼저 보낸 8명의 선교사 외에 7명의 독신 선교사를 포함하여 15명의 선교사 후보자들을 데리고 중국 땅으로 떠났다. 중국내지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은 세상적으로는 학벌이 낮았거나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헌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약탈과 위험을 개의치 않고 중국 깊숙한 내지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철저한 성육신의 선교 당시 중국에 있던 서구인들은 일시적인 목적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식 머리와 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일러는 철저히 중국인들과 동화되는 것을 그의 선교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허리에 걸쳐 있기엔 너무 헐렁한 바지,’ ‘갑갑한 비단 옷,’ ‘굽 없는 신발’ 등에 자신을 적응시켰다.
또한 검은 머리털을 만들기 위하여 염색을 하다가 실명이 될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검은 머리털과 변발을 실천하였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다른 선교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이 중국인과 동화되려 노력하였고, 후에 그의 선교회에서 일하는 모든 선교사들 역시 중국복장과 변발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현지인들에게 굉장한 동질감을 주어서 복음의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동성 있는 선교 당시 모든 선교본부는 본국에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중국내지선교회’의 선교본부를 현장에 두었다. 그가 ‘중국복음화선교회’에서 일하면서 선교 본부를 선교 현장에 두는 것이 선교사들의 모든 필요를 즉시 즉시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선교를 원격으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속하면서도 상황에 맞는 전략을 세울 수 있고, 지도자가 선교의 실천을 보여줌으로써 선교적 동기 부여를 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선교본부를 선교 현장에 두었던 것이다.
현재의 중국 상황에의 적용 허드슨 테일러가 수행한 선교전략들은 지금도 상당 부분 적용이 가능한 선교전략들이다. 현재 적용 가능한 전략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허드슨 테일러 선교에서 가장 탁월한 선교전략은 바로 내지를 향한 선교전략이다. 당시 많은 선교가 안전한 해안지대에 머물렀던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선교가 생활여건과 교육여건이 좋은 도시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도시 선교도 중요한 선교전략이다. 문제는 도시에 너무 편중된 선교인력이 몰려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도시 지역은 그런대로 선교의 열매들이 맺혀지는 반면, 서부와 북부 변방 지역은 아직도 복음화율이 1% 미만인 지역이 많다. 특히 광서장족, 위구르족, 티벳족, 몽골족, 회족, 기타 소수 종족 등은 복음화율이 매우 낮은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에만 집중하는 선교를 벗어나 변방으로 들어가는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평신도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 변방으로 들어가는 선교를 하기 위해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활약이 매우 중요하다. 변방 선교는 안수 받은 전임 사역자들만 가지고는 어렵다. 안수 받은 전임사역자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고 자녀들이 있으므로 자녀의 교육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들이 자녀 교육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위험한 변방으로 가는 것은 그리 쉬어보이지 않는다.
허드슨 테일러 당시에도 그러하였듯이 이런 곳은 결혼을 하지 않은 평신도 미혼 선교사들이나 모든 것을 헌신할 각오가 된 선교사들이 들어갈 때 효율적인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미전도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된 평신도 선교 자원을 발굴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아울러 이같은 평신도 선교자원을 발굴하고 훈련하고 동원하는 일은 선교단체들이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므로 많은 노하우들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선교단체들에 거는 기대가 참으로 크다.
셋째, 테일러의 성육신 선교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인은 본래부터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늘 가져왔고, 특히 요즘 들어서는 경제의 성장과 함께 중국인들의 자긍심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중국인들과 하나 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발을 하고 중국인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중국인과 하나가 되겠다는 표시이고 이것은 곧 중국인을 존중한다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교사가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는 것을 지양하지 않는 한 중국선교의 열매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넷째, 테일러의 선교전략 중 하나는 믿음선교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한 선교전략이다. 후원을 얻기 위하여 이리 저리 모금 운동을 벌이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을 허락해 주실 것으로 믿는 신앙이다. 테일러는 당시의 선교사들이 낭비와 사치가 심한 것을 참으로 싫어하였다.
그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삶을 유지하면서 선교를 감당하였다. 그가 적극적인 후원 요청을 하지 아니하고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최소의 물질로 최대의 효율적인 선교를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가 자칫 돈 선교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가장 쉬운 선교는 돈을 갖다 주고 돈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열매가 적은 선교 역시 물질 선교이다. 돈 위에 세워졌기에 돈이 떠나는 날 그 선교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돈으로 선교하려 하지 말고 힘들고 더디지만 몸과 마음을 드려 선교해야 한다.
선교사가 현지인과 너무 격차가 나는 삶을 살거나, 돈으로 무조건 교회를 지어주거나, 돈으로 사역자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당장에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정도를 밟아 선교를 수행해 가는 것이 장기적인 선교의 발전을 위하여 절실히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영혼구원에 우선성을 두는 선교전략을 실천해야 한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테일러의 최종적인 관심은 언제나 중국 땅의 복음화였다. 물론 영혼구원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인간화를 위한 사역을 무시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교지의 상황에 따라 빵을 먼저 주어야 할 때가 있고 복음을 먼저 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상황이 결정할 문제이다.
다만 선교의 최종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예배하도록 돕는데 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을 잘 살도록 돕는 일은 선교가 아니라도 하는 기관들이 많이 있다. UN이나 각종 인권단체들 그리고 NGO 단체들이 이런 일들을 감당하고 있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나 선교회가 아니면 할 기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 일에 더욱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잘 하려고 하면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선교전략적 지혜가 아닐까 생각된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의 복음화와 중국의 인간화를 동등한 위치에 두고 사역했다면 그만큼의 놀라운 선교결실이 맺혀졌을까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안승오 / 영남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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