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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0  통권 92호  필자 : 강진구  |  조회 : 3492   프린트   이메일 
[중국 영화]
쿵푸영화에 나타난 과장과 은둔의 문화
-주성치(周星馳)감독의 ‘쿵푸 허슬(功夫)’-


중국문화의 상품성을 말하다

만리장성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이해되고 있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현대 중국의 정치가들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의 중국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소수민족의 존재와 계층의 분화라는, 언제든지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구조적 갈등을 봉쇄할 수 있는 역사적 이념을 만리장성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국의 천하통일은 한 독재 권력자가 지닌 개인적 야망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반드시 이룩해야 하는 필수조건이며 그것은 지난 2천여 년의 세월동안 모진풍파에도 견뎌온 만리장성처럼 결코 소멸될 수도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되는 뚜렷한 증거인 셈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만리장성은 어떠한 울타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북쪽의 이민족의 문화적 특성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로부터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는 배타적 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확실한 영역을 세우고 그 안에서 일체감과 안전을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자면 만리장성이 중국의 문화적 상징물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첫째는 크기에서 오는 경이로움이다. 거대한 영토와 세계 최고의 인구수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다(지금까지 중국인들은 지구 밖 우주선에서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떠도는 소문을 믿고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최근 보도에 따르면 실제 지구 밖에서는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축소지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과 달리 중국은 외형적으로 거대규모지향적인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친근함을 불러일으키는 아담하고 정교한 한국의 석상과는 달리 윈깡석굴(雲崗石窟)은 그것을 지켜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들어 버린다. 인해전술이란 사상초유의 전법을 가진 것이나 ‘나는 건 비행기 빼놓고 다 먹을 수 있다’고 호언했듯이 음식의 가짓수조차도 그러하다. 하다못해 젓가락을 쓰는 한중일 삼국 가운데서 중국은 가장 긴 젓가락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둘째는 은둔적 신비감이다. 만리장성은 내부적으로 통일과 문화의 보전 그리고 안정을 상징할지 몰라도 밖에서 보기에는 감추고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또 다른 측면의 문화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성문을 꼭꼭 잠그고 그 긴 성벽 안으로 칩거해 버리는 면에 있어서 중국은 신비의 대륙으로 남는다. 거대한 드러냄의 문화는 감추기 위한 문화와 어울리면서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역사를 끌어온 사상과도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일으키고 이 안에서 통일을 지향하며 질서를 이루는 일이 유교와 관계된 중국문화의 특징이라면, 외부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지향하면서 스스로 고립과 감추기를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존재한다. 이것은 유교와 함께 중국문화를 이끌어왔던 도교와 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장점과 특기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으려는 서구인들의 의식과는 분명 다른 점이다. 겸양을 미덕으로 삼고 공동체 속에서 굳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인들에게는 은둔적이며 신비적인 이미지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거대한 규모에서 오는 놀라움과 감춰진 신비스러움을 내뿜는 상반되는 것 같은 문화적 특성이 중국영화에도 고스란히 배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영화를 다른 나라의 영화들로부터 구별되게 만드는 특징으로 작용하면서도 중국인의 의식을 들여다보게 하는 장식장의 투명한 유리와도 같은 것이다.

‘쿵푸허슬’의 과장과 은둔

중국영화에 나타난 크기의 미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한 서사적인 영화처럼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만든 군무(群舞)나 전쟁장면 등을 통해서 곧잘 드러나지만 쿵푸라는 중국의 전통 무술을 다룬 영화들 속에서 더욱 더 쉽게 발견된다. 이소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성룡과 홍금보, 이연걸로 이어지는 쿵푸액션의 계보 가운데서 주성치의 쿵푸영화 만큼 과장법이 심한 경우도 드물다.

주성치의 ‘쿵푸허슬’은 1940년대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공권력이 전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혼란의 시대에 가난한 마을 돼지촌 사람들과 조폭 도끼파 일당들과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우리들은 영화 시작 초반부터 착하고 가난한 돼지촌 사람들의 승리를 불 보듯 예상할 수 있지만 겉멋이 잔뜩 든 주인공 싱(주성치)과 그를 따르는 퐁(황성의)의 출현은 이 영화의 재미와 주성치식의 허허실실한 코미디를 만든다는 점에서 미처 예상치 못한 주인공의 변신을 기대하게 만든다.

무술실력도 없는 주제에 도끼파 행세를 하면서 돈이나 뜯어갈 심산으로 찾은 돼지촌이지만 이들은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쿵푸 고단자들인 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혼나고 창피만 당할 뿐이다. 이들의 소동은 급기야 도끼파 전체를 불러모으는 결과를 가져오고, 돼지촌과 도끼파와의 쿵푸대결이 벌어진다. 마치 토너먼트 경기를 보듯 누가 과연 최고인지를 가리는 첫 라운드는 분식집 주인과 양복점 아저씨가 포함된 돼지촌의 숨은 고수 3인방과 도끼파가 불러온 떠돌이 형제킬러󰡐심금을 울리는 가락󰡑이 맞붙는다. 거문고줄에 튕겨져 나오는 서슬퍼런 칼날에 의해 돼지촌 3인방이 처절하게 당한 뒤 나타난 목청 큰 여주인의 사자후(獅子吼)는 거문고의 공명을 무너뜨리며 2라운드를 승리를 이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온 전설의 고수인 ‘야수’앞에 돼지촌 주인 부부가 쓰러질 무렵 주인공 싱의 그동안 막혔던 무공의 기가 풀리며 야수를 무릎꿇게 만들고 돼지촌을 구함은 물론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거대규모의 문화를 지향하는 중국문화의 면모는 ‘쿵푸허슬’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그것은 ‘메트릭스’나 ‘킬빌’을 흉내낸 집단 난투극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과장된 표현에 의한 것이다. ‘허풍’ 혹은 ‘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과장된 무공(武功)의 위력은 주성치식의 코미디와 잘 어울리는 것이지만 그것의 본원은 역시 중국문화의 특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협지를 보려면 만화가게에 가야했던 일이 괜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만화처럼 통속적이며 과장이 심한 장르가 무협지라는 사실이다. 축구나 야구를 비롯한 어떤 스포츠를 다룬 영화들도 쿵푸만큼 과장된 표현방식을 쓰지 않는다. ‘야수’의 권법에 당한 싱이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 위에 내려앉는 식의 표현은 주성치의 것이라 쳐도, 발로 땅을 내딛는 순간 땅이 갈라질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그 힘은 어디까지나 중국문화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쿵푸허슬’에서도 은둔과 신비의 중국문화는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모두 무공의 달인들인 돼지촌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별 볼일 없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모두 굉장한 능력의 소유자란 사실이다. 아들을 잃고 돼지촌에 은둔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감추고 살아온 주인부부는 중국인의 전형이다.

도끼파 일원들이 양복을 입고 어깨에 힘을 주며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서구 스타일이라면, 지저분한 동네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이 고함이나 치며 살아가는 보잘 것 없는 뚱녀지만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인 여주인은 중국 스타일의 인간상을 대변한다. 특히 영화 막판까지도 두들겨 맞기에 바빴던 주인공 싱이 무공의 최고 경지인 ‘여래신장(如來神將)’의 보유자란 사실은 만리장성 속에 감춰진 신비스러움처럼 겉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신비와 은둔의 가치를 중국인들이 영화 안에서조차 애용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쿵푸허슬’의 一長一短

주성치 영화의 특징은 과장되고 코믹한 표현양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약자를 등장시키고 약자 편에서 영화를 진행하는데 그는 능수능란 하다. 이것은 점차 돈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는 가난한 중국인들에게는 큰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부분에서만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승리함으로써 속은 풀릴지 몰라도 현실문제를 인식시키고 극복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있으면서도 중국의 사회문제를 의미있게 다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일까? 주성치에게 중국의 찰리 채플린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강진구 | 크리스천문화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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