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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20  통권 89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3536   프린트   이메일 
[중국역사 속으로]
고대 강남지방의 세력 다툼
오,월의 대립과 미인 서시

2천 수백 년 전의 먼 옛날, ‘오월동주’로 표현되듯 강남 지방에서 서로 대립한 오와 월, 이 두 나라의 역사 자체는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였다.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긴장된 원한과 보복, 보필하던 오왕 부차를 저주하면서 죽어 간 오자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월왕 구천을 따돌리고 멋있게 변신하여 성공한 범려, 그리고 오․월양국 사이에 끼어 의연히 살아간 미인 서시, 이들이야말로 오와 월을 테마로 하여 살아간 역사적인 주인공들이다.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시후(西湖)를 찾아간다. 그 때면 북송의 대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시후 풍경을 미인 서시에 비유하여 노래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물결 찰랑이며 반짝이는 화창한 날의 시후, 산 그림자가 멀리 희미하고 안개에 휩싸이듯 부옇게 보이는 비 오는 날의 시후, 소동파는 그 시후의 아름다움을 화장을 옅게 하든, 짙게 하든 언제나 아름다웠던 미인 서시(西施)로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항저우는 그 옛날 월(越)나라의 땅이었다. 소동파는 기후에 따라 변하는 시후를 바라보면서 화려한 전설 속의 월나라의 미인 서시를 연상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시인 소동파 및 여러 문장가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하던 서시는 과연 어떠한 여인이었던가? 먼저 그녀가 있었던 시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와신상담의 시대극을 벌인 오와 월
기원전 6세기 말, 이른바 춘추시대(BC.770-403)말기, 동주(BC. 770-256)의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을 때, 지방에 할거하던 각 제후국은 독립국가로서의 패권을 다투며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중국 전토가 동요할 정도로 격동하던 이 시기, 강남 지방에는 쑤저우(蘇州)를 근거지로 한 오(吳)나라가 큰 세력을 펴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闔閭, BC. 496)는 손자병법으로 잘 알려진 손무(孫武)와 초나라에서 망명하여 온 오자서(伍子胥)의 보필을 받으며 이웃의 강대국 초의 수도 영(郢, 후베이성 샤스沙市시 부근)을 공격하여 승리한 후, 강남 제일의 강국으로서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오의 남쪽 저쟝(浙江)성에서는 월왕 구천(勾踐)의 부친인 윤상(允常)이 월(越)나라를 세우고 오나라를 위협했다.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쪽의 월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월왕 구천(기원전 465)에게는 유능한 신하 범려가 있었다. 그의 계략으로 오나라에 맞섰다. 그것은 3열의 결사대를 오나라 진영 앞까지 보내 괴성을 지르며 자살하도록 했고 오나라 군사들이 당황해 할 때 총공격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주효하여 마침내 오는 크게 참패하고 월이 대승을 거두었다.

참패한 오왕 합려는 적의 화살에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기원전 496년에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유언하기를 "아들아! 월왕 구천이 네 아버지 죽인 것을 결코 잊지 말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아들 부차는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리하여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복수 전쟁의 막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부왕의 뒤를 이은 오왕 부차는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하고 국력을 강화하였다. 그는 월나라에 대한 원한을 씻어 달라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기 위해 섶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이것을 ‘와신臥薪’이라 함), 신하들에게도 군왕의 방을 드나들 때에는 반드시 문 앞에서 부왕의 유언을 외치게 하면서 복수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부차가 복수를 위해 국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소식에 월왕 구천은 즉위 2년 후(BC.494)에 지금은 전쟁을 할 때가 아니라는 범려의 간언에도 선제공격을 가하나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월왕 구천은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하였으나 오나라 군사에 포위되어 국가 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범려는 부차의 신하로 욕심 많고 기회주의자인 태재비(太宰嚭)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도움을 받아 화약을 맺을 것을 건의하였다. 구천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많은 재물과 더불어 오의 신하가 될 것을 내용으로 한 굴욕적인 화약을 맺고 풀려 나온다. 이때 부차의 신하인 오자서는 '하늘이 월을 오에 넘겨주고 있습니다. 후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살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부차에게 간하였다.

그러나 월나라로터 뇌물을 받은 태재비는 “월이 항복하여 신하가 되는 것은 오에 큰 이익입니다."고 오자서와 달리 건의하였다. 부차는 태재비의 진언을 받아들여 월과 주종 관계를 맺고 구천을 풀어주었다. 부차는 그때부터 오자서를 점점 멀리하고, 대신 태재비를 중용하였다. 태재비 역시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으로 강직한 오자서와는 달리 뇌물을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위기를 모면한 월왕 구천은 다시 월나라로 돌아온 후, 항상 곁에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이것을 ‘상담 嘗膽’이라 함) 회계산의 치욕을 상기했다.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고 그는 한 시도 자신을 질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구천은 몸소 일반 백성들과 노고를 같이하였고 현인을 잘 모시고 빈객을 후하게 대접하며 은밀히 군사 훈련을 강화하여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가 천하의 패권을 얻기 위해 황지(黃地, 河南省 杞縣)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있을 때,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이것은 서전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6년이 지난 후(BC. 476), 월은 본격적으로 오를 공격하였다. 당시 부차는 서시 미인과 놀아나며 정사를 바로 보지 않았고, 거기에 잦은 북벌 작전으로 국력은 피폐해 있었다. 구천은 역전 끝에 부차를 굴복시키고 오를 멸함으로써 지난날 회계산의 치욕을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부차는 져장성 팅허(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배려되었으나, 굴욕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나는 오자서를 볼 낮이 없다'고 하면서 부차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죽었다고 한다. 기원전 473년, 20여 년에 걸친 오월의 보복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오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구천은 부차에 대신하여 강남의 패자가 되었는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딤을 비유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은 이 시대의 일을 그려 나온 고사성어다.

 

2. 서시의 등장
회계산의 치욕을 맛본 월왕 구천은 겉으로는 오왕 부차에 굴종하는 듯 하면서도 속으로는 국력을 신장시켜 나갔다. 참모 범려(군사)와 문종(文種, 행정)의 보필을 받으며, 농업 생산력의 증대, 경제 안정 도모, 군사력 강화 등 이른바 부국강병책을 꾀했다. 내정과 군사 조직을 정비하면서 오를 약화시키는 비책도 강구하였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미인 서시(西施)이다. 월나라는 부차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미인계 작전을 시도했다. 오왕 부차가 원래 호색가이고 쾌락을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간파한 월나라는 미인을 부차에 보냄으로써 부차가 호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온 나라에 미인을 찾아 나섰는데 마침내 저장성 쥐지(諸지)의 저라(苧蘿) 산중의 가난한 나무꾼의 딸 두 여인이 물색되었다. 한 여인은 서시, 또 한 여인은 정단(鄭旦)이라는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들은 참으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하지만 산중에서만 자란 촌스러운 처녀들이라 부차를 현혹시킬 만큼 세련되어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하여 범려는 이들에게 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과 훈련을 철저히 시켰다. 먼저 회계 근처에서 화장술과 맵시 있게 옷 입는 법, 문장과 예법 등을 익히게 한 뒤, 화류계로 옮겨 가무를 비롯하여 교태와 사내를 유혹하는 법까지 몸에 익히도록 하였다. 3년 동안 수련을 닦은 후가 되니, 두 시골처녀 미인은 전혀 흠 없는 절세가인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서시와 정단이 오왕 부차에게 보내졌다. 부차를 보필하던 오자서는 “현명한 재사는 나라의 보배요 아름다운 미녀는 나라의 재앙입니다. 하 왕조의 말희(妹喜), 은 왕조의 달기, 주 왕조의 포사(褒이) 등은 경국지색으로, 이들 모두 왕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경계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미녀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부차는 이를 무시하고 아름답게 장식한 고소대에 머물도록 하고 그들과 쾌락의 나날을 보내었다. 부차는 서시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서시는 맑은 우물가에서 물을 거울삼아 얼굴을 비쳐 화장하기를 즐겼는데 부차는 서시 곁에서 머리를 따주곤 하였다. 부차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게 했다. 그녀가 뱃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대운하 공사를 벌여 국력을 낭비시켰고 높은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왕 부차가 서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환락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월나라는 빠른 속도로 군비를 갖추며 국력을 증강하여 갔다. 

서시의 미모와 생애에 대해서는 오랜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전설에 전설의 꼬리를 물고 시, 소설, 희곡 등 여러 문학 장르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졌다.『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와 있는 에피소드는 그런 예 중의 하나인데 소개하면 이렇다.

서시는 본래 가슴앓이 병이 있어, 속이 아프면 가슴을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녀라 그런지 그 모습도 매우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그 동네에 가장 못생긴 추녀가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눈살을 찌푸려 아름답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내밀고 항상 눈살을 찌푸리고 다녔다. 그것을 본 동네 부자 노인이 그녀의 추한 모습에 놀라 그만 문을 걸어 잠근 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부자 노인이 밖에 나오지 않자 한 가난한 집 노인이 세상에 무슨 큰일이나 났나보다 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도망가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원래 유교를 반대하던 도가 사상가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으로, 춘추 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 왕조의 이상정치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西施嚬目, 서시 눈살 찌푸림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2천 수백 년 전에 가슴앓이로 인한 얼굴의 찌푸림에도 세인들의 관심이 쏠릴 정도였으니 그녀의 미모는 대단하였나보다. 


천자문 가운데에도 ‘모시숙자(毛施淑姿) 공빈연소(工嚬姸笑)’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모(毛)’는 오의 ‘모타’라는 여인을 말하고 ‘시(施)’는 월의 ‘서시’를 말하는 것으로, ‘오 나라의 모타와 월나라의 서시는 얌전하고 덕스러운 자태를 가진 절세미인이었으며, 이들은 눈을 찌푸려도 곱고 웃는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서시는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蘚), 양귀비(楊貴妃) 등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서시의 아름다움을 침어(浸魚:서시가 호수 가에 나와 거닐면 물고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지느러미 놀려 헤엄치던 것을 잊어버린 나머지 그대로 물밑으로 가라않고 만다는 뜻) 미인으로 표현되면서 미인 중의 미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3. 오자서와 범려의 마지막 길

오 나라의 부차는 서시를 만난 후, 쾌락에 빠져 점점 판단력이 흐려졌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웃의 월이라고 간언하는 오자서의 건의를 일축하고 북의 제나라와 노나라에 군대를 자주 출병하였다. 남쪽의 후진국 월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중원의 선진국을 공격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잦은 출병을 일삼았는데 이는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반면 월에서 뇌물을 받은 태재비도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부차를 교묘히 조종하면서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오자서를 제거하려 애썼다. 때마침 부차가 제나라와 외교교섭을 위해 오자서를 사신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는 제나라에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옛 친구 포목(鮑牧)에게 맡기고 자신의 임무를 마친 후 돌아왔다. 처참하게 멸망하는 오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태재비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았다. 오자서가 오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을 데리고 제에 가서 망명시키고 왔다고 참언하면서 오자서를 처형함이 마땅하다고 부차를 선동하였다. 이 말을 들은 부차는 오자서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이 때 오자서는 가신들에게 “내 무덤 옆에 반드시 가래나무를 심어다오. 이것으로 부차의 관이 만들어지도록. 그리고 내 눈은 빼어서 오의 동문 위에 매달아다오. 월의 군대가 침입하여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도록”이라는 원한 섞인 처절한 말을 남기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오를 멸망시킨 월왕 구천은 범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부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상장군으로 추대하려 했다. 구천이 부차를 죽이고 오를 멸할 수 있게 된 것은 탁월한 정치가이자 지략가인 범려의 공로가 누구보다 컸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범려는 이것을 거절한다. 그리고 ‘최절정에 있는 군주 밑에서 오래 머무는 것을 좋은 일이 아니다.’고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잠적해버렸다. 그는 국외로 탈출, 북상하여 제 나라로 갔다. 동료인 문종에게 “날던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쓸 데 없게 되고(飛鳥盡 良弓藏), 교활한 토끼가 다 죽어 없어지면 사냥개는 솥에서 삶아지게 된다(狡兎死走狗烹).”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어 경고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월에 남아 있다가 결국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탈출한 범려는 제에서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 : 말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로, 술 담는데 사용되었음. 모양이 올빼미 배처럼 불룩하게 생긴 주머니라는 데서 ‘치이자피’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함)로 이름을 바꾸고, 열심히 장사하여 거부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북서쪽에 있는 도(陶)나라로 들어갔다. 그곳은 땅은 작지만 천하의 중앙에 위치하고, 교역, 운송의 중심지라는 점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주공(朱公)이라는 이름으로 십수 년 간 성실히 장사하여 엄청난 부자로 크게 성공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도주공(陶朱公)"은 부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더 나아가 상업신이 되었다. 지금도 화교 사회에서 도주공은 관우(關羽)와 더불어 상업신, 재물신으로 섬겨지고 있다.

4. 서시 전설은 시대에 따라 윤색되고
춘추시대에 출현한 서시의 전설은 시대에 따라 윤색되어지면서 이천년 이상이나 시, 소설, 희곡 등 여러 형태로 계속 다루어져 왔다. 아름다운 절세미인으로, 오국을 멸망시킨 요마(妖魔)로, 고국 월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시킨 애국의 주인공 등 여러 형태로 그려지면서 칭송과 신비와 낭만이 함께 어울려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려왔다.

오 나라가 망한 후, 서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나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오가 멸망할 때 구출되기는 하였으나, 결국 미녀는 나라의 요마요 재앙이라 하여 구천 또는 범려의 손에 죽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범려와 함께 국외로 탈출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대체로 국외로 탈출했다는 설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오월춘추(吳越春秋)』, 『오지기(吳地記)』,『월절서(越絶書)』의 일문 등은 국외 탈출설을 택하고 있다. 특히 『오지기』는 범려와 서시가 부차에게 보내어지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으며, 오가 멸망한 후, 서시는 다시 범려에게 돌아와 두 사람이 함께 국외로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서시는 오 나라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부차의 사랑을 받고 있었을까? 그저 부차에게 사랑 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좋든 싫든 미의 화신으로 존재하였을까? 그렇다면 인형이나 다름이 없는 삶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범려가 끼어들게 되면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게 된다. 오왕에게 헌상되기 전 약 3년 간, 두 사람은 서로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범려는 구천의 참모요, 서시는 오왕 부차에게 헌상 되어질 존재였으니, 결국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관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은 하나의 계략을 세운다. 서시는 월을 위하여 오왕 부차를 사로잡아 내부 붕괴를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눈치 채지 않게 요염과 교태로 부차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사에서 멀어지게 한다. 결국 오는 월에게 멸망당하고 부차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오가 망하자, 월왕을 위한 자신의 역할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 범려, 그는 더 이상 월나라에 머무는 것은 위험한 일로 여기고, 임무를 잘 수행한 서시를 데리고 새로운 생활을 위해 함께 국외로 멀리 떠난다. 두 사람의 국외로의 도주는 아마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보기 드문 미녀 서시는 슬픈 인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간 여인이 된다.

범려와 서시의 국외 탈출설이 오래도록 전승되어 내려 온 것은 월왕이나 오왕 등 그녀를 수단이나 도구로 삼던 권력과 권세의 망에서 통렬히 빠져나와 옛 연인을 만나 자유롭게 어디론가 떠난다는 러브스토리가 억압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며 시원한 해방감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려에 관한 이야기는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식화열전」에 나오고, 오자서는 『사기』「오자서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시는 사기에 보이지 않는다. 서시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오월춘추』나 『월절서』처럼 민간전승을 소설적으로 표현한 야사라든지,『오지기』와 같은 풍토기를 바탕으로 후대에 쓰인 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명의 풍몽룡이 지은 『신열국지』를 청의 채원방이 정리하고 교정한 것)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범려와 오자서의 이야기는 정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이고, 서시는 정사에 나와 있지 않으니 그 존재가 '허구'라고 단순히 단정 짓기는 어렵다. '사실'과 '허구',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설정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 춘추시대에 강남에 출현한 오와 월의 원한과 복수, 몸을 불살라 가며 섬기다가 끝내는 원한을 품고 자신의 군왕 부차를 저주하면서 죽어 간 오자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후히 대접하는 월왕 구천을 떠나 명철보신(明哲保身,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여 자기 몸을 보존함)하여 거부로 성공한 범려, 그리고 강남의 오와 월을 테마로 하여 의연히 살아가던 미인 서시, 이들이야말로 2천 수백 년 전 강남 지방에 출현한 오와 월을 무대로 한 장대한 대 역사의 주인공들로써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순동/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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