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고 더럽기로 유명한 뉴욕의 지하철역을 나와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 세계무역빌딩의 폐허가 보인다. 눈물과 피로 얼룩진 땅에 촘촘한 철망이 둘려 있는데 그 철망 위에는 9.11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명패가 수 십 미터나 걸려있다. 화를 당한 사람의 수는 모두 2천여 명이 넘는다.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남편이고 아내이며, 아들이고 딸이며, 형제이고 자매였다. 철망 위 검은 명패에는 사장과 직원, 부자와 하층민, 경찰과 소방대원들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참극이 있은 후 미국의 빌리 그래함목사는 T.V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가 세계무역빌딩에 충돌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극한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 웅장한 빌딩은 미국의 창조력과 번영을 상징하는데 충돌과 함께 그 거대한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폐허 속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초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미국은 이번 재난을 이처럼 신속하게 회복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의 말처럼 9.11사건은 미국인의 강퍅한 심령을 변화시켜 긍휼한 심령으로 자기의 이웃을 돌아보게 하며 기도와 사랑으로 사회의 상처를 감싸 안게 했다.
그러나 인민일보의 ‘强國論壇’과 북경대학의 ‘新靑年論壇’은 오히려 남의 재난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기사들로 넘쳐 났다. 흥분한 중학생들은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미국이 폭격 당한 특급 희소식을 전했고, 어떤 교사는 아이들과 환호하며 박수도 쳤다. 반면에 미국의 대통령과 국민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에 서명을 했다는 이유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국노” 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사람마다 미국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견해라고 해도 공포주의에 대해 갈채를 보내는 것은 인류의 윤리적 한계선을 넘어서는 일이며 이러한 “애국”은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조국에게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이다.
물론 반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인터넷에는 청화대학생의 글이 다음과 같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가 재난을 당한 수천수만의 미국인들을 향해 환호와 박수로 갈채를 보낼 때,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토플, 토익시험을 준비하며 미국을 향한 꿈을 실현하려 한다. 나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청화대학 학우들에게 ‘위선’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몇 년 후 미국의 거류증을 받아 들고 성조기를 향해 경례를 할 때, 오늘 행한 당신들의 혈기와 우매함을 돌이켜 보라. 그저 부화뇌동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청화 대학생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모든 중국청년들을 위한 글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중국청년들이 이 간절한 호소에 귀를 기울였을까?
지앙화이의 희생 나는 인터뷰를 위해 미국뉴욕의 한 화교방송국에서 유명한 사회자인 지앙한을 만났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지아오셩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한 푼의 사례비를 받지 않고 8년 동안이나 진행해 오고 있었다. 방송을 마치고 지앙한은 차로 나를 숙소로 데려다 주며 그의 형 지앙화이에 대해 들려주었다. 바로 그의 형이 9.11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지앙화이는 매번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이름은 두 자 입니다. 성은 요한복음 7장 38절 말씀 중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지앙)이며 이름은 회수의 회(화이)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지앙화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큰북을 메고 복음 사역 팀과 함께 대만의 크고 작은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1971년 어머니는 42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으로 쓰러진 3개월 동안 몸은 쇠약해졌어도 찬양은 끊이지 않았고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고 한다. 1980년 지앙화이와 지앙한은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지앙화이는 학업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교회를 개척했다. 누추한 그의 기숙사가 바로 그의 교회였고 1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20여 년 후에는 수 백 명의 성도가 세 곳으로 나누어서 예배를 드렸다.
지앙한은 세계무역빌딩에 비행기가 충돌해 불이 나는 장면을 TV에서 보고 사지가 떨려왔다. 8시 반이면 그의 형이 무역빌딩 95층으로 출근하기 때문이었다. 지앙한은 미친 듯이 형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는 다시는 형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잔혹한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 깨닫고 있었다. 그 후로도 며칠동안 그는 형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며 1%의 희망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사망자 명단에서 형의 영문이름을 보아야했다.
차가 숙소에 도착했으므로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 내가 강연을 마치고 나오자 지앙한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짙은 남색표지의 책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형의 기념 책 입니다. 안에는 형에 대한 친구 분들의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지앙화이의 기념 책을 마주 대하니 엄숙함이 밀려왔다. 윗면에는 “하나님은 이미 그를 위해 한 성을 준비해 두셨습니다.”라는 금장식으로 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지앙화이는 관료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추도회에 참여해 이 책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귀국 행 비행기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 기독교인의 고귀한 내적 세계에 빠져들었다.
지앙화이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지만 그를 묘사한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 갈수록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듯 했다. 가정에서 그는 착한 아들이었으며,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아빠였다. 교회 안에서의 그는 모두에게 봄빛같이 따스한 큰형이었다. 자신이 가난한 학생이면서도 항상 대만과 본토에서 갓 유학 온 친구들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앙화이는 뉴욕으로 출근하기 위해 2시간 동안 차를 운전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자녀와 아내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자신은 집회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자주 식사도 걸러야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아이들의 공부를 부탁하고 그는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이처럼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항상 가장 먼저 교회에 나갔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섬겼다.
눈물 속에 계시는 하나님 불교나 중국전통문화에서 말하는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갚는다.”는 관념에서 보면 선을 악으로 갚는 잔혹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앙화이가 당한 불행은 하나님이 틀리셨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본다면 의혹은 자연스레 풀릴 것이라고 한다.
중국 종교는 ‘구하는 것’ 과 ‘얻을 것’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주는 것’과 ‘회개’로 충만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잊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위대하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험은 모든 사람이 감당할만한 범주안(9.11사건과 지앙화이의 죽음까지도)에서 이루어진다.
“문을 두드렸는데도 열리지 않고, 힘을 다해 찾았는데도 찾지 못하고, 열심히 일했는데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부지런히 일했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며, 하늘 문이 닫혀 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즐거이 일하며, 당신에게 어떤 형벌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기뻐하라. 하나님께는 틀림이 없으시다. 환난 가운데에서도 능히 신앙을 고수하고, 능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 견고한 반석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것이다. 지앙화이 역시 그럴 것이다.
9.11사건 이후 위엔즈밍형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글에서 빌딩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은 왜 그 참극을 막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속에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신념과 사명 속에 계신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이 환난 중에 미국인과 함께 하시고 인류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
“영원함이 없다면 일순간 사악함이 범람하고, 공의가 없다면 죄악에 저항할 수 없게 되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인류는 빠른 속도로 멸망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영원과 공의에 대한 견고한 신념을 가진 최소한의 인류가 없다면, 이러한 신념으로 자원하며 희생한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므로 인류는 폐허 위에서도 삶을 지속해 나가며 공의와 믿음과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다.
출처/ 信仰綱刊 제20기 www.goddoor.com 번역/ 이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