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장예모가 최근에 만든 영화 <연인>을 보면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일부를 잠시 엿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연인>은 당나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인과 두 남자의 엇갈린 사랑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한 남자가 어찌하여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여인도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여인에게는 이미 남자가 있었으며 그 두 남자는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다. 여인은 한 남자를 선택하고 결국 두 남자는 혈투를 벌이게 되고 마지막에 여인은 죽는다는 지극히 뻔한 내용의 영화이다. 그나마 <연인>이라는 영화가 색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현대가 아니라 당나라라는 역사적인 시간과 금성무와 유덕화, 장쯔이라는 잘나가는 배우를 쓴 덕이 아닐까한다. 장예모 감독은 <연인> 이전에 진시황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영웅>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그 영화도 시간적인 배경은 아주 오래된 중국의 역사속의 한 공간이었다.
이 글은 <연인>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그 영화에 담겨있는 내용을 기독교적으로 해석을 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장예모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기독교적인 사고를 가지고 만든 것은 아닐 것이며 또한 영화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도 없다고 보여 진다. 억지로 분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영화를 보는 시각이나 기독교를 아전인수로 해석할 수 있으니 지양하고 다만 <연인>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전의 일련의 영화를 어떤 면에서 접목을 시켜보고 거기에서 기독교적인 접근을 해보자는 것이다.
가끔 중국 영화를 보면(예전에는 홍콩영화 중국영화가 구분이 되었는데 지금은 홍콩도 중국 땅이 되었으니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곳에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영화적인 색깔은 있다. 여기서는 그런 구분 없이 이야기를 하겠다.) 시대적인 배경이 현대가 아닌 역사속의 어느 시대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영화들은 어느 특정시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영화 속에서 흠뻑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풍기는 맛을 담아내고자 하는 경우도 많다. 가령 <영웅>이라는 영화는 진나라라는 역사를 배경으로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세 명의 협객의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역사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연인>에서는 당나라를 배경으로 부패한 왕조에 맞서는 비도문이라는 지하조직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역사보다는 시대속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그런 사건은 굳이 당나라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현대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다루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두 종류의 시대극은 이미 흘러간 역사 속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시간 속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현대도 좋은데 구태여 옛날을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정서나 취향과 관련이 될 수도 있지만 감독이 속한 국가나 민족의 정서와 관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장예모 감독은 중국 사람이므로 바로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나 세계관을 엿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인>과 <영웅> 그리고 몇 년 전에 이안 감독이 만든 <와호장룡>과 같은 시대극을 보면 영화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무술과 검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비장한 사고와 감정이 있고 그들의 기질은 다분히 대륙적이며 사적이라기보다는 공적이다. 의협심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우정과 사랑과 갈등이 한데 어우러져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가 많다. 사실 이런 영화를 가지고 중국 사람들의 기질과 사고를 파악하는 것은 모순이지만 이런 부분적인 분석들이 하나씩 쌓인다면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중국인들의 부분적인 사고나 감성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세계관을 잠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을 향한 선교가 용이해지지 않을까한다. 하여튼 그런 부류의 영화들 속에서 느껴지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중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힘을 써야겠다는 것이다.
시대극에서 등장하는 중국인들은 무와 협을 중요시 여기며 호탕하면서 대륙을 아우르는 기질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존재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자연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이는 아마 도교적인 사고가 아닐까한다. 또한 예를 중시여기는 생활방식은 유교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선교에 어떻게 적용을 할까? 두 가지의 측면에서 접근을 해보자. 먼저 그들을 복음화의 대상으로 접근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생활방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가끔 동양적인 사고나 생활방식이 기독교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는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라는 그릇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며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의 근본인 히브리사람들의 세계관은 서구의 세계관보다는 동양의 세계관에 가깝다. 그리고 기독교의 각 민족이나 국가에 걸맞는 기독교의 토착화가 요구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사고는 위험하다. 따라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복음의 이해와 수용에 적용을 해야 할 것이다. 가령 예를 중시하는 사고는 이웃에 대한 사랑, 도교적인 사고관은 인간의 피조물성, 무를 중요시하고 의와 협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고는 기독교의 교리와 예수님의 구태의연한 시대를 극복하는 말씀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왜 복음을 못 받아들이는가의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하여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을 하자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세계관을 잘 이용한다면 그들에게 전략적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들을 다시 복음을 전하는 도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사실 지금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기질과 세계관은 다분히 유용하다고 본다. 비록 그들이 자국을 중시하는 중화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대륙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타인을 수용하는 자세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그들은 복음을 들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명목상 전인구의 4/1이 기독교인이고 선교사 파송인원이 세계에서 두 번째인데 엄청난 인구와 땅을 가진 중국이라는 나라가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이점이 좀 두렵고 부럽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며 노력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듯이 중국도 마찬가지로 사랑하신다.
중국이 오랜 세월동안 사회주의의 관습에 젖어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체제에 있지만 중국 현지인들은 그런 제한에 크게 구속되지는 않고 있다고 본다. 비록 정부가 체제를 고수할지라도 오랜 역사적인 전통 속에서 고유한 가치관을 가지고 온 중국인들은 겉으로는 체제에 복종하지만 안으로는 그들의 오랜 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있으며 실생활은 그것이 좌우한다고 본다. 그런 중국인들에게 사회주의도 아닌 고유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을 심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영화 그것도 몇 편의 영화를 가지고 중국인들을 분석하는 것이 나무를 가지고 숲을 판단하는 식이 될 수 있지만 나무 하나라도 제대로 보자는 점에서 한 번 짧은 생각을 개진해보았다. 중국민족이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도한다.
김하중/ 신림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