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용주의 노선을 걷지 않으면 중국에서 지도자로 부각되기 어렵다.”
후진타오(胡錦濤, 62) 국가주석 당 총서기로 대표되는 제4세대를 이을 5세대 지도자군 가운데 한 사람이 와병중인 뤼푸위안(呂福源) 상무부장에 이어 상무부장직을 승계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태자당(太子黨, 공산당 원로의 자녀)’중 실용주의 대표주자로 지목되는 보시라이(薄熙來, 55) 신임 상무부장이 그 주인공. 보 상무부장은 시중쉰(習仲勛, 사망) 전부총리의 아들인 시진핑(習近平, 51) 저장(浙江)성 성장과 보수파 야오이린(姚依林, 사망)의 사위 왕지산(王岐山, 56) 등과 함께 태자당 핵심 인사로 오랫동안 차기 대권주자로서 유력했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중국을 이끌어온 8대 원로의 한 사람이었던 보이보(薄一波, 전 당중앙고문위 부주임, 96)의 차남으로 다롄(大連)시 시장, 다롄시 당서기, 랴오닝(遼寧)성 성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탁월한 실무능력을 발휘한 바 있다. 특히 그의 승승장구 이면에는 부친의 후광보다는 개인의 능력이 한 몫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9년 산시성에서 태어난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부친과 함께 수감되고 금속 노동자로 10년 동안 일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28세의 만학도로 베이징(北京)대 역사학과에서 세계사를 전공하고 1980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따낸 뒤 지방 근무를 자원했다. 후진타오 등 주요 지도자들이 두루 지방 근무를 거쳤다는 점에서 그의 지방 행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다롄시 산하의 진시엔(金縣)의 현장으로 임명된 뒤 다롄시 경제개발구 서기와 시 당 부서기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러면서도 중앙 정계로부터 적지 않은 견제를 받아왔다. 그러나 다롄시 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농어촌에 불과했던 다롄을 살기 좋은 공업도시로 만들어놓은 것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 제16기 당대회(16大)를 1년여 앞두고 중앙 영전설이 나돌기도 했다.
필자는 보 상무부장과 대만의 마잉지우(馬英九, 54) 타이베이 시장을 자주 비교하곤 한다. 실제로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이 두 사람을 양안(兩岸)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두 사람은 50대 중반 연배에 재모(才貌)를 겸비한 호걸 이미지, 개혁성향에 뛰어난 행정능력 소유자 등 두루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논리정연 한 언변과 훤칠한 외모 등은 최고 지도자감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향후 혹독한 시련 속에도 중국과 대만 정계의 유력 인사로 성장, 차기 대권을 도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두 사람은 결코 만난 적은 없지만 오래 전부터 서로의 인물 됨됨이를 소상히 파악하며 의기투합해 온 사이라고 아주주간이 논평하기도 했다.
필자가 대만유학 시절 마 시장이 리덩후이(李登輝, 81) 전 총통 정부 하에서 법무 장관직을 수행하며 폭력조직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보며 강한 인상을 받은 바 있다. 물론 국민당내 본토 세력 및 헤이진(黑金.검은돈)을 비호하는 의원들의 협공으로 중도하차 했지만 ‘클린’ 이미지가 그의 강점이다. 현재 천수이벤(陳水扁, 53) 총통이 타이베이 시장 재직 시절 1998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는 쓰디쓴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 마 시장이다. 따라서 천 총통에 대한 대항마로서 마 시장의 경쟁력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한편 보 상무부장의 가장 큰 장점은 청렴성과 근면성이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다롄시의 한 관계자는 “가장 먼저 출근하고 퇴근시간 뒤 불시에 회의를 열어 간부급들은 저녁시간에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일에 열중했다. 그가 1993년 다롄시장에 취임한 뒤 다롄은 매년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완벽한 공업도시로 탈바꿈됐다. 다롄은 현재 중국 내에서 ‘가장 깔끔한 도시’, ‘환경도시’로 꼽힌다. 그는 중국환경보호계의 최고상인 ‘중화(中華) 환경상’의 첫 수상자가 될 정도로 다롄시장 시절 환경 정화에 주력, 다롄을 2001년 유엔 선정 세계 500대 미화 도시에 들게 했다. 그는 시장 취임 뒤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으며 고 정주영 현대 전 명예회장, 황병태 전 주중한국대사 등 한국 내 많은 지인을 갖고 있다.
특히 상무부가 국무원의 일개 부서에 불과하지만 지난해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렝活灌?에서 새로 출범한 핵심 전략 부서라는 사실을 눈여겨봐야한다. 앞으로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에 상당하는 부처라는 점에서 향후 그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랴오닝성장 재직 시절 중국 지도부가 그동안 소외했던 동북대개발을 핵심 국가전략사업으로 결정, 성내 14개 시장을 비롯해 모두 280명과 함께 투자유치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해 놀라게 했다. 당시 한국 정관계 재계 인사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는 동북 3성 가운데 가장 강한 경제력을 가진 랴오닝성이 정보기술(IT), 신소재, 생명공학, 제약, 첨단장비, 소프트웨어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투자 확대와 외자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보 상무부장의 최고지도자 등극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 그의 라이벌이 될 차기 지도자군이 꽤 많기 때문이다. 그중 시진핑은 잠재력에서는 오히려 보 상무부장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진핑은 40대 중반을 겨우 넘어선 나이로 성장 연임에 성공, 중앙 정치 무대의 진입 발판을 마련했었다. 그가 40대 초반부터 부장(장관)급에 해당하는 성장에 취임한 이면에는 시중쉰의 후광도 없지 않았지만 뛰어난 정치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설득력이 강한 화술과 온화한 성품이 그의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 한명의 라이벌은 제2의 후진타오로 불리는 리커창(李克强, 49) 허난(河南)성 성장. 법학을 전공했지만 모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학력에서 보듯 경제 마인드가 뛰어나다. 그는 1998년 성장으로 옮길 때까지 출세 가도의 정거장으로 통하는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직을 무려 10년이나 재임한 바 있다.
공청단 제1서기 저우창(周强,44)도 태풍의 눈이다. 지난 세기말 ‘5.4운동 80주년’ 행사와 나토의 주유고 중국대사관 폭격 당시의 반미 시위를 막후에서 매끄럽게 총지휘, 리더십을 인정받은 바 있다.
이밖에 그의 상대는 되지 않지만 보 상무부장을 떠받칠 수 있는 신셴쉐예(新鮮血液) 리더들이 많다. 최근 칭하이(靑海)성 서기로 옮긴 자오르지(趙樂際,7) 전칭하이 성장도 베이징대 출신을 대표하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족함이 없다. 5년 전 세운 최연소 성장 취임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리를 거의 배출하지 않은 철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이 돋보인다.
또 최근 들어 1960년대 생으로 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소위 386세대들이 각급 기관의 고위 요직에 대거 진출, 이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매년 8월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 당정의 최고 지도부가 베이징(北京) 동부 보하이(渤海)만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 모여 현안을 토의하는 이른바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언젠가 보시라이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논의할 때가 올 것인가. 장쩌민(江澤民, 78) 리펑(李鵬, 76) 주룽지(朱鎔基, 76)등 제3세대 지도자군, 후진타오, 우방궈(吳邦國, 63) 원자바오(溫家寶, 62) 등 제4세대 지도자군에 이어 10년 내에 보시라이 체제가 등장할 개연성이 적지 않다. 적어도 국무원총리 자리는 꽤 찰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벌써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아무튼 현재 5세대로 불리는 40∼50대 중반의 젊은 피들이 당정 주류인 50대 후반 및 60대를 대체할 날이 오면 보 상무부장의 역할이 커질 것은 분명하다.
함태경/ 국민일보기자, 정치학 박사(중국정부와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