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25:10)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의 자유
희년의 자유와 선교의 정신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 싶다. 여호수아기에 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12지파의 가족 수를 따라 토지를 분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평균하게 분배한 것이다. 그러나 균등하게 분배한 토지는 영원토록 적어도 땅의 역사가 존속하는 동안 계속되는 균등이 될 수 없으리라. 하나님도 이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언약의 법을 베풀면서 하나의 위대한 계명을 주셨다. 적어도 50년에 한 번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균등한 사회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이다. 이것이 희년 제도이다. 희년의 주제는 그러므로 자유이다. 자유를 공포하라. 이것이 핵심 메시지이다. 그러면 자유가 어떤 자유인가?
첫째는 각각 기업으로 돌아가는 자유이다
균등하게 분배하여도 세월이 가다 보면 건강상 이유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감당하지 못하고 토지를 팔게 되고 어떤 종족은 토지를 사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나안 거주 50년마다 한 번씩은 사들인 토지를 원소유주에게 되돌리므로 각각의 기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우선적 자유는 가난한 자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된다. 땅을 되돌려 받아 새 출발하는 자유인 것이다.
둘째는 각각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이다
어떤 경우는 토지만 팔아먹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한 고난에 처하여 자신이나 자녀를 노예로 파는 경우까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50년마다 맞이하는 희년에는 노예도 해방되는 자유이다. 땅을 돌려받으며 노예가 해방되는 그 인생은 완전 새 출발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균형사회를 위하여 이러한 희년 제도를 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자의 자유이다.
셋째는 부자가 소유로부터 자유하는 자유이다
사들인 토지를 내어 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유인가?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사들여 잘 사용하던 노예를 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부자의 자유야말로 진정 위대한 자유이다. 소유로부터의 자유, 인간 욕심으로부터의 자유, 이러한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부자의 자유가 아니면 가난한 자의 자유도 노예의 자유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그래서 부자의 자유가 위대하다. 아 정말 우리는 스스로 가진 것을 내어놓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자유를 누린 것일까? 희년은 잘 지켜졌을까? 구약에 이 제도가 잘 지켜졌는지 안 지켜졌는지 기록이 없다. 아마도 지켜지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 희년의 자유는 인간이 소유와 재물로부터 자유하는 진정한 자유를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의 자유
아마도 이 희년의 자유가 지켜지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진정 희년의 자유를 온전히 실현하신 분은 한 분 예수님뿐인 것 같다. 예수님은 희년뿐 아니라 구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신 분인데 이 희년의 자유도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양하시고 인간의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하늘 보좌를 내어 놓으시는 자유, 이것이 희년의 자유를 실현하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도 내어놓으시는 자유, 이 온전한 자유를 이루신 분이 우리 온 인류에게 자유의 해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예수님에게서 희년의 자유가 실현됨을 보면서 동시에 예수 만난 자가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것을 신약성경은 보여준다. 희년의 자유는 예수님에게서 실현되고 그분 안에서 실현 가능성을 발견한다. 삭개오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때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면서 백성들을 포탈하여 세관원으로 부자 된 사람이다. 그야말로 소유와 재물의 예속자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자유가 그에게 전이된 것일까? 삭개오는 소유로부터 자유한 인간이 된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소유와 재물로부터 자유한 인생이 된다. 일단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선언하다. 이 것이 자유가 아니냐? 벌어들인 소유를 조건 없이 내어 놓는 자유 그것이 희년의 자유이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감격에 이 자유를 실현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그동안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도 의식했는지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그러면 삭개오는 대부분 다 내어 놓는 것이 된다. 토색한 것 4배나 갚으려면 나머지 절반도 내어놓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자유가 가능할까? 삭개오만큼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자유인가?
이에 비하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부자는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물러간 것을 본다.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묻는 한 부자에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다. 부자는 다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희년의 자유도 이루었는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 하셨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으면 이 희년의 자유도 알 것이거늘 부자는 재물에서 자유할 수 없기에 슬퍼하며 돌아갔다.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래 이 희년의 자유를 아무나 누린다더냐? 예수님을 찾아왔어도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를 모른다.
그러나 성령받은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보편적인 것으로 경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소유로부터 자유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제 것을 제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공동체 앞에 내어 놓았던 것이다.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이 희년의 자유를 이루고 누릴 수 있었다.
오늘의 사회와 희년의 자유
오늘 우리 한국 사회는 총체적 위기라고도 부르고 특히 갈등의 사회라고 부른다. 정치적으로 여당은 신주류 구주류가 충돌하면서 분당으로 치닫고 있고, 야당도 신세대 구세대가 충돌하면서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계는 노사갈등이 심화되어 이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걱정이다. 망할 때까지 파업하고 싸울 작정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사회는 보수 대 진보의 갈등이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어 분열되고 있다. 이것이 다 무엇인가? 그 근저에는 모두 자신의 욕망을 앞세운 갈등이요 다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소유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 권세에 대한 욕망, 이 타락한 욕망들이 충돌하고 파괴를 불러 들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사회는 이 희년의 자유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치유될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느 때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로 돌아가 희년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루어 가야 한다. 자기를 비어 내어놓는 자유의 사람들이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
오늘의 선교와 희년의 자유
컬럼의 이름이 선교일언인데 선교 이야기는 없이 희년 이야기만 했다. 무슨 의도가 있었는가? 선교도 희년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겠기에 말이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선교는 많은 성장을 하여 이제 세계에서 선교사 파송숫자가 두 번째로 많은 선교대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쯤 선교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이 희년의 자유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선교가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반성해야 할 것이 금권선교이다.
금권선거라는 말은 들었어도 금권선교라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일지도 모른다. 내가 금권 선교라고 일컫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선교사가 복음으로 사람을 얻기 보다 돈을 가지고 현지인들을 사들이는 선교행태를 일컫는다. 현지 교회 지도자들이 돈을 더 많이 주는 교단으로 이동하는 철새 행태를 보이는 것은 돈으로 사들이는 선교행태에서 온 것이다. 이로써사실상 현지 교회를 망가뜨리는 일이 허다한 것을 보고 안타깝게 느낀다. 금권선교는 파송하는 교회에서도 일어난다. 돈 좀 보태주고 선교사를 좌지우지하려는 모습도 금권선교 행태의 다름이 아니다.
둘째 반성해야 할 것은 명분선교이다.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를 후원하는 일들을 좋은 명분을 얻고자 하여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분이 서는 일은 하지만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그런 식의 선교행태를 반성할 일이다. 이름을 내고자 하는 동기에서 선교정책이 결정 나는 일들이 많다. 또는 자기 단체 확장의 욕심으로 하는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셋째는 이와 관련하여 정치적 선교를 반성할 일이다.
특히 교단선교에서는 선교가 정치적 입신하는 관건이 되고 또 선교를 정치적 계산에서 행하는 경우가 많다. 교단선교가 아니라도 선교사를 정치적 동기에서 좌지우지하는 선교단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선교행태들은 희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왜곡된 선교행태이다. 선교단체, 교회, 선교사 모두 희년의 자유를 구가하는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질도 명예도 권세도 조건 없이 내어놓는 자유의 사람들이 하는 선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는 어느 개인, 어느 교회, 어느 단체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따르는 일이요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자유가 우리의 선교를 다스리게 하여야 하겠다. 선교는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강천 /목사, 바나바 훈련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