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가르치고 싶은 영화
<패왕별희>를 만들어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바 있는 첸카이거 감독의 2002년 최신작 <투게더>는 중국의 근대화 속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가족애와 인간애를 되찾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대중적으로 묘사된 영화다. 여기서 대중적이라 함은 대단히 간결한 주제와 쉬운 전개방법, 그리고 절대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재미라는 속성이 적절히 배합되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시골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성공을 향해 도시에 와서 벌이는 에피소드와 연상의 여인에 대한 소년의 사춘기적 호기심, 그리고 아들을 뒷 바라지 하기 위해 좌충우돌 애쓰는 촌스런 아버지의 모습은 이 영화가 결코 대중을 외면하고 소수의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해 만든 예술영화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바로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투게더>가 이전의 첸가이거 감독의 영화와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첸카이거 영화가 쉽고 명확해졌다며 반기는 이들도 있다. 즉 그가 지닌 예술적 표현 능력은 여전히 살아있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고 반기는 것이다. 특히 재미를 넘어 의미를 찾는 관객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성애는 물질중심적인 현대 사회에서 관객들에게 충분히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대중적이며 또한 교육적 가치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오직 <패왕별희>만을 본 기억을 간직한 채 이 영화를 대한 관객이라면 이것이 과연 첸카이거의 영화인지 의심이 갈만도 하지만 영화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그의 영화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만들었던 <현 위의 인생 (邊走邊唱), 1991>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토속적 문화배경은 이제 북경이라는 근대화된 도시로 바뀌었지만, 그리고 <패왕별희>에서 나타난 중국의 경극과 같은 고전문화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통한 서구의 클래식으로 변환되었을 뿐 그가 영화 속에서 다루는 인물과 사건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즉 가난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물들이 사회의 중심부로 나아가거나 욕망을 성취하려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삶의 진위가 여전히 내용에 근간을 이룬다. 어느 사회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지금 자본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고 또한 개방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에서는 변두리에서 사회의 중심부로, 무명의 존재에서 유명 인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비극은 오랫동안 지켜온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와 가치들이 붕괴는 일이다. 사랑은 돈에 의해 희생이 되고 예술은 명성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전락한다. 거기다 아버지는 그렇게도 사랑하고 잘되기를 바랬던 아들과 이별을 해야한다. 살아가는 목적은 상실되고 수단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첸카이거 감독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화려한 성공을 위해서 희생되는 보다 중요한 인간미와 가치에 대한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골의 한 작은 마을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리우 청은 어느 날 역에서 바이올린과 함께 버려진 아이 샤오천을 발견한다. 샤오천을 아들로 삼고 각별한 애정을 쏟는 리우 청은 샤오천이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큰 결심을 하게된다. 샤오천이 13살되었을 때 두 부자는 동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에서 중국 최고, 나아가서는 세계 최고의 연주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최고의 선생님을 찾아 북경으로 올라온다. 커다란 이불보따리를 배낭 위에 올려놓고 역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으며 오직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한 촌사람들의 의지는 사실 많은 영화에서 보아왔던 별 다를 것이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성격의 인물들을 대칭 시킴으로써 관객들이 어느 편에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를 선택하게 만든다.
가장 극명한 대칭적 캐릭터는 샤오천을 가르쳤던 두 명의 다른 선생님이다. 먼저 샤오천이 처음 만나 지도를 받게되는 지앙 교수는 한마디로 예술은 알지만 사회적 성공은 하지 못한 채 개인교습으로 먹고사는 가난한 선생님이다. 그는 샤오천의 재능을 높이사지만 고지식하고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또한 지도자로서의 확고한 신념은 샤오천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가 샤오천을 가르치는 원칙은 전문 연주가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귀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다.
첫째, 열심히 연습할 것.
둘째, 연주를 즐겨라.
셋째, 마지막으로 엄마 생각날 때만 연주하지 말아라.
훌륭한 연주가가 되기 위한 앞의 두 가지의 일반원칙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세 번째는 샤오천만에게 해당되는 특별한 원칙임에 틀림없다. 두 살 때 바이올린과 함께 버려진 샤오천에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감정을 연주에 불어넣어서 살아있는 음악이 되게 만드는 원동력구실을 하는 것이지만, 다양한 음악을 연주해야하는 입장에서 한가지의 감정만을 쏟아 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지앙 교수의 충고는 의미심장하다. 또한 지앙 교수는 그 자신이 여자 친구를 빼앗겨 본 상처를 가지고 있고, 돈으로 재능과 명성을 사는 음악계의 관행으로부터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순진하고 가난한 샤오천과는 인간적인 교감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앙 교수에 비해서 유쉬펑 교수는 한마디로 스타제조기의 역할을 하는 성공한 최고의 선생이다. 성공한 제자의 연주회에서 칭송을 받는 그는 자신의 제자가 콩쿨에서 일등을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냉혈한이기도 하다. 그는 샤오천이 악기 상에 팔아 넘긴 바이올린을 샤오천이 되찾지 못하도록 몰래 사오지만 돌려주지 않는 치밀한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지앙교수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감정을 소화해 낼 수 있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샤오천의 과거 생활과는 완전히 분리시켜서 새로운 자기 스타일의 사람을 만들려는 의도가 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교수를 바라보는 샤오천의 아버지 리우 청의 시각이다. 그가 지앙 교수를 찾아간 일이나 유쉬펑 교수를 만난 일 모두는 오직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성공은 대단히 물질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앙 교수를 떠나 유쉬펑 교수로 레슨을 바꾸려할 때 샤오천의 아버지가 지앙 교수에게 남긴 말은 이를 더욱 분명히 알려주는 대목이다.
지앙 : 바라는게 부와 명예요? 아니면 훌륭한 음악가요?
샤오천 아버지 : 부와 명예요.
지앙 : 그건 보장 못해요.
샤오천 아버지 : 그렇다면 그만두죠.
그렇다면 부와 명예를 좇아 유쉬펑 교수 밑으로 들어간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유쉬펑 교수는 샤오천을 데리고 살겠다고 하며 아버지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샤오천의 아버지로서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고생하고 헌신한 결과로서 아들과 함께 있는 행복감도 누리지 못한채 혼자 떠나야 하는 서글픔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첸카이거 감독은 여전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부성애를 강조한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 없는 동양의 아버지의 모습은 이 대목에서도 유효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재성을 지닌 자식을 통해 이루지 못한 자신의 성취 욕을 채우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 <샤인(Shine)>과 비교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피터 힉스 감독의 1996년작 <샤인>은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데이비드가 아버지의 성공에 대한 집착에 의해 미쳐가는 과정을 그렸었다. 사랑과 집착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첸카이거 감독은 세속적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삶이 오히려 인간 소외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아버지의 부성애와 부자지간의 끈끈한 정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백미는 샤오천이 국제 콩쿨에 나가는 일을 그만두는 대신에 고향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역에서 만나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위한 연주를 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성공과 환호가 존재하는 공연 무대가 아니라 소음과 인파들로 넘쳐나는 기차역에서 아버지를 위한 샤오천의 연주는 현대화를 추구하는 중국인들에게 진정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놀라운 감동임에 틀림없다.
강진구/ 영화평론가, 크리스천문화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