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아님
사람마다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경위를 보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전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할 사람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이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곤 한다. 내 자신은 어떤가? 중국대륙의 젊은 지식인이며, 자연과학을 배우는 과학도인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막연한 이상
나는 지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날씨가 몹시 추운 쓰촨(四川)성의 짱(藏)족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일하셨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에게 양육되었고, 그 바람에 도시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말 잘 듣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아이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대입시험제도가 부활했다. 나는 비록 어렸지만, 대학에 합격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이며, 부모님의 업무를 이어받아야 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당시 나의 ‘주민등록’은 여전히 쓰촨성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학업에 힘썼고, 결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푸딴(復旦)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에는 전공인 화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들도 열심히 습득하였고, 서양사상과 문화에 대해서도 차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누가 뭐래도 나홀로 분투한다’라는 적극적인 인생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정부당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다소 의심과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심사숙고하거나 추구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내심 ‘나 자신 외에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교만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쓰촨성의 청뚜(成都)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이렇다할 신앙을 갖지 않았다. 마작과 같은 오락으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음속에 ‘우국우민(중국의 지신인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의 정서가 잔재해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이상’을 추구하고도 싶었다. 비록 그 ‘이상’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긴 했지만, 아마도 ‘국가와 인민을 위해 약간의 유익한 일을 하자’는 정도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내 자신을 꽤 괜챦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이상’이라는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동년배나 타락한 세대들 보다는 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6 ․ 4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자, 나를 포함한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들끊는 열정으로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애국의 열정은 잔혼한 현실 앞에 아주 빠르게 소멸해 버렸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환멸’은 나의 심령을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당시 나의 최대 고민은 내가 믿고 의지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의미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회의가 엄습해왔다.
이러한 방황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명예와 이익 따위를 추구해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는 없었다. 목이 마르다고 독한 술로 갈증을 풀어보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악한 세태는 인간의 교활함과 음흉함을 더욱 인식시켜주었다. 나는 비로소 ‘문제의 핵심은 마음의 문제(The heart of the problem is the problem of the heart)'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조차 구제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슬퍼했다. 자긴 자신의 문제도 극복하지 못하는데 무슨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논하겠는가?
나는 고통 중에서 어렴풋하게 초월적인 신앙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철학과 종교 방면의 책들을 더욱 많이 읽기 시작했다. 서양철학에서 중국전통사상까지, 불교, 도교, 노장사상에서 존재주의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기공과 관상에 이르기까지 마구 읽어댔다. 그러는 동안 간간이 인류의 지혜가 섬광처럼 번뜩이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결코 이런 것들이 생명의 의미에 대한 답안을 줄 수는 없었다. 약간의 기독교 관련서적도 읽었다. 대부분은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책들이었다. 심지어 경멸과 비방으로 가득찬 책도 있었다. 기독교 사상을 단지 서양의 정신적인 지주 중 하나인, 일종의 철학사상으로 소개해 놓은 책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구원과 자유함(劉小楓 저, 상해인민출판사《인문총서》중 하나)’ 이라는 책은 ‘비교철학’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신앙체계를 동서양의 철학 및 종교와 비교한 것이었다. 책 속에 어떤 결론은 없었지만, 다 읽고 나니 기독교 신앙에 대해 깊은 존경심이 생겨났다.
평범하지 않은 ‘양자강 탐사’
이 기간에 나는 몇몇 기독교인과의 교제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신앙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1990년 나는 부수입을 위해 영어가이드 자격시험을 치렀다. 그런 뒤, 영국의 ‘양자강(長江) 탐사반’의 중국측 수행원이 여행사를 통해 나를 통역으로 고용했다. 이 탐사반은 에어쿠션배를 이용하여 양자강을 탐험하는데, 물줄기를 거슬러 양자강의 발원지까지 가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 반 돈벌이 반으로 직장에 휴가를 내고 이 특별한 탐사반에 참여하였다. 나중에야 이 탐사반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이들이 영국에 각자의 사업과 가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들은 각자 사재를 털어 이 활동에 참여한 것이었고, 결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관광여행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지리, 지질, 재료, 의학 등의 과학탐사 외에도, 이들의 중요한 목적은 에어큐션배라는 현대적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양자강 상류의 고립지역에서 의술을 행하고, 현대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인도주의적 원조 등의 실현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즉 양자강 상류의 열악한 자연환경과 싸워야 했고, 각종 인위적인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이들은 중국 국무원의 허가서를 지니고 있었지만, 관료주의와 오로지 이익만 추구하는 일부 중국측 요원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때는 통역사인 나도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기독교인들이 인내심을 갖고 기도하며, 그들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극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을 보았다. 양자강 상류에서 나는 아침 저녁으로 그들과 만났고, 한 달 여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내게 체계적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나는 고난과 위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초월적 신앙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힘을 보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생생한 간증은 책 속에 적혀 있는 철학에 비해 훨씬 진실하고 믿을 만했다. 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고, 일부 선입견과 오해가 사라짐을 느꼈다.
양자강탐사 이후, 영어를 배우던 나의 친구 하나가 자신이 이미 주를 영접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나를 그들의 청년기독교인 가정집회에 초청했다. 그리하여 나는 신세대 중국기독교인들을 만나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와 배경이나 나이가 비슷한 젊은 무리들이 어떻게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찬송을 부르고, 교제하는지를 보고 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여전히 관망하는 태도만 가졌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문화적, 지식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내 스스로 주를 영접하여 이 신앙이 나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려는 생각은 아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1992년 8월 나는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중국유학생들은 대개 출국에 얽혀 많은 난관을 극복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속 직장의 만류, 토플시험, GRE 시험, 유학경비 지원 신청 등 그 어려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청뚜에서 비자를 받을때는 미국 영사관 앞에서 4일 밤낮을 줄을 서야만 했다. 신기한 것은 비자 받기 하루 전날 오후에 알라바마 대학교에서 부쳐온 ‘Ⅰ-20 Form'을 받았다. 아직 주를 영접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어렴풋이나마 나를 인도하는 자애로운 손길이 있음을 느꼈다.
미국에 도착하자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아내와 떨어진 외로움 같은 것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알라바마에 도착하니, 같은 고향사람이자 같은 과 출신인 ‘리우선배’가 공항에서 나를 맞아주었다(그 전까지는 그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들 가족은 나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차로 나를 여기 저기 데려다 주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주를 막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나는 점점 더 많은 크리스찬 중국인과 미국인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성경연구반과 교회로 데리고 다니면서 생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들의 삶 속에서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생명의 빛을 보았으며, 진실한 생명 뒤편에 펼쳐져 있는 신앙에 대해 사모하게 되었다.
성경연구반에서의 성경연구는 기독교신앙의 기본요지를 더 직접적이고 진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처음에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아주 조심스러웠으나, 성경연구반의 분위기가 활기차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나 또한 자유분방하게(심지어 교활하게) 기독교인 친구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과 변론하였다. 그들은 늘 참을성 있게 해답을 주었고, 겸손하게 토론해 주었다. 나는 예전에 과학적 이성의 장애라 여겼던 유신론과 기독교신앙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점점 타파해 가기 시작했다. 성경의 진위, 진화론과 창조론의 비교, 기독교와 타종교의 구별 등의 문제들을 계속 사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나는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경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항상 나의 심령을 뒤흔들고 감동시켰다.
생명의 변화
1992년 10월 어는 주일날, 나는 한 미국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미국인 목사의 설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날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 내렸다. 설교를 마치고 목사님이 “지금 이 시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을 때, 마음속엔 여전히 갈등과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많았지만, 나는 커다란 감동에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강대상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 가운데 들어오셔서 나의 구 주와 생명의 주가 되시고 나의 일생을 주관해 주시도록’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말했다.
주님을 영접한 후, 내 생명은 정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마치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철저히 갱신되었다. 예전엔 도덕적으로 자기만이 옳다고 여기고 하니님의 존재를 부정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죄성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도 내게 당신께 순복하고, 은혜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예전엔 인생의 의의를 간절히 탐구해도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생명의 기운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게 되었다. 생활 가운데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였다. 수고하고 번뇌할 때 하나님은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고, 또 곤란을 당할 때 힘의 원천이 되어 주셨다.
나는 원래 성격이 거칠고 급하며, 이기적이고 다툼을 좋아했다. 그러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자 나의 기질도 점차 개선되었고,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가장 분명한 예는 아내와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보고 부부간에 사랑이 깊고 자상하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은 원래 성격이나 기질 모두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주님을 영접한 후 두 사람이 시시때때로 함께 기도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서로 순종하였기에, 아름다운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깊이 깨달았을 때, 나에겐 최종적인 신앙목표가 생겼으며 인생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자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생겨났다.
표류하던 나의 심령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 잃은 영혼은 이제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학업과 구직, 현재의 일터 등에 있어서 모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 정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평안이 넘치는 마음과 환경을 초월하는 만족과 기쁨이었다.
주를 영접한 이후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보면,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에 감격스럽기 짝이 없다. 전에는 운명이 마치 하나님의 주사위 같다고 감탄했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는 근본적으로 어떤 ‘우연한 사건’이란 없다. 나의 신앙 여정을 돌아볼 때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고, 모든 일정 가운데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오묘하고 깊고 높은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나누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여! 당신이 만약 마음의 문을 열기를 원하고, 진심으로 진리를 사모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이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며, 당신으로 하여금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해주실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출처 /《海外校園》제25기
기드온 / 중국인 성도
편역 /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