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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20  통권 80호  필자 : 장현진  |  조회 : 1899   프린트   이메일 
[선교사의 삶과 사역]
행복한 삶의 노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예수님의 성육신

선교사의 삶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이 구절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 이 사실에 대해 이 글을 읽는 모든 형제 자매들 역시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과연 당신의 이웃이 이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비록 육신의 모습이 세상의 눈에 먼저 드러나겠지만, 주님의 함께 하심은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드러내는 일, 난 그것을 가리켜 ‘선교사의 삶’ 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 하면 대개 선교지, 타문화권, 언어훈련, 선교훈련, 제자훈련, 후원, 협력사역, 전임사역, 동역사역, 기도 동역자 등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초점을 ‘성육신’ 이라는 용어가 선교사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나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기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선교사의 과제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 선교사를 선별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선교사 개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사명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은 그가 사역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충분한 훈련을 쌓도록 지원하고,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와 관심으로 동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과제가 지나치게 선교전략적인 면에만 집중해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선교지에 도착한 선교사는 먼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을 먼저 나타내게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격이며 품성으로 드러나고, 곧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선교지에서 사역자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선교전략도 아니요,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도 아니다. 바로 그 선교사가 자신의 삶에서 시작되는 환경이다. 또한 그 반응은 그의 인격과 성품을 통해 나타난다.

주님께서 필자의 타이완 생활 8년 가운데 허락하신 은혜를 기록코자 할 때 설레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공존함은 주님께서 종을 믿으시는 사랑과, 온전치 못하여도 인내로 기다려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또한 매일의 삶 속에 내가 약할 때에 주님의 그 지극하신 은혜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웃은 당신을 누구라 부르는가?
‘아무(阿牧)!’ 이 땅의 학생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타이완 학생 복음화의 사명을 깨달은 후 주님께서 일러주신 길은 나 자신이 저들 가운데 들어가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서 그들과 똑같이 공부하면서 함께 지내는 일, 그것은 선교사로서의 사역 이전에 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다. 그들과 함께 과제물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였다. 시험 때가 되면 밤샘도 하였고,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재시험도 치뤄야 했다.

그리고 점심 때면 학생들과 더불어 도시락을 사들고 빈 강의실에서 잡담하며 장난도 쳤고, 체육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가 몸을 부딪히며 농구도 즐겼다. 그런가하면 휴일엔 함께 어울려 등산도 하고, 커피숍에서 인생철학을 논하며 얼굴을 붉히며 세상의 모습들에 대해 열띤 토론도 했다. 그런가하면 그들이 기뻐할 때 그 기쁨에 참여하였고, 그들이 슬퍼할 때 또한 그 슬픔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중심에서 참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습은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슬픔으로 분류되어 갔다. 학업으로 지친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친구처럼 그들을 위로하였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세상의 선배로써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으며, 가정문제와 이성문제로 고뇌하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내 귀를 열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주었다. 가르치기 보다는 들어주었고, 이끌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고통 받는 곳에 들어가 그들의 손을 이끌고 밝음으로 인도하여 주었다. 그들에게 난 동기생으로, 친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친구처럼 받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이 나를 ‘아무’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장무스(張牧師. 장목사)’ 라고 부르자니 거리감이 있고, ‘쉔진(玹璡. 현진)’ 하고 이름을 부르자니 너무 예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친구처럼, 그리고 형이나 오빠처럼 느껴지는 나를 좀 더 친근감 있게 부르고 싶어서 이 호칭을 만들어 준 것이다. 결국 학생들이 부르던 호칭을 교수들까지도 부르게 되었고, 누군가가 나를 ‘아무!’ 하고 부를 때면 주변의 학생들이 의아스레 묻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을 ‘아무’ 라고 불러?” 그렇게 시작된 질문은 한 두 사람과의 대화가 되었고, 기도가 되었으며, 모임이 이루어졌다.

누군가 나를 찾아와 묻기를, “당신은 목사이고 선교사인데 왜 대학생이 되어 복음을 전하려 합니까?” “이미 가진 학벌이 모자라서? 아니면 철학(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기 때문)을 공부하고 싶어서? 아니면 어떤 다른 목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어를 공부하는 동안 타이완 학생들의 생활을 보게 하셨고, 그 생활 속에서 그들이 복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저들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는 그들을 만나기가 어렵고, 외부인으로 학교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기엔 환경적으로 열악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학생이 된다면 최소한 한 학과의 학생들과 4년을 얼굴을 맞대며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1년이 지나자 모임에 참석한 학생은 세 명이었다. 지금은 이미 졸업하고 학교를 떠났으나, 당시 제자훈련을 받은 세 명에서 출발한 모임은 5년이 지난 지금 8개 대학 200여 명의 학생들과 20여 명의 교수진으로 구성된 모임이 되어 자체의 장학회와 소그룹 조직으로 운영되는 캠퍼스 선교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나를 가리켜 ‘아무’ 라고 부른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2~15).
 

당신이 가진 선교전략은 무엇인가?
필자가 현재 사역하고 있는 타이베이 링량탕(臺北靈糧堂. Bread of Life Christian Church in Taipei)은 전 세계 중국인 복음화를 위한 지교회를 세우기 위해 현지에서 전임 사역자 부부를 선별한 뒤 타이베이의 본 교회로 초청하여 일정 기간 사역자 훈련을 시킨 후 다시 해외로 파송한다. 그러는 가운데 본인이 만난 남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 헨리를 소개코자 한다. 그의 아내는 타이완 사람이며, 그들은 결혼 후 이곳의 북부 지역에서 교회를 섬기다 남아프리카로 돌아가 생활하던 중, 다시 남아공에 교회를 개척키 위한 훈련과정으로 지금 타이완에 머물고 있다. 그가 언젠가 간증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한번도 욕이나 저주섞인 비난을 듣지 않고 자랐다. 행여 나나 형제, 자매들이 실수하거나 나쁜 짓을 한 적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말로 우리를 책망하거나 노함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분은 언제나 우리 모든 가족들, 특히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공평하셨으며, 온화한 모습으로 자녀들을 대하셨고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나름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 뒤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잠언을 읽게 되었을 때이다. ‘이건 바로 우리 아버님이 늘 말씀하시고 생활하시던 모습인데∙∙∙’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성경 말씀을 그분의 삶의 모습과 언행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자란 헨리의 얼굴은 다른 이와 구별되는 색다른 표정이 있다. 언제나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 무밭 옆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한 미국인 선교사가 생각났다. 그는 설교할 때 매번 한자리에서 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천막교회였기에 마땅한 강대상도 없었지만, 그는 서툰 한국어로 주일하교 어린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 사이를 헤집고 다니곤 했다. 그러다 아이들이랑 눈이 마주치면 그 푸른 눈동자로 소리 없이 던져주시던 미소, 간혹 성경 이야기를 들다 졸기라도 하면 털복숭이 하얀 손길로 우리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셨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이야기만 듣고 앉아있던 우리에게 서툰 경상도 억양으로 “맞나?” 라고 갑자기 질문을 던지곤 재미있어라 웃으시던 모습. 어린 시절 그분의 미소를 보면서 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그 손길을 느낄 때 예수님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을 때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들었던 성경 이야기와 찬송은 그렇게 많이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그때 이미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교사의 삶은 인격의 드러남이다. 타문화권 선교지에 들어 온 선교사는 먼저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아무리 언어를 잘 구사한다 할지라도 본국에서 가졌던 지식이나 경험을 타인에게 완전히 전달하기는 어렵다. 본국의 선교단체나 교단 선교훈련원에서 배웠던 선교훈련과 전도훈련, 그리고 각종 선교를 위한 훌륭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선교지의 언어로 옮겨서 전달하고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해결되고 언어 역시 유창해지게 된다. 그렇지만 언어 이전에 드러나는 것이 있다. 바로 선교사의 인격이다. 그러한 인격은 선교사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말씀에 비례관계를 가지고 요구될 때가 많다. 결국 삶의 표현이야말로 선교사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유창한 언어능력이 있다 하여도 언어가 모든 것을 대변해 주지는 않는다. 선교지 영혼들을 향한 선교사의 사랑을 어찌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가? 필자의 아내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중국어를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는 선교비로 두 사람이 동시에 언어훈련을 받기는 너무나 벅찼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어 실력은 당연히 내가 아내보다 유창하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중국어로 이 땅을 위해 기도할 때 듣는 이들의 감동과 성령의 은혜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물론 때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아내가 서툰 중국어로 이 땅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가 표현하는 짤막한 단어 한마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감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땅을 향한 사랑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나 자신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통해 드러내시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0, 20)
 

공원과 가로등과의 관계성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많은 사람들(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심지어는 선교사들의 입에서도)이 타이완에 대해 ‘이 사회는 정말 썩었다’ , ‘이곳은 정말 어둠의 땅이다’ 라고 혹평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타이완만의 문제일까? 당신이 만일 저녁 나절에 공원에 갔는데 그 공원의 모든 가로등이 꺼져있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공원이 어둡기 때문에 가로등이 꺼져 있다’ 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서 공원이 어둡다’ 라고 할 것인가.

타이완의 복음화율은 지난 1980년 이래 숫자적으로는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선교사와 교회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화율은 결코 증가하지 않는 실정이다. 반면 우상숭배를 위한 ‘미아오(廟.사당)’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으며, 사회는 앞서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타락과 부패로 썩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선교사와 교회들은 이 땅에서 제대로 빛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선교사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교회들은 과연 이 땅 타이완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타이완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가로등’의 문제이다. 선교사의 고통과 시련이 눈물의 기도로 씻어져야 한다면, 그 문제를 가져오는 어둠을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 더 뜨거운 눈물로 이 땅을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두움의 문화를 피해 자신의 문화만을 주장하며 언제까지나 방문객과 나그네와 같은 모습으로 사역에 임할 것인가? 이것은 선교사들이 타국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많이 드러나는 일면이다. 복음이 필요한 선교지에서 자녀들은 외국인 학교로 피난시킬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로 하여금 이 땅의 학교에서 빛을 발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여야 좋은가. 그렇지 않으면 생활의 지혜라고 말함이 좋은가.

처음 타이완에 도착하였을 때 딸 한솔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친 뒤였지만 언어를 배우기 위해 유치원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딸은 평범한 타이완 어린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녔고, 그들과 더불어 성장하고 있다. 아이의 습관과 말투는 이곳 아이들과 다름이 없으며, 한국어를 하거나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한솔이를 한국인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한솔이는 그리스도인이며, 아빠, 엄마가 선교사이며, 매주일에 교회에 나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찬양하며, 자신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용돈의 십분의 일을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며, 때론 뜻하지 않는 용돈을 받고 기쁨으로 주님께 선교헌금도 드릴 줄 안다. 그런가 하면 매일 저녁 가족들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로써 하루를 마친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 모든 가족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 가족이 매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스스로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문제가 어느 날 은혜롭게 해결되자 이웃의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고 축복하시는 사람들이야.” 그 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셨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정하셨다. 이것을 보는 마음의 기쁨이랴. 처음에는 누군가가 “목사님은 한국 사람 같지 않아요.” 하면 마치 나를 비웃거나 흉보는 것으로 들렸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 내가 타이완 사람들처럼 구질구질하고 촌스러워 보인다는 건가?”라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구사하는 중국어를 들을 때나 혹은 내 외모를 보고서 “목사님이 한국인이었어요?”라고 말하면 은근히 기분이 좋다.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살다 보니 저도 모르는 순간에 닮아버렸네요’. 그리고 매번 주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 종으로 하여금 이땅의 마음으로, 내가 아닌 저들과 함께 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노래를 부를 줄 안다. 그리고 노래하는 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난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가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래서 그곳에는 언제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선교사의 삶, 그렇다. 선교사의 삶은 곧 세상에서 가장 예수가 충만한 삶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부르는가? 당신의 얼굴에 예수가 그려져 있는가? 어두움 가득한 공원에 앉아 있기를 싫어한다면 그곳에 불을 밝히도록 하라. “주님, 이 낮은 곳에 오셔서 비천한 저희 가운데 충만히 거하여 주심을 찬양합니다.”




 

장현진 목사 | 타이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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