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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0  통권 78호  필자 : 편집부  |  조회 : 6199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중국의 무슬림
후이족 무슬림과 신장 무슬림의 비교


흔히들 무슬림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기독교 인구보다도 더 많은 수의 무슬림들이 중국에 살고 있다. 근래 들어 중국 정부의 서부대개발 정책으로, 대다수의 무슬림들이 밀집해 있는 서부지역에 대한 투자,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글에서는 후이족 무슬림과 신장 무슬림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중국 무슬림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무슬림이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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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년 제 4차 인구조사 통계에 근거하면1) 중국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는 17,597,370명이다(1995.중국민족통계연감,北京民族出版社). 이 숫자는 55개 소수민족 중 이슬람교를 믿는 10개 민족 인구의 합계로서, 한족(漢族)과 다른 소수민족 중의 이슬람 신도들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중국의 이슬람 사원인 칭전쓰(淸眞寺)에 모이는 회중을 분석해보면 이보다 많은 수의 무슬림이 있음을 알게 된다. 1955년 중국 이슬람 연합회는 중국에 약 4만여 개의 이슬람 사원이 있다고 보고했는데, 전통적으로 하나의 사원을 건축하고 유지하려면 그 지역에 적어도 500명을 곱하면 그 당시에만 중국에 총 2천만 명의 무슬림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추산해보면 현재 중국의 총 2천만 명의 무슬림이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현재 베이징(北京)에는 8만 명의 무슬림, 42개의 칭전쓰가 있으므로 각 사원의 관할권 내에 평균 2천 명의 무슬림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추산해보면 현재 중국의 총 무슬림 인구는 3천만 명 이상이다. 홍콩 이슬람 연합회 전도주임 마용샹(馬永祥)은 5천만 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10개의 소수민족은 공식적으로 이슬람교를 자신들의 종교로 삼고 있는 후이(回)족, 위구르(維吾爾)족, 카자흐(哈薩克)족, 둥샹(東鄕)족, 키르키즈(柌爾克孜)족, 싸라(撒拉)족, 타지크(塔吉克)족, 우즈벡(烏孜別克)족, 바오안(保安)족, 타타르(塔塔爾)족이다. 이 민족들의 모든 구성원들이 실제로 이슬람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아니지만, 이슬람교는 이들의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간이 되기 때문에 각 개인은 출신상, 또는 혈통상 무슬림으로 간주된다. 

중국의 무슬림들은 전국 각지에 분포한다. 베이징, 상하이(上海), 텐진(天津)등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 무슬림들이 살고 있으며, 남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하이난(海南)성에도 큰 무슬림 공동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닝샤후이족(寧夏回族)자치구,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 간쑤(甘肅)성, 칭하이(淸海)성 등 소위 ‘무슬림 벨트(Muslim belt)'로 불리우는 서북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중국의 무슬림 민족들은 중국에 들어온 경로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이에 따라 민족적 특성도 다르다. 하나는 중국 내지(內地)에서 발전하여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 후이족 무슬림(동샹족, 싸라족, 바오안족 포함)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주로 살고 있는 위구르족, 카자흐족 등 투르크계 무슬림이다. 중국 이슬람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서구 학자, 중국 학자들도 후이족 이슬람(또는 내지 이슬람)과 신장 이슬람으로 나누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글에서는 두가지 분파의 중국 무슬림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하겠다. 

후이족 무슬림의 기원과 역사 
중국에서 이슬람을 믿는 민족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후이족은 약 860만 명으로 전국에 고루 분포해있지만, 닝샤후이족 자치구에 152만명, 간쑤성에 100만 명 이상이 밀집하여 살고 있다. 후이족은 ‘후이민(回民)’또는 ‘후이후이(回回)’라고 불리는데, ‘후이(回)’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메카 성지에 있는 신전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몸과 마음을 메카로 향해 ‘돌린다’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송나라 때 중앙아시아의 ‘후이구(回鶻)’, 즉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믿었기 때문에 후이가 무슬림을 의미하게 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슬람교의 중국 전래와 후이족의 기원에 관련하여, 청대에 쓰여진 「회회원래(回回原來)」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정관 2년(628) 어느날 당 태종이 꿈을 꾸었다. 용이 그를 쫓아와 도망가는데, 갑자기 녹색 겉옷을 걸치고 머리에 터번을 두른 사람이 나타나 용을 쫓아 버렸다. 꿈에서 깬 태종이 해몽을 요청하자 한 현자가 말하기를, 지금 서방에 그런 모습을 한 예언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꿈에서 본 그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당 태종은 그 예언자를 초청하기 위해 즉시 사신(使臣)에게 선물을 들려 보냈다. 예언자는 자기가 직접 못 가는 대신 사신 세 사람과 3천 명의 군인들을 보냈다. 세 명의 사신 중 둘은 도중에 죽고 ‘카신(喝心)’이라는 사람만 살아서 태종을 만나게 되었다. 태종은 카신을 통해 이슬람교의 뛰어남을 알게 되었고, 3천 명의 아랍 군인들이 중국에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한족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게 해주었다. 이 설화의 내용이 사실인지는 입증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후이족의 대부분은 이 설화를 사실로 믿고 있다. 즉 페르시아인, 아랍인 등 다양한 민족 집단들이 중국에 들어와 살면서 토착 한족 및 멍구(蒙古)족과 결합, 오늘날의 후이족 무슬림을 형성한 것이다. 

초기 중국 후이족의 기원과 역사는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7세기 중엽 당나라는 광저우(廣州), 푸저우(福州), 취엔저우(泉州) 등 동남 연안 항구도시에 외국인 특별지구를 설립하여 무역을 했는데, 이들 무역상의 대부분이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 페르시아에서 온 무슬림이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정책하에서 장기적으로 중국에 거주하면서 일종의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들을 통해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파되었다. 당대에는 이들을 ‘번상호고(蕃商胡買)’라고 불렀으며, ‘색목인(色目人)’혹은 ‘대식교도(大食敎徒)’라고 했고, 이슬람 율법을 ‘대식법(大食法)’이라고 하였다. 송대에는 이들을 ‘토성번객(土生蕃客)’ 혹은 ‘오세번객(五世蕃客)’이라고 하였는데 통칭하여 ‘번객(蕃客: 교민이 된 중국 국적의 무슬림이라는 의미)’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들이 최초 후이족의 기원이 된다. 

두 번째는 13세기 초 몽골의 징기스칸이 서쪽을 정벌하자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의 아라비아인,페르시아인, 돌궐(투르크)계 민족들이 노예, 상업, 혹은 전란을 피해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역시 무슬림이었다. 이들이 7세기 중엽 이후 내지에 거주하던 번객과 융합하고 한족, 멍구족과 결혼하여 그들을 개종시키면서 중국 무슬림은 더욱 번성하였다. 이때부터 ‘淸眞敎(칭전자오)’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슬람교는 이슬람 사원을 뜻하는 ‘淸眞寺(칭전쓰)’를 중심으로 후이족 공동체 형성에 막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명대에 이르러 후이족은 경전 연구, 저작활동 등을 통해 이슬람교의 사상과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아라비아어에 능통하면서 유교, 불교, 도교 학설에도 능한 후이족 학자들은 중국 전통문화와 이슬람교를 결합하였는데, 특히 유교로 코란 및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이슬람교를 중국화하였다. 중국 이슬람교 체제는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내용면이나 형태면으로 특색있는 발전을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결국 한족 및 중국 문화에 동화된 무슬림들에 의해 이슬람은 중국에서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 중국 후이족 무슬림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16세기, 명나라와 서방의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쇄국정책으로 인해 국제무역이 감소되자 중국 무슬림의 지위는 약하되었다. 특히 청말에 이르러 서북과 서남 변방지역에서 만주 정권의 통치를 거부하는 무슬림들의 무장봉기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무슬림들이 청 정부와 이에 동조하는 한족에 의해 극심한 압박과 억압을 당했고,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마밍신(馬明心)등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 

신장 무슬림의 기원과 역사 
중국 동남 연안으로 들어온 외국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져 후이족 무슬림이 형성되었다면, 신장 무슬림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온 아랍인들의 상업활동과 이슬람 선교사의 포교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장 이슬람의 특징은 ‘지하드(聖戰: 이슬람 정복전쟁)’를 통해 강제로 전파된 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신장 지역에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9세기 말엽으로,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투르크계 민족들은 샤머니즘, 마니교, 경교, 불교 등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특히 1세기부터 15세기까지  ‘불교의 제2의 고향’ 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지역이었다. 

875년 최초의 페르시아계 이슬람 왕조인 사마니드 왕조의 나쓰얼 왕자가 정권을 잡으려다가 실패하고 인접한 카라한 왕조로 망명하였다. 당시 카라한 왕조는 티엔산(天山) 북쪽에 위치하여 바이칼호 남쪽과 신장 서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나쓰얼은 카라한 왕조의 3대 왕인 술판 부그라칸에게 이슬람교를 전하였고, 함께 연합하여 지하드를 발동,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력의 도움을 얻어 신장에 최초의 이슬람 왕조를 세웠다. 이때 카라한 왕조의 수도 카쉬가르(현재의 카스 喀什)가 이슬람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20만 투르크 민족들은 일시에 무슬림이 되었다. 

10세기의 카쉬가르에는 중국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꾸란학원과 이슬람 학술문화 교육센터가 세워지는 등 이슬람 교육이 날로 발전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장 무슬림의 이슬람 교육과 후이족 교육에는 다른 점이 있다. 후이족의 교육은 경당(經堂)교육이라고 해서 주로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위구르족의 교육은 경원(經院)교육이라고 해서 꾸란학원을 중심으로 이슬람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이 학원에서는 코란뿐 아니라 수학, 화학, 의학, 지리학, 천문학, 철학, 역사학 등 세속적인 교육까지 실시하였고,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도 가르쳤다. 그 후로 카쉬가르에는 수많은 비슷한 학교들이 세워졌다. 이 학교는 세속교육과 직업학교의 기능까지 있어서 실질적으로 민족 교육의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카라한 왕조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한 뒤, 불교를 믿는 위티엔(于田) 이씨 왕조를 40년 간의 전쟁 끝에 멸망시켰고, 가오창(高昌)과 투르판(吐魯蕃)까지 지하드를 발동하였다. 그러나 가오창의 완강한 저항으로 영토확장과 정복전쟁이 실패하자, 카라한은 평화적인 교류와 상인을 통한 방법으로 전환했다. 11세기 초에는 호탄(和田)이 이슬람화 되었고 13세기에는 악수(阿克蘇),쿠차(庫車) 등지의 위구르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카쉬가르 지역에 국한되었던 이슬람은 10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사이에 타림분지 남부와 서부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1352년, 몽골 차카타이칸국의 투르크 티무얼 왕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16만 몽골인들은 모두 무슬림이 되었다. 그들은 신장에 이슬람 선교사를 파송하고 백성들을 강제로 개종시켰으며, 불교 지역에는 지하드를 벌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남신장(南疆) 중심이었던 이슬람교는 16세기에 들어서 티엔산 이북의 악수, 이리(伊犁), 하미(哈密), 투르판 등 신장 전 지역과 중앙아시아 초원 유목지대까지 확대되었다. 현재 위구르, 카자흐, 키르기즈, 우즈벡, 타타르, 타지크족 등 투르크계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경로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슬람 지도자와 왕공에 의한 정교일치의 자치(自治)왕조였던 신장은 18세기 중반부터 청나라의 직접통치를 받게 된다. 청 정부는 이 지역을 ‘신장성(新疆省)’으로 편입, 관리와 군을 배치하여 투르크계 민족을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하였다. 중화민국 시기와 공산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통치 방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 1933년 말부터 1934까지 신장의 무슬림들은 한족의 지배에 반대하여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독립 국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2) 성립을 선언하였으나 내분으로 군사력이 약해져서 6개월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이들은 반한(反漢), 반회(反回)를 외치며 이슬람 독립국 선포를 주장하였다. 1944년에도 독립운동을 시도, 이리 지역에 위구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설립을 소망하였지만, 한족과 후이족의 반대로 분리 독립에 실패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후이족 무슬림과 신장 무슬림은 같은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후이조은 오랜 기간 한족과 유교 중심의 한족 문화에 동화되면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렸지만, 신장 무슬림의 경우는 중앙아시아와 연계된 상태에서 지하드를 통해 형성된 민족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중국 안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한족화가 쉽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분리 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중국 무슬림은 강력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 공동체로서의 결집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약한 편이다. 

  

 

 

 

 

《참고자료》 
한윤숙, ‘중국의 이슬람교 발전과정과 현재 상황’, 「아시아의 무슬림 공동체」, 한국이슬람연구소, 예영커뮤니케이션, 1998. 
장경희, 중국의 이슬람 연구 : ‘카자흐 종족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무슬림 공동체」, 한국이슬람연구소, 예영커뮤니케이션, 1998. 
김호동, 「황하에서 천산까지」사계절, 1999. 
장경희, ‘중국의 이슬람 :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중심으로’, 「이스마엘 우리의 형제」55호,  한국 이슬람연구소, 2001.11.



<미주>

1) 2000년에 제5차 인구조사가 시행되었지만 아직 자료가 발표되지 않아, 근래의 소수민족 관련 자료들 모두 1990년의 인구 통계를 근거로 하고 있다.
2) 투르크 민족의 모국은 투르키스탄이다. ‘투르키스탄’이란 이름은 이란어에서 나왔다. ‘투르크 민족의 땅’ 이란 뜻의 이 말은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투르키스탄의 서부 지역은 서투르키스탄으로 알려졌으며, 그후 1965년에 러시아 제국에 점점 정복당했다. 1922년에 소련이 형성된 후 서투르키스탄은 5개의 공화국, 즉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으로  나뉘어졌다. 동부 지역은 1876년 청나라에 의해 침략을 받아 신장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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