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아내에서 선교사로
아주 평범한 목회자의 아내로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남편의 중국 선교사 헌신은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특히 홀홀 단신 남게 되는 친정 어머니를 생각할 때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인도하심을 바라며 3년에 걸쳐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숱한 날을 금식하며 우리 가정에 대한 주님의 뜻을 여쭤 보았을 때, 그분의 응답은 중국이었다. 마지못해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남독녀 외딸 하나 잘 키우겠다고 평생을 고생하며 눈물의 기도로 살아오신 연로한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했으니, 어찌 기뻐하며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응답을 받은 즉시 목회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1년 간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졌고, 많은 도전과 교훈을 얻기도 하였다. 이와 들어선 길, 올바른 선교사가 되고 싶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괴로웠지만, 중국과 중국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 선교사로 받는 훈련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주님! 기왕에 부르셨으니 제게 중국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보내던 어느 날, 인천 부두에서 선박에 올라 중국 선원들을 만나 전도지를 나누고 함께 찬양하며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배에서 내려와 서해 바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 살고 있는 불쌍한 중국 영혼들을 위해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날 이후 난 하루빨리 중국에 가고 싶었고, 마치 그곳이 내 고향인 듯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에 대한 염려도 주님께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제 중국 땅, 중국 영혼들을 짝사랑하며 사는 인생이 되었다. 선교사로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 가기까지
짝사랑에 부풀어 힘든 줄도 모르고 한 달 후의 선교사 파송을 준비하며 기다리던 그 해 11월, 갑자기 IMF라고 하는 엄청난 파도가 덮쳐왔다. 약속했던 후원금은 반으로 줄고, 정리하려고 내놓은 전셋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동안 줄곧 삼각산에서 부르짖었던 기도가 없었다면 낙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나,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강권적으로 기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셨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체험하며, 우선 남편이 먼저 중국으로 떠났다. 뒤에 남아 집을 정리하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까지의 5개월은 눈물로 보낸 시간들이었다. 남편 없이 처리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힘들어 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중국을 향한 그리움으로 어느 샌가 내 고개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서쪽 하늘의 별들이 마치 그 땅의 영혼들인 것 같아 울고 또 울었다.
이처럼 그리움에 마음이 온통 달구어진 7월 31일, 드디어 두 아이들을 데리고 씩씩하게 그 땅에 도착했다. 낯선 땅인데도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칙칙한 색깔의 옷, 덥수룩한 머리, 꾀죄죄한 얼굴들, 곳곳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들∙∙∙. 그렇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들과 빨리 말하고 싶어서, 하루라도 빨리 그분의 사랑을 말해주고 싶어서 우리는 열심히 언어를 배웠다.
점점 마음은 무디어 가는데
대낮에 어깨가 다 드러난 잠옷을 입고 다니는 아주머니, 파자마 입고 구두 신고 서류가방 들고 외출하는 아저씨, 레이스 달린 내복을 재킷 속에 받쳐입은 은행아가씨, 거리에서 저울 하나 놓고 몸무게 달아주며 20전씩 받는 할아버지, 버스 두 대를 연결한 전차, 출퇴근 시간 빽빽이 거리를 메우는 자전거 행렬, 단골로 자주 가면 오히려 바가지 씌우는 과일가게 아줌마, 길가에서 구워 파는 양꼬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며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 경험하였다. 여러 번 속고 불이익도 당하였다. 자전거 네 대를 도난 당하기도 했다. 같은 반 아이로부터 “넌 왜 남의 나라에 왔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 라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한 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우는 아이를 달래기도 했다. 일년이면 두 세 차례씩 이루어지는 조사를 피하기 위해 숨죽이며 보내고, 신분 안전을 위해 일단 문 밖을 나서면 중국인처럼 행동할 것을 수없이 아이들에게 타이른다. 집에서 매주일 서너 차례 진행되는 성경공부 때마다 가슴을 졸이고, 비밀리에 가르치는 신학생들로부터 학교 상황이 좋지 않아 당분간 모임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전화를 받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어느새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고, 중국인들에 대한 불타던 사랑은 식어져갔다. 그들에 대한 내 마음도 무디어져 가고 있었다. 너무나 지쳐 “주님! 이번 주는 좀 쉬면 안되겠습니까? 매 성경공부 팀마다 못 올 일이 생겨서 안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탄식하며 중얼거릴 때면 정말 신기하게도 학생들이 다 못 오게 되었다. 이처럼 사역 3년째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식어져 가는 나의 짝사랑에 다시 불을 지펴 주셨다.
나와 두 아이의 비자 해결을 위해 학교를 계속 다녀야 했는데, 학비를 아끼고 시간을 벌기 위해 학비도 저렴하고 비자도 해결되는 아주 작은 학교에 등록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선생님과 일대일로 수업을 하는 중,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너무 지쳐있던 터라 선생님에게 복음을 전해도 되는 단계까지의 교제를 나누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주님! 전 지금 너무 지쳤어요. 그와 사귈 힘도 없어요. 다음 기회에 할게요.”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부담을 떨쳐 버리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 도중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자기도 성경을 읽고 싶다며 혹시 중국어 성경이 있으면 빌려줄 수 있겠냐고 청해 왔다. 생각 밖의 시간에, 생각 밖의 방법으로 당신이 작정하신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교실을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가는 거리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코앞에 던져준 고기도 낚으려 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며, 두려움의 영에 눌려 용기를 잃고 믿음마저 약해져 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그분의 집요한 사랑을 다시 한번 체험하며 내 짝사랑은 다시 뜨거워졌고, 사역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이후 비자 수속 문제로 학교와 공안국을 수 차례 왔다갔다하며 무척 힘이 들었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평안하였다. “中國呀! 伱不要我嗎? 眞的不要我嗎? 可不行, 我偏偏要伱. 至 到 伱體驗主的 大愛(중국이여, 너는 나를 원하지 않는가? 정말 나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너를 원하노라. 내가 주님의 큰사랑을 경험할 때까지∙∙∙.)”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마음을 굳게 하였다.
“좋은 편을 택하였다"
일년 여 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형제 자매들의 요구로 교회를 개척하였다. 크건 작건 간에 교회를 이끌어 나가려면 필요한 것, 해야 할 일 등 쉽지 않았다. 교회 활동 경험이라곤 전혀 없던 초신자들과 함께 하나 하나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교회 개척 이후 내 성경에는 항상 사도행전이 펼쳐져 있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 바울을 비롯하여 사도들이 각 지역에 세운 초대교회를 자세히 살펴보며 본받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바울사도처럼 처음부터 가능성 있는 자들을 선택하여 설교자로 세우고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하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바울도 그러했지만, 우리 역시 언제나 이들과 있을 수 없는 자들이기에 초기부터 그들에게 교회를 이양할 생각을 하고 사역을 하였다.
남편은 지도자 훈련, 신학생 훈련 등의 사역으로 바빴기 때문에, 교회의 온갖 소소한 일들은 나의 몫이었다. 지도자들과 교회에 필요한 찬양집을 편집하고 녹음테이프를 제작하는 일들이 때로는 힘에 부치도록 힘들었다. 그러나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3년 간 기도하던 때를 돌이켜 보니, 결국 이국땅 중국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목도하며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세대 교회 지도자를 세우는 리더십이 결여된 한국교회 현실을 보며, 나그네인 우리가 언제 떠나더라도 교회가 계속적으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도자를 세우는 선교사라는 위치가 얼마나 축복된 자리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아 너무나 기쁘다.
우리 가정은 지금 한국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며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뒷산에서 쑥을 뜯어다 쑥국도 끓여 먹고 부침도 해먹으면서, 또한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틈틈이 배우고 모아두었던 찻주전자, 찻잔을 오가는 손님들에게 자랑하고 중국의 차 문화를 소개하면서 안식년의 자유로움이 주는 온갖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이 그립고 가고 싶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
이주희 | 중국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