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첫 만남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기 전, 나는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1979년 고향을 떠나 동북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기,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를 직접 만나주셨다. 그 성경책은 내가 고향을 떠나 올 때 늘 몸에 지니고 다니라며 부모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기숙사 침대 매트리스 밑에 쑤셔놓고 꺼내 보지도 않았다.
고향을 떠나 처음 맞는 성탄절, 엄동설한에다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매우 바쁘다며 막아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막10장 13~16절).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린아이’란 무슨 뜻일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는데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사람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주위에 있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단순함, 천진함을 볼 수 있다. 결코 꾸미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순수함.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태도를 배우라고 하신 것이었다. 이런 태도를 조금만 닮아도 하나님 나라의 문턱을 밟을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랑의 공동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나의 걸음마다 인도하시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셨다. 1989년 8월, 내게 독일 유학의 기회가 왔다. 그러나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상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중국의 상황은 젊은이에게 어떤 미래도 줄 수 없다네.” 그의 말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내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위병 출신인 직속상관은 오히려 나에게 ‘중국 사회에서 젊은이의 미래란 없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그의 말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유학을 위해 독일로 떠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내가 독일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도록 인도하셨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공동체를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만약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리니’라는 성경 구절을 자주 묵상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개체를 찾기는 쉽지만, 사랑의 공동체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공산주의가 범한 최대의 실수는, 계급 차별이 소멸되면 사람이 평등해지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계급이 소멸되더라도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의 위대한 모성애는 바로 ‘사랑의 개체’중 하나이다. 이는 타종교의 신앙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공동체’는 결코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형제자매의 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 말이다. 비록 실질적인 혈연관계는 없지만,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맺어진 관계는 더욱 강력하다. 어떻게 초대교회가 1~2세기라는 짧은 시간 만에 로마제국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위대한 전도자와 신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 초대 교회가 진실로 사랑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하나가 되었고, 형제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주 자연스럽게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되었다. 나로 하여금 해외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탁월함을 경험케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인생의 네 광장(廣場)
나의 인생 가운데 경험한 네 개의 광장이 있다. 그 중 세 개의 광장은 중국에서 보았던 것이다. 첫 번째는 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상하이(上海)시 중심의 런민광장(人民廣場)이었다. 당시 두 무리가 그곳에서 무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1976년, 항저우(杭州)에서 두 번째 광장을 보았다. 소년궁(少年宮)광장이었다. 아름다운 시후(西湖)주변은 수많은 인파로 넘쳤다.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때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저우은라이를 타도하자’라고 외친 것이다. 이 구호는 마치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물 한 바가지를 부은 것과 같았다. 잠시 후 사람 그림자 하나가 호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성난 군중들이 그를 붙잡아 호수로 던져 버렸던 것이다. 당시 어린 나이의 나는 이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1989년 5월, 나는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있었다. 내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회사 일로 어쩔 수 없이 간 것이었다. 독일인 몇 명의 통역을 맡아 베이징에 갔는데, 그 독일인들이 텐안먼에 가보길 원했다. 당시 텐안먼 광장은 정말 인산인해였다. 햇빛 찬란한 텐안먼은 너무 평화스러워 보였다. 많은 젊은 학생들이 평화롭게 그곳에 앉아 있었다. 희망의 기운으로 충만한 것 같아 보였지만, 내 마음 속에는 불안한 예감이 있었다. 내 인생의 세 번째 광장에서 벌어질 일 역시, 그 전에 보았던 두 차례의 사건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 자체가 바로 그래왔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생각과 상사의 충고 끝에 나는 독일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오색찬란한 베를린은 ‘자본주의의 진열장’이라 불릴 만큼 매우 화려했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 시기에 건축되었는데, 이 베를린 장벽 주변에 있는 것이 바로 ‘기념광장’이다. 이곳이 바로 내 인생의 네 번째 광장이었다. 1989년 베를린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1월 9일,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축하하였다. 수많은 동독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베를린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얼싸 안았다. 그때 나는 ‘희망과 광명’의 대로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3년도 못되어 동독과 서독 모두 더 이상 행복해하지 않았다. 1992년 그 광장에서 아주 큰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는 인류는 정말 희망이 없음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난 동독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불행하다. 통일 후 주머니 속에 있는 여권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갈 돈이 없다는 것이다.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가 일순간에 무너진 후 곧바로 자본주의가 들어서자, 우리 동독 사람들은 쉽게 적응할 수가 없다. ‘자유경쟁’ 방식의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동독 사람들에게 서독 사람과 동일한 선상에서 경쟁하라는 것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처사이다. 예언엔 적어도 신문 한 장, 커피 한 잔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요 몇 년 동안의 상황은 정말 최악이다.” 서독 사람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콜 총리의 이름은 독일어로 ‘양배추’를 의미한다. 서독 사람들은 ‘양배추’에게 사기 당했다면서, 그에게 온갖 욕을 해댔다. 통일에 아무 희생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온데 간 데 없고, 통화팽창에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 모두 마치 세상의 모든 꿈과 환상이 몽땅 사라져 버린 듯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를린 광장에서는 독일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행진이 벌어졌고, 그 속에서 양측 간의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진압을 위해 독일 경찰이 투입되자 시위는 경찰과 민중의 충돌로 변하였다.
나는 광장의 돌층계 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치 예전에 여러 차례 보아 온 중국의 ‘광장’을 옮겨다 놓은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깨달았다. 동쪽에 살든 서쪽에 살든, 중국에 있든 세계 어느 곳에 있든, 사람의 마음속에 복음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생관,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이 없으면 투쟁과 증오만 존재할 뿐 진정한 ‘유토피아’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나는 비교적 깊이 있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것 같다. 과거 독일 유학 기간 동안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은혜는 내 스스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사상이나 구호, 혹은 선인의 지혜나 경험과 같은 것은 나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나의 변화는 새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처∥‘中國知識分子與基督敎信仰’, 「中國與福音」2001년 4~6월호
번역∥이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