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 출신의 주원장
중국사에서 왕조를 창업한 군주들은 대부분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지위나 명성을 지니고 있음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명을 세운 주원장은 그렇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당을 세운 이연은 수 말 반란기에 타이위엔(太原) 유수로 있었고, 송 태조 조광윤(趙光胤)도 후주의 귀덕군(歸德郡) 절도사로 있었으며, 흔히 농민 출신의 창업 군주로 익히 알려진 한 고조 유방도 실은 사수(泗水)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당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지위, 명망, 경제적인 부 등과는 전혀 거리가 먼 빈농 출신으로서 제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은 특이하게 주원장 뿐이다. 더욱이 당시 정복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는 것까지를 고려한다면 주원장의 명 왕조 창건은 중국 역사상 실로 드문 예이다.
명 태조 주원장(1328~1398, 재위 1368~1398)은 1328년 9월 안후이(安徽)성 호주(濠州: 현 鳳陽)의 가난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세진, 어머니 진씨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로, 세 명의 형님과 두 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 대부터 소작농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나 생계를 위해 이리 저리 찾아 나서는 유랑민에 가까웠다. 아버지 대에 호주 종리(鍾離)현 고장(孤莊)이라는 마을에 이사하여 주원장은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빈농 출신의 주원장은 일찍부터 지주 집에서 소치기, 양몰이 등의 일을 하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원(元)말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회하(淮河)유역 일대가 한발과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큰 고통을 겪은 데다가 전염병마저 크게 번져 굶주림과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당시 유해하던 전염병으로 그의 부모와 형들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 상을 당하였으나 관 하나 장만할 수 없어 시신을 거적에 말아 장사지낼 정도로 가난하였다고 한다.
황각사 걸식승이 되다
부모 형제를 잃은 후, 그는 생계 유지를 위하여 17세에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간다. 어린 중 겸 하인으로 그 절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도 식량이 부족하여 곧 탁발승(托鉢僧)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거지 중이었다. 약 3년 간 양식을 구걸하며 회서(淮西) ∙하남(河南) 일대 여기 저기를 편력하였다.
당시 중국은 원의 이민족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반란의 중심은 백련교(白蓮敎)라는 비밀 결사였다. 백련교의 기원은 대체로 남송대의 승려 모자원(茅子元)에 의해 제창되어진 염불의 결사인 백련종(白蓮宗)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민간 종교는 아미타정토의 신앙을 중신으로 한 것으로, 살생과 술과 육식을 금하고 평소 염불에 힘쓰며 깨끗이 행동할 것을 가르치는 정토종의 일파이다. 이 정토종이 시대를 거치는 동안, 현세부정이 강한 미륵신앙과 페르시아의 마니교(明敎)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미륵하생 명왕출세(彌勒下生 明王出世 : 미륵불이 하생하고 명왕이 출현하여 민중을 구제한다)를 중심으로 한 백련교로 발전하여 14세기 전반 크게 흥왕하였다.
주원장이 탁발승으로 돌아다니던 회서∙하남 지방은 백련교도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으므로, 그는 이 지역을 편력함으로써 세상의 움직임을 잘 인식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이 방랑여행으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획득하게 되었고, 인간적으로도 크게 성숙되는 기회가 되었다.
탁발승 생활을 마치고 황각사로 되돌아온 지 3년이 지난 후, 그동안 뒤숭숭하던 백련교의 반란이 일시에 불을 뿜었다. 1351년, 반란에 앞장 선 하남의 백련교 교주 한산동이 처혀된 후 유복퉁, 두존도 등이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와 함께 안후이성 영주에서 봉기하자, 이것을 계기로 각처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동지를 표시하였기 때문에 '홍건군(紅巾軍)' 이라 불리었다. 이들의 봉기는 이민족 지배에 커다란 쐐기를 박게 되었고 주원장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곽자홍 부대에 들어가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절에 돌아온 그는 1352년 전란의 영향이 황각사에까지 미쳐오자, 전란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불상 앞서 점을 친 후 부근에 있는 홍건군 곽자홍 부대에 참가하였다. 곽자홍 부대에 들어간 그는 차차 두각을 나타내어 십부장이란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곽자홍의 신임을 얻은 주원장은 자신의 부대를 소유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곽자홍은 지략이 있는 주원장이 마음에 들어 데리고 있던 양녀 마씨와 결혼시켰는데, 이 여성이 바로 평생 태조 주원장을 내조한 마황후(馬皇后)이다.
원군과 싸워 상당한 희생을 치른 곽자홍이 군 조직의 재편을 서두르고 있을 때, 주원장은 급히 향리에 돌아가 동향의 청년들을 모아 700여 명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군단이야말로 훗날 명 제국 건설의 중핵으로, 특히 서달, 탕화 등 24인은 주원장의 수족으로 활동하면서 명조를 창업한 개국공신들이다.
이후 주원장은 농촌의 무장자위단 내지 지방에 할거하는 토호세력들의 의병(민병) 집단들을 회유하고 혹은 항복시켜 자신의 군단으로 편입시켰다. 곽자홍 부대는 주원장의 활동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던 중 화주(和州: 현 安徽省 和縣)에서 두목 곽자홍이 죽자 주원장은 곧바로 곽자홍군을 장악하여 명실공히 홍건군의 총수가 되었다.
주원장은 부대를 더욱 강화하고 풍부한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강남지방으로 진출하였다. 그는 먼저 양자강을 건너 강남의 거점인 남경(응천부)을 공략하였다. 1356년, 도강에 성공한 그는 남경을 함락시키고 그곳을 근거지로 강남행성중서성을 설치하는 등 정치 ∙군사 ∙사법 기구를 설치하여 지배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남경을 점령한 후, 그에게 더욱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홍건군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버리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중국적 지배자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남경 점령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휘하에 다수의 지주와 지식인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도안 ∙유기 ∙송렴 등 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주원장은 홍건군을 버리고 전통적인 유교주의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 점이 바로 주원장이 다른 군웅과 크게 다른 점이다. 주원장이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지주 ∙지식인과의 제휴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원말 동란기, 기존 권위를 보장해 주는 강력한 세력을 물색하고 있었던 지주 ∙지식인들은, 유구적(流寇的)이고 파괴적인 군웅 체제를 탈피하고 유교주의를 바탕으로 향촌질서를 보존하려는 주원장 세력을 만나게 되자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주원장 역시 그들을 이용하여 신 질서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등 이른바 양자 이해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주원장에 의한 명 왕조의 창설은 바로 이러한 지주 ∙지식인의 협력에 기초한 것이었다.
황제로 즉위하다
주원장은 지주 ∙지식인들의 협력을 받아 착실히 그 세력을 확대하여 갔다. 그는 농민 반란군으로서의 색체를 불식하고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정치집단화 하면서 강남에서 세력을 강화해 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주원장은 원조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적 관계를 가지면서 정면 충돌을 회피하는 반면, 호북 ∙강서에 세력을 피하고 있던 진우량, 소주를 본거지로 하고 있던 장사성의 세력을 최대의 상대로서 삼으면서, 동서 양쪽의 두 강대한 세력에 대하여 각개 격파의 전술로 나갔다. 먼저 1363년 파양호(鄱陽湖) 전투에서 진우량의 군대와 싸워 격파하고 그 영토를 병합하였다. 1367년에는 소주 지방의 막대한 재력을 기반으로 완강히 저항하고 있던 장사성의 군대를 격파하여 그의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강남의 곡창지대가 모두 주원장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제 원조 타도만이 남았는데, 이를 위하여 주원장은 대장군 서달에 대군을 주어 북벌에 나서도록 하였다.
남경을 중심으로 주변 영역을 차지한 주원장은 1368년 정월 초나흘, 남교(南郊)에 나아가 천지 신에게 제사한 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국호를 명(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고, 그 이튿날 명 왕조의 수립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제위에 오른 태조는 동시에 선조들을 추존하고 마씨를 황후로 세우고 장자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선장, 서달을 좌우 승상으로 삼음과 동시에 각 공신들에게 작위를 주어 왕조로서의 격식을 갖추어 황제의 권위를 보였다.
명의 정치 및 사회체제 확립
황제의 자리에 오른 태조 주원장 앞에는 천하 평정 사업보다도 오히려 더 어려운 사업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것은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는 일과 제국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그의 남은 반평생을 모두 이 사업의 완수를 위해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먼저 몽고의 풍습, 습관, 언어를 폐지하고 한족의 전통을 회복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신제국의 경제기초인 농촌 부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사민 개간정책을 실시하고 농업 생산력의 증강에 힘을 기울여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으로는 나라의 재정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토지 측량과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토지 측량은 즉위 이후 각 지방별로 추진되어 거의 대부분의 지방에서 상세한 토지 대장이 작성되었으며, 이 대장에 그려진 토지 모양이 마치 고기 바늘을 닮았다고 해서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고 한다.
또 즉위한 지 3년 경부터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1381년에 전국에 걸쳐 호적 및 조세대장인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작성하였다. 나아가 부역황책에 바탕을 두고 110호를 기본으로 한 이갑제를 실시하여 촌락자치제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태조는 그것을 통하여 최 말단의 농민까지 원활히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실현하였다.
명 태조는 정치면에서 개혁을 단행하여 중서성을 폐지하고 그 밑에 있던 6부를 독립시켜 황제 직속으로 두었다. 지방에 있던 행성을 폐지하고 행정 ∙군사 ∙감찰 등을 각각 담당하는 기구를 두어 관료의 권한을 분산시켜 놓았다. 일련의 개혁은 황제 독재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황제 독재체제는 명대뿐만 아니라 청대까지 계승되었다.
명 태조의 독재적 체제는 1380년 '호유용의 옥'을 계기로 확립되었다. '호유용의 옥'은 당시 중서성의 장관 호유용이 황제에 대한 모반을 기도했다고 하여 그를 주살한 사건이다. 과연 그러한 모반 계획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미스테리에 속하고 있으나, 당시 이 사건으로 약 1만 5천명이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이 사건이 지난 10년 후 개국공신 이선장과 희생되었다. 국가의 원혼으로, 모반을 알면서도 폭로하지 않고 망설임으로써 두 마음을 품었다는 대역무도의 죄가 적용되어 자결 명령을 받았으며, 일족 70명이 사형 당하고 1만여 명이 연좌되었다.
3년 후인 1393년에는 '남옥의 옥'이 발생하여 세 번째 피의 숙청이 있었다. 큰 공을 세운 장군 남옥 역시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즉석에서 주살 당하였는데 연루된 자가 2만을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옥사 사건은 태조가 개혁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이라 전해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5만여 명이나 되는 공신, 고관이 죽임을 당하는 광기 어린 대숙청이 잇달았다.
당시 관리들은 이와 같은 숙청의 폭풍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지내었다. 매일 입궐할 때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깨끗이 씻고 처자와 함께 물을 나누어 마신 다음 집을 나섰으며, 다행히 살아서 집에 돌아오면, "오늘 하루도 살아 남았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온 집안 식구들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희생당한 것은 공신들만이 아니었다. 학자나 지식인에게까지 탄압의 손이 뻗쳤다. '문자(文字)의 옥' 이 바로 그것이다. 문자의 옥이라 해서 시황제처럼 어떤 일정한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황제 개인이 싫어하는 어떤 종류의 문자를 사용한 자가 희생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도(盜)'라는 문자는 과거 자신이 홍건적 출신임을 폭로하는 것이라 하여 꺼리는 문자였다. 또한 '승(僧)'과 같은 음인 '생(生)' , '적(賊)'과 같은 음인 '칙(則)' , 그리고 광(光), 독(禿: 대머리 독)과 같은 문자 등은 금기였다. 과거 머리를 빡빡 깎고 걸식승으로 있었던 때의 일을 연상시키는 문자이기 때문이다. 항주 부학의 선생인 서일기가 쓴 문장 가운데 "광천지하(光天之下), 하늘은 성인을 낳으시어(生) 이 세상을 위해 칙(則)을 만드셨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光', '生', '則'이 들어 있다하여 주살당하였다. 이른바 태조의 문자의 옥이 일어난 것이다.
태조의 가공할만한 공포정치는 황제 독재권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공신과 관료와 학자들이 처형당하고 황후와 황태자도 먼저 죽었기에 태조는 말년을 외롭게 지내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는 부인 마황후와 함께 남경의 효릉(孝陵)에 잠들고 있다. 명 효릉은 명의 역대 황제 묘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당시 총 100㎢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로는 명 태조 장례 때 13개 성문으로 나온 관이 진짜 관인지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있으며 심지어는 13개의 관이 모두 가짜로 태조의 시신은 남경 명 고궁의 지하에 묻혀 있다는 설까지 나돌고 있을 정도이다.
성현 ․ 호걸 ․ 도적으로의 평가
청대의 역사가 조익(趙翼)은 주원장에 대하여 "한 사람으로서 성현(聖賢) ∙호걸(豪傑) ∙도적(盜賊)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하였다. 실제 그는 일면으로는 여러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유교사상과 덕치주의에 바탕을 두고 농민을 보호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편 황제로 평가된다. 한편 신하에 대하여는 시의심(猜疑心)이 많아 대량의 신하들을 처형한 공포정치의 지배자로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포의 출신에서 일대에 황제로까지 즉위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인물이고 보면 그의 성격 또한 다양하게 표출되었을 것은 당연하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면은 그의 초상화가 잘 나타내주고 있다. 주원장은 용모가 기괴하고 얼굴이 추몰이었다고 한다. 그는 만년이되어 많은 화가들을 모아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모든 화공들이 한결같이 실물에 충실하게 그렸던 탓인지 한 장도 마으메 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재치 있는 한 화공이 실물과 전혀 다르게 자애가 깃든 초상화를 그려서 바쳤더니, 그는 대뜸 마음에 들어 여러 장 복사하여 왕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초상화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두 종류의 초상화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하나는 '역대제후도'에 보이는 초상으로서, 위엄과 자애가 가득 차 있고 기품이 넘치는 그야말로 황제다운 용모로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실물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다른 하나는 기괴하다고 할까 추악하다고 할까, 어지간해서는 존경 할 수 없는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부리부리하고 힐끗 치켜 올라간 눈, 주먹 코, 앞으로 툭 튀어나온 턱, 거기에 온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 있어 심약한 아이라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상이다.
주원장은 그 우락부락한 용모 때문에 남들에게 인정을 받은 적이 수 차례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못생기고 괴상한 인상을 한 그림이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훗날 공신들에게 행한 잔학상이나 지독한 시의심 등도 이 초상화에 잘 타나나 있다. 역대 보기 드문 영웅, 명 태조 주원장이 지닌 여러 측면을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