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 형제는(45) 모 의과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남방의 어느 도시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이다. 이 글은 2001년 8월 4일 쉬 형제와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까지
원래 할머니가 기독교인이었다. 할머니는 평생 선하게 살아오셨지만,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할머니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지만, 그 신앙과 교리는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기독교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질문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훌륭한 성품과 내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기대는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5년 전, 나는 심각한 간(肝) 질환을 고치기 위해 기공(氣功)을 시작했다. 기공 수련 단체에 들어가 유명한 사범으로부터 수련을 받았지만 병은 낫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중의, 양의 할 것 없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의학의 힘에 실망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나의 병은 치유되었다. 과연 기독교의 능력은 기공보다 훨씬 강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능력이 기공 사범의 능력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순간이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의 비밀을 지적해 내는 것도 보았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사람이 몰래 행한 일까지 다 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과정을 통해 무신론자였던 나는 유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나의 상식으로 죄는 나쁜 짓을 하고 법을 어기는 것인데, 나는 결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었고 평균 도덕수준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죄인이 아니라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성경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기독교를 믿게 되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과 올무를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이처럼 부도덕한 사회에서 과연 ‘성경’의 요구대로 살 수 있을까?’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내 양심 속의 죄들이 조모조목 떠올랐다. 이렇게 많은 죄를 짓고 살아온 나 자신이 너무 추하게 느껴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만약 나의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면 나는 정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나의 죄를 깨달은 그 날부터 3일 내내 울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위해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마음 속에 전에 없던 정직한 힘이 나로 하여금 ‘의를 위하여 깨끗이 죽을지언정, 죄와 불의와 타협하며 대충 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가게 하였다. 이 사건은 나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성경 해석의 오류
예수님을 믿고 처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무도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대문에 어려움에 처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는 말씀을 오해하여, 기도를 많이 하면서 성령의 직접적이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구(字句)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상상하면서 아무 근거도 없이 억지로 해석하곤 했다. 실제로는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영적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 1절~11절에 기록된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항아리는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의 일꾼을 말하며 항아리의 구멍이 하늘로 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해 입을 벌려야 함을 말한다. 물을 부은 것은 성령 충만을 나타낸다.∙∙∙” 아주 그럴 듯해 보이지 않는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을 했고, 나 역시 그 부류에 속했다.
사실 성경 해석상의 오류는 가장 큰 오류이자 모든 오류의 시발점이 된다. 한 번은 H파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가장 영적이라 여기면서 다른 교회는 모두 유치하고 자기 교회만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들 나름대로의 성경해석 체계를 만들어 의견을 달리하는 다른 사람의 견해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의적 성경해석은 모순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관적인 영적인 느낌이 좋으냐 나쁘냐로 진리의 열매를 평가했다.
감각에 의존한 하나님의 음성듣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해서 나도 여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예를 들어 모 형제가 지금 집에 있다는 음성이 들려서 확인해 보면 과연 그가 집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때도 많았다. 문제는 이런 개인의 영적 경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음성이 실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진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라고 볼 수는 없다.
어떤 형제는, 지금 누군가 그를 잡으러 오니 빨리 산으로 도망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다시 그 음성은 그에게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음성인지 분별하기 위해 물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믿는가?’ 그 음성이 ‘믿는다’ 고 대답하자 그는 곧바로 절벽 밑으로 뛰어내려 큰 부상을 입었다. 실제로는 아무도 그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 또 어떤 자매는 결혼을 놓고 잠시 기도하더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가, 이내 또 번복하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혼란에 빠졌다. 어떤 지도자는 설교 전에 기도를 하다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감각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잘못을 범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기도만 하면 반드시 병이 낫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모든 병이 기도로 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본분이고 치료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무엇일까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성령의 역사는 나를 진리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또 사역자들을 통해 당신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부터 6~7년 전쯤 내가 사는 도시에 외국에서 한 자매가 왔다. 연세가 아주 많은 분이었는데, 나는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에 감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그분의 성경 강해는 정말 탁월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령의 인도하심도 없고 영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성경 강해는 매우 신중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충분한 검증을 거친 내용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시간에 참석하면서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 객관적 증거 등을 중요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나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편견들을 발견하면서, 더 이상 잘 모르는 부분을 억지로 짜 맞추어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의 감정대로 해석한다면 그 내용은 수시로 변할 것이고, 결국 저마다 다른 해석은 대립과 모순을 낳아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결국 진리의 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를 오해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을 성령의 역사라고 판단하는 근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평안과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성령의 역사라면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사단도 평안과 기쁨을 흉내낼 수 있다.
참된 성령충만의 결과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진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다른 성도들도 이 길을 가도록 인도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죄인들을 불쌍이 여기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태도이다. 감동적인 설교, 기적과 방언, 안수 등 은사와 능력은 그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았는지는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 얼마인지, 그리스도의 성품과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만큼 성경적이며, 실제 생활 속에 간증과 열매가 있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방언에 대한 견해
방언과 거듭남은 관계가 없다. 방언은 지극히 작은 은사의 하나일 뿐이다.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또 부정해서도 안된다. 나 역시 초신자 때는 방언 같은 것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 경험과 증거들을 통해 믿게 되었다. 일자무식 노인들이 기도 중에 영어나 러시아어 등을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본 지식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시며 경외할 만한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언을 매우 사모하며 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방언을 주시지 않았기에 언제부턴가는 더 이상 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철저히 내 죄를 회개하며 기도했을 때 갑자기 방언이 열렸다. 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있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온화하고 평안하여 주님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때때로 나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큰 시험이 닥칠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 이겨낼 힘이 솟아난다. 영혼이 갈급할 때 역시 방언기도로 새 힘을 얻곤 한다.
직업과 신앙의 조화
나는 병원에 근무하면서 절대 뇌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환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찰을 한다. 이런 나를 소심하다느니, 바보 같다느니 하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신앙인으로서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의료사고의 위험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늘 환자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으로 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이런 스트레스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의학적으로 더욱 전문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 늘 배우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어떻든지 간에 의사로서 하루 하루를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생활하고, 직업상으로도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발전을 이루고 싶다.
진리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
원래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옛날에 신경쇠약을 앓은 적도 있어서 정서가 불안하고 우울증 증세도 있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셨다는 것이다. 성격 역시 예전보다 밝고 쾌활해졌다.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내 탓으로 여기며 자책하고 실망에 빠졌다. 그러다가 주위 형제 자매들의 권면과 도움으로 내가 내 자신을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나는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 저의 모든 말과 행동이 진리 안에 있습니까? 제가 진리 안에만 거하게 해주시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지금 내 마음은 만족과 기쁨, 평안으로 가득하다.
출처 | www.21sz.org
번역 |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