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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20  통권 72호  필자 : 정은주  |  조회 : 1457   프린트   이메일 
[선교사의 삶과 사역]
부인선교사들의 눈물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부인선교사들이 모인 곳을 찾아간 나는 그곳에서 사역 중에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늦은 오후 텃밭에서 캐온 감자와 옥수수를 솥에 삶아 먹으면서, 그 분들은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현장 사역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마련한 부인선교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고 싶어요∙∙∙.” 한참 머뭇거리더니 “이렇게라도 이야기해야 살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시울은 이미 젖어 있었다. “이곳 사역을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10년 간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마음 속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조차 제 마음을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 속을 털어놓으면 선교사의 아내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까봐 함부로 입을 열 수조차 없었습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괴로운 일이 많아 남편에게 하소연해보았지만 남편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제 말을 들어주는 것만 해도 저는 날아갈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선교지에선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별로 없잖아요.” 그동안 가슴에 쌓여있던 속상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분이 옥수수를 먹다가 “아니, 사모님도 그래요? 저도 그래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저는요, 하루종일 혼자 있다가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일단 ‘충성’하며 손을 들어 거수경례를 해요. 그런 후 어린아이처럼 남편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심지어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을 열어 놓게 하고 계속 이야기를 해대요. 이런 제 말을 한참 듣고 난 남편은 “결론만 말해.”라고 짧게 덧붙이고는 침대로 가서 쓰러져요.” “홀로 집에 있는 것이 너무도 외로워서 수신자 부담으로 한국에 계신 어머니와 40분씩 통화하기도 했어요.”선교지의 환경이 너무 낯설다보니 마음놓고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외로움을 이겨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최근에 들어온 막내 격인 0선교사의 아내가 중국차를 마시다 말고, “남편과 함께 사역지에 처음 왔을 때 임신한 상태여서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때는 중국어도 못했기에 남편 외에는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 친정 어머니가 많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임신우울증이 찾아 왔어요. 감정의 기복이 심한데다가, 먹고 싶은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없어서 매일 한 번씩은 울었는데∙∙∙.” 하고 말하니, 감자를 먹고 있던 선교사의 아내들은 함께 목이 메어 눈시울을 적셨다. “고등어가 먹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했어요. 정말 고등어가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때 제가 살던 곳은 생선 값이 좀 비싼 곳이었어요.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여보, 고등어 사왔어요?”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분명히 시장에 고등어가 나와 있는데도 “오늘 고등어가 시장에 없어서 못 샀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다른 사모님이 사다 주셨어요. 그땐 정말 남편이 너무 야속했는데, 알고 보니 사역상 경제적 여건이 너무 어려워 사올 수 없었던 거였어요.∙∙∙”

그 때 워낙 말이 없기로 알려진 부인선교사가 말문을 열었다. “저는 아이 때문에 남편과 의견충돌이 있었고 다투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한겨울에도 갓난아기들을 기저귀 없이 엉덩이를 다 내어놓고 키웁니다. 그래도 저는 제 아이에게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더라구요. 아이가 추위로 감기에 시달릴 것이 염려되어 한국 분유를 사다가 먹이고, 귀한 종이 기저귀를 사서 사용하곤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여기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도 다 잘 사는데, 우리도 이제는 한국식을 버리고 여기 사람들처럼 살아야 해” 라며 명령조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남편으로 인해 너무 힘들었어요. 남편은 언제나 제게 돈을 절약하라고 했지만 절약할 형편도 못 되었어요. 아이에게 써야 할 최소한의 경비를 써야만 했고, 들어가야 할 경비는 언제나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니 이제는 가장 경제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이제는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장 싸게 물건을 구입하는 시간대와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선교사는 이렇게 말을 꺼내 놓았다. “남편이 장기간 사역지에 나가 있으면 참 외롭더라구요. 그래서 동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열심히 하면 상을 주겠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모두들 열심히 참석하여 공부했습니다. 상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물건을 사려고 시장에 가려고 했는데 돈이 없더군요. 그래서 딸아이에게 “네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물건들을 가져오라” 고 했더니 시계와 망원경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찾아서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선물로 포장해서 동네 아이들에게 상품으로 주었더니 너무도 좋아했어요. 그러나 때로 우리 아이들이 “아빠가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 돌아오실까?” 하며 울먹일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리며
이렇게 말문이 터지자 옆에서 잠잠히 듣고만 있었던 한 부인선교사가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난 5년 동안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했어요.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약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약을 중단하려고 시도를 해봤는데 그 때마다 금단현상이 일어나 계속 복용하고 있습니다. 5년넘게 이런 약을 복용하다보니 이제는 기억력이 약해져서 꼭 메모를 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런 아픔이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중국 깊숙한 곳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가 이야기했다. “제가 사는 곳은 석회질이 아주 많은 지역이라 척추가 굳어지는 풍토병으로 한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신 덕분에 거의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하도 긴장된 생활을 하다보니, 목 디스크에 간, 위장도 좋지 않습니다. 선교지에 와서 건강이 나빠져 저 혼자 한국에 들어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남편 없이 대수술을 하고 15일 동안이나 병원에 있는데,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남편은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이기에 병실에 한번도 찾아오지 않느냐?”라고 묻더군요.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선교지에 홀로 남아 있는 남편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잠시 내 모습이 비참하기까지 했습니다.” 평소에 얌전하고 말이 없던 부인선교사들은 자기만 겪는 아픔인 줄 알았는데, 다른 선교사들도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음을 보면서 강한 동질감을 느끼는 듯 계속 말들을 이어갔다.

이러한 이야기는 밤 새워 들어도 끝없이 계속될 내용이었다. 부인선교사들은 그 동안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쏟아 놓았다. “한번은 아이들이 보낸 메일에 ‘선교’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외국인의 문서와 인터넷을 검열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아이들에게 절대로 기독교용어를 쓰지 말도록 타일렀고, 저희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약속해서 암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쓰레기통에 갖다버리는 것들도 신경을 씁니다.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즉시 치워지곤 하는데, 그만큼 이곳의 감시가 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피살되는 소식을 수시로 듣게 되는데, 남편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불안해지면서 별별 생각이 다 납니다.

무엇보다도 늘 말을 조심해야 하지만 조금만 긴장이 풀려도 말을 실수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활로 인해 예민해지는 저를 지켜보는 남편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걱정을 끼칠까봐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면 “물어보지 말랬지? 당신이 내 말을 들으면 걱정하는 것을 내가 알잖아.”라고 말합니다.”이와 같이 안전 문제로 염려하는 부인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건강의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안전의 문제로 인한 마음의 고생이 장기화되면서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자로 부름 받은 부인선교사들
부인선교사로 살아가며 겪어야 했던 이국 땅에서의 문화충격은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동참하고 눈시울을 적셔야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선교사로, 아내로, 엄마로, 가정주부로 살면서 말 못하는 선교지의 외로운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를 오랫동안 듣고 있던 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을 맺었다.”어제, 피우던 담배를 끊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한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 비로소 ‘내가 헛된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참 보람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만큼 힘든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듣던 한 선교사도 “그래요, 저도 이곳에 오면서 순교하는 것을 생각하고 왔는데, 순교에 비하면 제가 하는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라며 밝게 웃었다.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남편은 ‘순교가 없는 선교는 허구다.’라고 말하더라구요. 처음에는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는데, 순교자가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우리가 겪는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그랬더니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린 선교사의 아내가 “고국을 떠날 때, 그리고 가족과 헤어질 때 우린 이미 순교자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남편을 위해서도 죽는 자가 되어야만 해요. 가장 귀한 선교는 순교잖아요∙∙∙!”

조금 전까지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이야기했던 한 선교사는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맞아요, 사모님! 맞아요” 라고 하였다. 여기저기서 함께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한 사람이 “그럼 우리가 산 순교자들이네요. 고통을 이기며 선교하고 있으니∙∙∙” 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선교사로 파송 받고 떠나올 때 들으며 콧날 찡했던 찬양가사가 생각나네요.”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모였던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어려움과 아픔이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겠다는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둘러앉은 사람들은 고생과 수고로운 짐을 나누는 것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복음 전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재정리하고 있다.


※ 이 글은 모퉁이돌선교회가 발간하는 「카타콤소식」, 2001년 9월호에 실린 “선교사 아내들의 아픔”을 모퉁이돌선교회의 허락을 받고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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