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선교적 공동체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이다. 선교적 공동체라는 말은 단지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는 기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는 선교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요하네스 블로우(Johannes Blauw)라는 네덜란드의 선교학자는 “세상에 보냄을 받지 않는 교회는 없다”는 표현을 쓴다. 교회 공동체 전체가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으며 우리 모두가 선교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신약의 초대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영웅적 선교사를 배출했던 교회라는 말이 아니라, 초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선교 마인드로 살아가는 교회였다는 뜻이다. 초대 교회는 대표적인 영웅 및 사람이 나서서 선교하던 교회가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이 선교사로 살아가던 교회였다.
최근 한국 교회는 선교의 강한 위기를 느끼고 있다. 그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선교의 모든 것을 파송 받은 선교사에게만 맡기려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현대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권하면 뭐라고 대답하는가? “목사님은 왜 있고, 전도사는 왜 있습니까? 전도하라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한다.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선교사는 왜 있습니까? 선교를 위해 있지 않습니까?”하면서 한국 교회는 선교를 선교사 몇 사람에게 모두 맡기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선교의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편하게 지내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 몇 사람에게 선교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선교는 몇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선교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모두가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선교가 아니면 그것은 주님의 선교가 아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그에게 “선교지에 뼈를 묻고 오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요청하려면 우리도 이곳에서 뼈를 묻는 정신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선교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뼈를 묻고 오라”고 권하면서 우리는 이곳에서 편하게 지낸다면 그러한 선교는 이미 죽은 것이다.
아프리카 선교의 불을 당겼던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자신의 심장을 묻은 사람이었다. 그는 1841년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이후 1873년까지 32년 동안 아프리카와 함께 숨을 쉬면서 아프리카의 검은 영혼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다. 1873년 5월 1일 이른 아침, 리빙스톤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이 그의 침실에 들렀을 때 선교사 리빙스톤이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숨져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죽자 그를 사랑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아프리카 므푼두 나무 밑에 묻고, 시체는 아프리카 뜨거운 햇볕 아래 말려서 미이라로 만들어 2,400㎞가 넘는 긴 여정을 통해 해안까지 운반하여 영국으로 옮겨 국장(国葬)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리빙스톤은 떠났지만 지금도 그의 심장은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선가 뛰고 있는 것이다. 파송 받은 선교사에게 우리가 선교지에서 뼈를 묻으라고 권하려면 우리도 이곳에서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과 10절에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던 사도 바울의 짧은 고백이 담겨 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가는 선교사’ 혹은 ‘보내는 선교사’로서 우리 모두가 어떻게 선교해야 할지를 배우게 된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바울의 선교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선교는 작은 자의 사역이다.
우선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중 가장 감격스러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 고백을 너무 좋아한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여기 ‘가장 작다’는 말의 헬라원어 ‘엘라크리스토스’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하는 ‘미크로스’의 최상급이다. 즉, 존재가 의심스러울 만큼 작다는 말이다.
주님의 선교는 크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자의 손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왜 주님께서는 작은 자의 손을 통해 선교하시는가? 작은 자의 손을 통해서만 주님의 위대하심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작을수록 주님은 세상 가운데 크신 주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자가 일하는 나라이다. 선교는 작아질 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쌀이 있고, 의복이 있고, 돈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 선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 북한선교는 이미 잘못 시작된 것이다.
큰 자가 세우는 나라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다. 자신의 왕국일 뿐이다. 주님은 작은 자에게 당신의 나라를 세우도록 허락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5). 여기의 “어린아이처럼 받든다”는 말은 선교의 참된 정신을 보여준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드는 사역”이다. 자신이 크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받들 수 없는 나라이다.
감당치 못할 자의 선교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5장 9절을 보면 바울이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에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는데도 사도의 사명을 받은 사실이 너무 놀랍고 황송해서 ‘감당치 못하겠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 ‘감당하다’라는 말의 헬라어 ‘이카노스’는 직역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바울의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바울은 사실 복음 전하는 일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반대하고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 아니었는가?
우리가 선교사가 되려면 명심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선교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 선교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그 일에 어울려서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일에 적합하지 않다. 얼굴이 인자하게 생겼는가? 아니면 능력이 탁월한가? 마음씨가 좋은가? 우리가 사실 언제부터 복음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언제부터 선교사였는가? 처음에 사람들이 우리를 선교사로 불러주었을 때 우리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호칭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이제는 관록이 붙어 사람들이 우리를 선교사로 불러주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섭섭해하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고생하면서 살아도 언제나 기쁨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후원 교회가 그 고생을 몰라주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선교비가 적어도 늘 감격스러웠는데 이제는 선교비가 충분치 않다고 불평하고 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난 것만도 감사한데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없다고 짜증내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처음에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던 감격이 식어가고 있다. 선교사는 언제나 부르심을 받았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원을 처음 받았을 때의 감격과 선교사로 가라고 주님이 처음 불러주셨을 때 어쩔 줄 몰라했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음이 높아지려고 할 때마다 “나는 원래 선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하면서 겸손한 마음이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이 선교에 성공했던 비결은 그의 탁월했던 능력이 아니라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는 선교 정신 때문이다.
오직 은혜로만 하는 선교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냥 선교사가 아니라 진정한 선교사가 되는 결정적인 고백을 남기고 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은혜지상주의로 살았던 사람이다. 바울의 선교는 주님의 은혜로만 되는 선교였다. 최근 한국 교회 선교의 또 다른 위기는 선교를 ‘돈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선교학을 공부할 때 한 저명한 외국 선교 지도자가 특강을 하면서 “한국 교회는 세계선교의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Money works! (돈이 모든 것을 말합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그런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그 지도자의 정신상태에 대해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죽하면 그런 표현을 썼겠는가? 한국 교회가 선교하는 것을 보면 돈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있게 하였고, 일하게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은혜의 위력에 대해 바울은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쓴다. “헛되지 않다”는 말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은혜의 그물을 던지면 반드시 누군가가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선교는 은혜의 포로된 사람들이 그 은혜의 깊이를 증거하는 사역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를 양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 이제는 좀 중단해야 한다. 선교사가 8천 명이면 어떻고,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보낸 나라이면 무엇하겠는가? 우리의 선교는 주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보고할 날을 생각하며 선교해야 한다. 선교사가 때로는 선교지에서 가장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교지에 파송을 받아 갔지만, 혹시 여전히 세상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선교사를 가장 정확하게 평가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세상은 우리를 오해하기 십상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사를 순수한 시각으로 보는 것도 많이 사라졌다.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를 선교사로 보내신 주님뿐이다. 그 분만이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정확하게 도우실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내게 맡겨주신 모든 사역을 잘 마치고 그 분 앞에 하루속히 서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방동섭/ 천안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