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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20  통권 71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3540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환관파와 유생과의 대립
-당고의 화-

중국의 전제정치는 언제나 측근정치가 뒤따랐다. 그 측근정치의 주역은 외척과 환관이었으며, 특히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외척과 환관의 발호가 심하였다. 환관(宦官)이란 거세된 남자로서 궁중에서 일을 돌보거나 유력자 밑에서 사역되던 자들이다. 엄관, 중관, 환자, 화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환관은 주나라 때부터 청 말까지 존속하였으나 중국 고유의 전유물은 아니다. 고대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그리스 ∙ 로마 ∙ 인도 ∙ 이슬람 국가에도 있었고, 성경(마 19: 12, 대상 28: 1~2)에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 때 중국의 환관제도가 들어와 조선시대로 이어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내시(内侍)라 하였다. 그러나 특히 중국의 환관이 가장 유명하다.

후한(後汉)은 중국 역사상 환관의 발호가 심하던 시기 중의 하나이다. 10세에 제위에 오른 후한 4대화제(和帝, 88~105)는 장성하자 그동안 세력을 펴고 있던 외척을 제거하기 위하여 측근의 환관들을 의지하였고, 환제(桓帝, 146~167)도 외척 양씨 세력을 일축하기 위하여 환관의 힘을 빌었다. 외척과 환관의 세력이 대립된 상황에서 황제는 외척을 배격하는 데 측근 환관을 이용하였으니, 이것이 환관 세력을 강하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이후 후한은 최대의 환관 전횡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궁정의 황후와 궁녀들을 돌보기 위해 마련된 환관은 황제의 측근에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일족을 관리로 등용하고 관료 ∙ 호족과 결탁하여 중앙과 지방에 세력을 폈다. 당시의 수도 낙양(洛阳)에 있던 태학(국립대학)의 학생들은 학업을 마친 후 관직에 임명되었는데, 대체로 환관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 환관의 연고나 뇌물이 없는 한 정상적으로 관료가 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을 자행하고 토색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혔다.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자유로이 조종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서 청렴한 관료와 지식인들은 비판과 저항을 계속하면서 환관 타도를 부르짖었다. 이에 대하여 환관파들은 도리어 당을 지어 정치를 비판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 곧 ‘당인(党人)’이라고 비난하면서 지식인들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때에 환제의 치세 말년기인 166년, 사예교위(司隶校尉: 관리들을 감찰하고 치안의 책임을 맡은 우두머리직)로 있던 이응(李膺)이 수도 낙양의 태학생(국립대학 태학의 학생)들을 불러모으고 지방 유생의 후원을 받으면서 환관의 폐해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환관파는 작당하여 조정을 비난하고 동시에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이응 일파들을 환제에게 고발하였다. 환제는 이들에 대해 체포명령을 내리고 이응을 비롯한 재야명사 진식(陈实) 등 200여 명의 관료와 지식인을 투옥했다. 그러나 사건을 취조하는 중 환관의 죄목도 발견되었다. 또한 투옥은 너무 심한 처벌이라는 여론도 비등하여 그 이듬해 6월, 대사면령을 내려 투옥된 자들을 모두 석방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렇지만 조정은 그들을 종심금고(禁锢)형에 처하고, 당인(党人)리스트를 작성하여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이 사건을 ‘제1차 당고의 금’이라 하는데, 이 시대의 ‘금고’는 단순히 개인적인 활동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관직으로 나가는 길을 금한 것이기에, 이 조처는 지식인에 대한 대탄압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인 탄압사건은 광범한 지식인층 사이에 환관 정부에 대한 반발과 반정부 여론을 북돋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 여론을 당시의 표현으로 ‘청의(清议)’라 한다. 청의는 환관과 연결되어진 사람들이 뇌물수수를 일삼으며 권력과 재력을 중심으로 사회를 움직여 가는 것을 더럽고 탁한 것이라 여기고, 이와는 반대로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깨끗한 사회를 건설하고 지도할 수 있는 인물을 여러 가지로 평론한다는 데서 나온 용어이다. 이로 인하여 후한 말에는 청렴 결백한 관료, 태학생 및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청류파’와 환관세력과 결탁된 ‘환관파(탁류파)’가 형성되어 서로 대립하였다. 당시 청류파의 중심인물로서는 이응과 진식이 유명하다.

이응은 재직시에 지방의 부패관료와 호족들을 숙청하는 일에 앞장섰는데 한번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 잔학무도한 현령 장삭(张朔)이 임산부를 학살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추적한 결과 장삭은 친형인 장양(张让) 집의 빈 기둥 속에 숨어 있었다. 장양이라 하면 당시 세력이 당당한 환관으로서 「후한서(後汉书)」 환관열전(宦官列傅)에 ‘빈객들이 장양을 만나려고 대문 앞에 진을 쳤는데 마차가 항상 수백 량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세도가 당당한 환관이었다. 이응은 부하를 거느리고 환관 세도가 장양의 집을 급슥하였다. 기둥을 쪼개고 장삭을 체포 연행하여 곧바로 처형하였다.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악랄한 환관세력에 맞서 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하자 이응의 명성은 높아졌다. 태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아 매일같이 사람들이 이응의 집으로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그를 경모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응’이라 평했다.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등용문(登龙门)’이라 일컬었다. ‘등용문’이란 말은 ‘용문에 오른다’는 뜻이다. ‘용문(龙门)’은 원래 황허(黄河) 상류의 협곡 이름인데 이 곳 물이 세차고 빠른 급류여서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려우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입신출세의 어려운 관문을 돌파하고 약진의 기회를 얻었음을 비유하여 쓴 말이다. 이응의 추천과 신임은 그만큼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진식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에피소드가 전한다. 허난(河南)성 태구현(太丘县)의 현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백성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던 어느 날 밤, 진식의 집에 도둑이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어 있었다. 대청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던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모아 놓고 위엄있는 태도로 일장 훈화를 하였다. “사람이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다. 악인이라 해도 원래부터 나쁜 것이 아니고 나쁜 버릇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끝내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게 된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대들보 위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도둑이 진식의 행동에 크게 감동하여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하였다. 진식은 좋은 말로 타이르고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내었는데, 그 후부터 태구현에는 도둑이 끊겼다고 한다. 후에 이 이야기는 도둑을 일컬어 ‘양상군자’라고 하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그 후 제1차 당고의 금을 발포한 환제가 죽고 영제(灵帝168~189)가 즉위하였다. 영제는 겨우 12세의 소년이었기에 두태후(窦太后, 환제의 황후)가 섭정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두무(窦武)가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대장군은 조정을 주재하는 사실상의 최고 실력자였는데, 그 때는 황후 또는 황태후의 아버지나 오빠, 즉 외척이 대장군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전부터 환관의 횡포에 불만을 갖고 있던 두무는 청류파 인물 진번을 등용하여 환관파 세력 제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백성들은 이제 태평성세가 오려나 하고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니, 환관들이 태후를 제쳐놓고 그들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등 전횡이 더욱 극렬해졌기 때문이다.

두무, 진번 등은 환관의 세력을 꺾기 위해 168년 9월, 환관의 우두머리인 조절, 왕보 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도리어 환관 측이 먼저 선수를 쳐 군대를 발동하였다. 진번은 살해되고 두무도 체포되어 자결하였으며 두태후도 축출되었다. 이듬해인 169년 10월, 이응 이하 100여 명이 죽임을 당하였고 환관 정치를 비판하던 유생 약 700여 명이 금고형에 처해지는 등 대탄압을 받았다. 투옥된 태학생도 1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때 당인의 가까운 친척에까지  불똥이 튀어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해임되거나 금고 처분을 당하였다. 이것을 ‘제2차 당고의 화’라 하는데, 이러한 금고령은 176년에 다시 당인의 일족과 가신에게까지 확대되고 ‘황건적의 대반란’(184)이 발발한 직후까지 전후 약 20년 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당고의 화’가 이루어지면서 환관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지고 정치도덕은 더욱 부패해갔다. 그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벼슬을 매매하는 행위였다. 조정에는 벼슬을 팔아 돈을 보관하는 서저(西邸)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벼슬을 팔기가 일쑤였는데, 군수 등 녹봉 2천 석의 벼슬은 2천만 전에 매매되었다고 한다. 4백 석 상당의 현령 자리도 좋은 지방이냐 좋지 않은 지방이냐에 따라 그 액수가 달랐으며, 심지어 돈이 없는 자는 벼슬에 오른 다음 할부로 지불하는 방법까지 유행하였다고 한다. 더욱 흥미 있는 일은 같은 직급이라 할지라도 지방직이 중앙의 관직보다 배나 비싼 값으로 거래되었다는 것이다. 지방 관리는 착취가 가능하지만 중앙 관리는 착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는 관직의 임기가 매우 짧았다. 돈을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회전 속도가 빨라야 했기 때문이다. 짧은 임기 동안에 본전을 회수하고 짭짤한 재미를 보기 위해 관리들은 성급하게 굴었으며, 이로 인해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도 자연 성행하였다.

후한 말 환관의 횡포와 탐관오리의 토색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밤에 몰래 도망치는 일이 많았고, 이로 인해 여기 저기에 방대한 빈민과 유민이 출현하였다. 훗날 ‘황건의 난’으로 후한제국이 멸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고의 화’는 결국 청렴한 관료 및 유생들의 정계 진출을 차단하고 재야 지식인이 왕조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지만 정부에 등을 돌린 재야 지식인들은 왕조에 대한 비판과 건의가 금지되었다 하더라도, 현자, 유덕자를 인정하는 인물비평의 형태로 계속 향촌에 존재하면서 새로운 재야 명사들을 출현시키었다. 이들 명사들이 후한제국 붕괴에 이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인물로 부각되어 위 ∙ 촉 ∙ 오의 새로운 삼국시대(220~280)를 준비하면서 역사의 바톤을 이어갔던 것이다.


전순동/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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