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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20  통권 70호  필자 : 홍자청  |  조회 : 2237   프린트   이메일 
[선교현장 이야기]
새벽마다 무릎으로 나아가기

“사역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사 57:16)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오늘도 살이 시린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운동장을 돌고 또 돈다. 체력단련을 위해서도 아니고 땀을 흘리고 싶어서도 아니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우박같이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기 위해 따뜻한 스팀이 나오는 내 작은 방을 박차고 나와 어둠 속을 돌고 있다.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 수첩을 앞에 펼쳐 놓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미전도종족과 이슬람권을 위해,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 교회와 파송 교회, 후원 교회를 위해, 중국을 위해, 우리가 사역하는 서북부와 C성, 현지 동역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전도의 부담을 주신 많은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 다시 내 눈은 감기고 나는 어느새 침대에 올라가 있다.

사역에 지쳐 피곤한 몸을 누이며 잠들 때마다, 다시 새벽 4시면 요란한 소리로 나를 깨울 작은 시계를 야속한 듯이 바라보며 떨쳐 버릴 수 없는 부담감으로 잠이 들곤 한다. 어느 날 단 하루라도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고 싶은 유혹이 다가왔다. 핑계도 충분했다. 그 때 나는 과로로 몸이 아팠고 입안은 헐어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나님 내일 하루만 쉬겠습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울리는 시계의 알람을 끄고 손으로 툭 쳐서 멀리 밀어내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을 청하는데, 그 조용한 새벽 시계 초침소리가 처량하고 둔탁하게 점점 더 큰소리로 들리기 시작하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야! 저 시계소리 들리느냐?”

“네. 듣고 있습니다.”

그 때 눈앞에 어떤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한 지점을 향해 계속 걸어가고 있었는데,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여유 있는 표정이었으나 앞으로 갈수록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은 조금씩 얼굴의 표정이 굳어지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가지 않으려고 버텨 보지만, 뒤에서 미는 인파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고 밀려 결국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으로 떨어졌다. 그곳은 바로 지옥이었다. 시계 초침소리에 맞추어 한 영혼 한 영혼 그렇게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벌떡 일어나 내 공부방에 가서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주님! 피곤한 제 육체만 생각했지 죽어 가는 영혼들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나를 위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것을 내가 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쉰다면 그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피곤해 지쳐 쓰러져 가는 한 연약한 선교사를 깨워야 하셨던 내 아버지의 마음을 본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품고 그 영혼들을 위해 중보할 중재자를 찾고 계신 것이다. 이후로 새벽기도를 쉬기 위한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나를 결코 졸아서는 안 되는, 늘 깨어 있어야만 하는 이 땅의 파수꾼으로 부르신 것이다.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는 주님의 군사인 선교사, 기도의 무기 없이 승리할 수 있겠는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가장 기도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기도가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기도를 방해하는 영적인 공격은 끊이지 않는다.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공격해 오기도 한다. 기도하려고 무릎 꿇기만 하면 어깨에서 무엇인가 짓누르는 느낌에 고통스럽기까지 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또한 간접적으로 관계를 공격해서 합심기도를 방해하고, 크고 작은 사고들로 우리의 기도시간을 빼앗아 간다.

우리가 사역하는 지역은 티벳 라마불교와 이슬람의 세력이 포진하고 있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라마승들은 새벽 4시면 일어나 같은 목소리로 불경을 읽고, 무슬림들 역시 새벽 4시면 메카를 향해 하루 첫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더더욱 새벽기도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기도의 싸움이 곧 영적 싸움이며 적을 무찌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많은 선교사들은 말한다. 굳이 새벽을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 새벽 4시에 공격해 오는 적군을 향해, ‘나는 지금 너의 공격을 받아 줄 시간이 없으니 내가 좋은 시간에 다시 와라. 그 대 상대해 주겠다’ 말하는 이런 전쟁은 없다. 공격이 올 때 자고 있다면 그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감시자가 없다는 것이다. 고국에서는 새벽기도를 인도해야하는 목회자라는 직책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기도하게 되고, 평신도라 할지라도 열심 있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 때문에 새벽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등등 여러 기도회를 참석하여 자연스럽게 기도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아무도 내 기도생활에 관심 갖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에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나의 감시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도해야 한다는 절박한 부담감과 그 시간을 정해놓고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여러 가지 대가를 지불하면서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면 내 기도생활은 보장받지 못한다.

“새벽기도의 부담이 없어 홀가분하다”

선교지에 처음 도착한 어느 선교사의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기도했는가? 더욱 긴장감을 갖고 기도에 부담을 가져야 하는 선교지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내 자신이 나를 감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사람은 전쟁에서 성을 빼앗는 자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세 번째 이유는 기도할 시간조차 없을만큼 많아지고 바빠진 사역들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갈수록 사역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인간관계도 확대되고, 밤낮 없이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전화벨소리, 그 어느 때도 방해받지 않을 시간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새벽기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갖고 한 시간 정도 더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저녁식사후로 정했는데 며칠도 시행하지 못했다. 식사 후 아내를 위해 설거지 봉사를 했는데 설거지가 끝나고 나면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팔을 붙들고 산책을 나가자고 조르고 아이도 함께 매달린다. 사실 그 시간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유일한 시간이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게 협조하는 상황은 결코 오지 않았다.

역시 방해받지 않는 시간은 새벽뿐이다.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 새벽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조용히 주님을 묵상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그 분의 임재 속에서 내 안의 아픔과 슬픔이 치유되었다. 사역 속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쌓이는 많은 스트레스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내게 주신 많은 영혼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가 먼저 유지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39)
 여전히 내 동기는 순수한가? 주님의 마음으로 이 영혼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 안에 하나님의 열심히 여전히 불타고 있는가? 매일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내게 말씀하신다. 기도할 때에 그 많은 우리들의 사역은 의미 있어지고 열매 맺게 되는 것이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사역들은 그저 사역일 뿐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기 쉽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리는 계속 무릎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고백이었다.

“너무 바빠 기도할 수 없어” 라고 유혹하는 사단에게, “지금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하는 모든 일과 하나님은 상관이 없게 된다” 고 선포하며 무릎으로 나아가자.

선교사가 기도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육체의 연약함 때문일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처음 도착해서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기후나 환경적응에서 오는 육체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질병이다. 필자가 사역했던 지역은 고원이라 산소가 부족해 상대적으로 쉽게 피로를 느끼고,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계속 잠만 자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두 세 시간씩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건조한 사막 기후 때문에 호흡기 계통의 질병으로 체력이 많이 소모되고, 환절기 때마다 무서운 유행성 독감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쉽게 지치고 병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진다. 며칠씩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사역지를 방문하다보면, 대부분 가난한 사골마을이라 단단한 밀가루 빵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한다. 열약한 환경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일수록 질병과 부적응 상태에서 오는 육체의 어려움을 겪게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더더욱 기도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따라서 선교사가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은 사역만큼 중요하다.

필자는 사역지에서 매일 꾸준히 열 바퀴씩 운동장을 돌면서 운동한 것이 환경에 빨리 적응하고 계속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면 눕고 싶고 자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이를 악물고 운동장을 달렸다. ‘이것도 사역이다.’ 스스로 채찍질해가며….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적당한 휴식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기도와 말씀 속에서 기쁨과 감사를 유지해야 몰려오는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있어서는 주님은 한치의 양보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피곤한 내 육체를 일으켜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 14:37)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육체적인 피곤과 연약함을 모르시는 주님이 아니셨다. 
그러나 그들 앞에 닥칠 환란 가운데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기도 밖에 없기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 어떤 핑계로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상상해보자. 내일이면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주님. 아무도 그 십자가의 길에 주님과 함께 동행할 자 없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버림받아 혼자이어야 하는 그 고립감과 외로움이 주님을 더 힘들게 했는지 모른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고 고백하신다. 끔찍하고 처절한 그 십자가의 사건 앞에 토해내는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의 고백이다. 그렇다. 십자가는 바로 두려움, 고통, 철저하게 버림받음, 그 자체인 것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 26:42) 온전히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십자가 앞에 그 자신을 내어주셨다. 눈물과 땀방울이 어느새 핏방울이 되어 떨어질 때까지 처절한 자기부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양과 같이 말없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조용히 피 흘려주셨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그 부르심에 우리는 기꺼이 순종했다. 주님 가신 길을 나도 십자가 지고 따르겠다고 그렇게 헌신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겟세마네의 그 처절한 부인 없이, 피를 흘리는 그 간절한 기도 없이는 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 그렇게 간절한 기도가 필요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십자가를 지겠다는 헌신은 했지만 그것을 위해 기도의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어 있는 것일까?

사역지에 처음 도착해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 것인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무릎 꿇고 있을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은 “깨어 있어 기도하라”였다. 그래서 처음 일 이년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특별한 사역 없이 기도와 언어 훈련에만 집중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1,2년 간 똑같은 사역보고를 받은 파송 교회, 후원 교회는 기대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몇 개의 교회를 세웠는가? 몇 명의 제자를 양육했는가? 보고하라. 눈에 보이는 열매를 보고하라.” 교회가 선교사에게 요구하는 일반적인 요구들이다. “당신은 어떻게 개인 경건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고 중보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는 교회는 얼마나 될까? “기도 역시 중요한 사역이다”라는 생각으로 교회가 선교사를 관리했다면, 중도 포기하고 실패하는 많은 선교사들의 아픔과 손실을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매주 금요일 아내와 함께 금식하며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을 돌면서 기도했다. 수만 명의 무슬림들이 금요일마다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릴 때, 우린 외롭지만 묵묵히 여리고 성을 돌 듯이 그렇게 그 땅을 밟으며 돌았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눈이 오고 비가 올 때도 빠짐없이 그 많은 영혼을 미혹케 하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를 중보하며,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올 날을 기대하며 돌았다. 그렇게 돌기를 7년, 하나님은 놀랍게 회민(回民: 모슬렘) 교회를 세워 주셨다. 현지 동역자들도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 모두 감사했다. 소리 없이 묵묵히 돌던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으로 그 높은 여리고 성이 한 순간에 무너진 것과 같이, 그렇게 알라를 믿던 모슬렘들이 하나 둘씩 주님께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 없다. 예수님 이름만 부르면 강력하게 저항하며 핍박하던 그들을 보면서, 참으로 막막해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절망 가운데 있었던 우리 앞에 주님께서 친히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부족하나마 그들을 위해 계속 중보하며 꾸준히 무릎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기도의 결실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육체의 아픔과 외로움, 믿었던 많은 사람들의 배반, 신변의 위협과 여러 가지 핍박 속에서도 감사와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힘도 무릎으로 새벽마다 만난 내 아버지와의 깊은 교재이었음을 다시 고백하고 싶다.

주님은 여전히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내일 또 다시 내 앞에 있는 피하고 싶고, 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그러나 내가 지어야만 하는 십자가가 있기에 나를 부인하는 겟세마네 기도를 다시 드려야 하는 것이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홍자청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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