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4일은 1989년 텐안먼(天安門) 사건이 일어난 지 1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6∙ 4 텐안먼 사건은,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사회변혁과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나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좌절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 대해 품었던 지식인들의 신뢰감과 희망이 무너졌고, 공산당의 통치권위와 도덕성은 심각하게 실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공산당과 정부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신앙과 신념을 무너지게 하였다. 이후 지식인들의 정신적 방황과 허탈감은 극심해졌으며, 일부 지식인들은 실현불가능한 사회와 국가의 문제보다는 돈벌이 등 현실적인 개인의 이익과 앞날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텐안먼 사건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한 중국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였다. 정신적 공허감과 자기 성찰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좋은 마음 밭을 형성하였기에, 6∙ 4 텐안먼 사건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한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6∙ 4 이후 삼자교회마다 수많은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몰려드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특히 베이징, 상하이, 시안, 샤먼 등 대도시 교회의 대학생, 지식인 구성원이 증가하였다. 한편 해외로 망명하거나 유학하고 있는 중국의 지식인들도 6∙ 4 텐안먼 서건 이후 기독교에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 중 10~13%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개종의 이유 , 그렇다면 6. 4 사건 이후 중국 지식인들이 기독교인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중국 지식인들은 공산당과 정부, 공산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뢰가 무너졌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한계성과 연약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정신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전통사상과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지만, 시위대를 무력 진압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었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여기서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중국 지식인들은 텐안먼 사건 이후 겪게 된 삶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먼저 이들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삶의 위기는 바로 정신적 공허감과 상실감이었다. 지식인들은 정신적 만족감을 얻기 위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기독교가 서양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한 학문적 탐구도 열기를 띄게 되었다.
기독교는 정신적인 공황의 위기에 빠진 지식인들에게 위로와 만족을 주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무력진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으나, 이러한 심리적 고통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되었다.
또한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거나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지식인들의 경우 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이 바로 삶의 위기였다. 이들은 실제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경험하였다.
셋째, 해외로 망명한 지식인들은 그곳에서 만난 기독교인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6∙ 4 이후 미주 지역의 중국인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은 적극적으로 중국 유학생 및 지식인들을 향한 복음사역을 전개하였다. 중국 지식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진실어린 사랑에 감명을 받았으며, 이 사랑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발견하였다. 또한 기독교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
당시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위엔쯔밍(遠志明), 장보리(張伯笠), 셰쉬엔쥔(謝選駿), 슝옌(熊焱) 등은 모두 텐안먼 사건 이후 해외로 망명한 뒤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에 이르게 된 경로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신앙을 통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위엔쯔밍, 장보리, 셰쉬엔쥔이 기독교인이 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_위엔쯔밍
1987년 TV 다큐멘터리 「허상(河殤)」의 작가 중 한 명인 위엔쯔밍은 당시 중국런민대학(中國人民大學) 철학과 박사과정 학생이었으며, 민주화 운동 때 70명의 지식인들이 당국에 보내는 공개서신의 초고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을 뿐 아니라, ‘베이징지식인연합회’를 조직, 발기하여 지식인들과 함께 대규모 시위에 동참하였다. 6∙ 4 이후 그는 공산당 당적을 박탈당하였고, 중국런민대학에서도 제적되었다. 공안당국의 체표 대상이 된 그는 국내에서 도주생활을 하다가 8월 말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을 탈출,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계속적으로 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된 <민주중국전선(民主中國戰線)> 성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민주중국(民主中國)」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자신들이 지식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이해타산과 의심, 비열한 중상모략 등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가까이서 본 서방국가의 현실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우리가 중국에서 비판했던 공산당의 잘못을 결국은 해외에 있는 우리도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다.”, “솔직히 스스로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내면에는 억누르기 힘든 죄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비로소 인간의 ‘원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 4월, 그는 중국학 분야의 방문학자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화교(華僑)교회의 성경공부반에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 신앙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크리스천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6∙ 4 당시의 학살과 도주 과정에서 사망의 극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죄많은 인간의 추악함과 양면성을 알게 되었지만, 크리스천들은 진실한 사랑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예수의 사랑으로 증오를 버리고 심지어 자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 역시 6∙ 4 당시 학생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덩샤오핑, 리펑 등을 매우 증오했으나, 점점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 사랑의 근원을 찾기 위해 진지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비록 철학을 공부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참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위엔쯔밍은 1991년 4월 세례를 받았고, 1992년 6월 미시시피의 리폼드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그는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선교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1995년 초부터 「해외캠퍼스(海外校園)」라는 기독교 잡지를 통해 해외 중국 유학생 복음화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노자 대 성경(老子 vs 聖經)」과 「신주참회록(神州懺悔錄)」을 차례대로 완성하였다.
「신주참회록(神州懺悔錄)」의 반향은 매우 컸다. 이 책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7부작 「신주(神州)」가 머지않아 미국에서 방영될 것이다. 위엔쯔밍은 이 프로그램에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중국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진정한 신앙이 없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는 중국인은 단순한 반성(反省)이 아닌 역사적인 참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성은 이성(理性)에서 나온 것이지만, 참회는 양심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심이 있어야만 비로소 사람은 존귀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깨끗하고 평온한 심령이 만들어진다. 그는 중국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기독교의 양심과 자유정신이며, 이러한 양심과 자유정신은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질 때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_장보리
민주화 학생 운동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장보리는 텐안먼 광장에 설립된 민주대학의 학장이었다. 사건 후 그는 공안당국이 지명한 21명의 수배범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철도 공안원들은 그를 발견하여 체포할 때 저항할 경우 그 자리에서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목숨을 건 탈출 과정에서 그는 헤이롱장성의 한 농가 주인의 환대를 받게 된다. 기독교인인 여주인은 장보리가 도주 중에 입은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항상 기도해주었다. 문맹인 그녀는 자신이 손으로 쓴 요한복음을 읽어 달라고 그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장보리가 중국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도망하려고 그 농가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도망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당신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제가 매일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989년 12월 24일 저녁, 장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 날 눈보라는 심하게 몰아치고 아무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는 오직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혼미한 가운데 한줄기 강한 빛이 임하더니 갑자기 아주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장보리, 너는 죽지 않는다. 너는 내 명령을 위해 달리게 될 것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나는 ‘하나님, 만약 당신이 나를 살려주신다면 오직 당신을 위해 저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이 약속을 변치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장보리는 결국 한 농부에 의해 구조되어 러시아 경찰에 넘겨졌다. KGB는 서방국가의 보호를 원하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중국으로 돌려보냈으나, 중국 정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두 해 동안 중국의 산 속과 밀림을 전전하던 그는 결국 1991년 6월 13일 홍콩에 도착,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방문학자, 중국학 분야의 연구원 및 「중국의 봄(中國之春)」잡지 편집장, ‘중국민주연합전선’ 부주석으로 활동하다가 미국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1996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평생 하나님을 섬기기로 헌신하였다. 그는 휘튼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후 화교들에게 복음 전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껴 사우스켈리포니아에 있는 타이푸(臺福)신학원에서 신학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그는 미국과 캐나다, 타이완 등지에서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장보리는 도주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최고의 기준이라는 것을 강하게 체험하였으며, 1989년 텐안먼 광장에서의 급진적인 정서가 결국 정책적인 실수를 낳게 되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고 회개하였다. 한편 그는 진리를 갈망해왔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유와 민주의 근원이며 진리의 본체라고 고백하였다.
_셰엔준
위엔쯔밍과 함께 「허상」집필자 중 하나인 셰쉬엔쥔은 6∙ 4 이전 중국 내에서 문화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6∙ 4 이후 셰쉬엔쥔은 부인의 분만이 임박했을 즈음 자수했고, 후에 그는 일본을 전전하다가 미국으로 갔다. 당시 그의 아내와 딸은 베이징에 남겨졌고, 결혼 생활은 위기에 처한다.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기독교인이 된 위엔쯔밍과 재회한다. 중국에 있을 때 이 두 사람은 한 집에 살며 늘상 함께 다닐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위엔쯔밍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태인이고 그는 중국인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교육 받아온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이 철저하게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래 전부터 이미 계셨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세례를 받은 셰쉬엔쥔은 중국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부인은 이미 가정교회에서 셰례를 받았다고 했다. 신앙은 위기 상태에 있던 이 부부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셰쉬엔쥔의 부인도 나중에 미국으로 건넌왔고, 지금은 일가족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그들 역시 친구 위엔쯔밍처럼 중국인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정치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12년 후, 오늘의 중국 지식인
6∙ 4 톈안먼 사건을 경험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기 반성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고,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인생 뿐 아니라 자유, 민주, 진리를 추구하는 길의 종착점이며,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6∙ 4 톄안먼 사건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하고, 또한 기독교인이 되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6∙ 4 12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 당시의 충격과 영향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참여의식이 약해졌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염려, 인생에 대한 고민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 출세하여 명예를 얻는 것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 참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며, 진정한 진리와 구원을 갈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 사역자들은 그들의 관심사인 개인의 진로와 비전에 대해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하며, 물질에 대한 바른 가치관, 성경적 세계관, 사회관을 심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역자 개인의 성숙한 인격과 거룩한 삶을 통해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탁월함을 스스로 깨달으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 “六四精英和宗敎救贖”,「亞洲週刊」2000.6.5
° “1989년 6∙ 4 티엔안먼 사건과 중국 지식인의 기독교 개종”, 왕쓰웨, 「중국교회와선교」제7호 1999
정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