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역자
처음 선교지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를 반겨준 네 가정의 선배선교사를 기억한다. B시에서 첫 사역 기간을 마치고 온 J선교 부부와 K 선교사 부부, 다른 지역에서 첫 임기를 마치고 온 A선교사 부부, 그리고 본국에서 훈련을 마친 직후 들어온 L선교사 부부 등 모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후 본부의 필요에 의해 사역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 J선교사만 제외하고, 다른 세 분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 함께 협력하며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를 맺고 있다. 나 역시 독신 여성 선교사로서 이들 가정과 4년 동안 함께 교제하고 사역하며 참으로 귀한 시간을 보냈다.
선교지에 가기 전 어머니와 형제들, 조카들의 사랑과 도움에 길들여진 나의 여린 감성은,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타국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고독감에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한 번 고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의 3주간은 항상 몸과 마음에 심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나의 이러한 감정 변화를 알고 있는 이들 네 가정의 선교사들은 항상 나를 불러 위로의 모임을 베풀어 주었다. 한국과 토양이 다른 중국에서 제대로 된 한국 김치를 만들어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고춧가루는 인편이나 비싼 우편요금을 치른 소포로 받아야 하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부인 선교사들은 내가 방문할 때, 아니면 일부러 불러서라도 내 손에 자신들이 담근 김치를 들려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냉장고에는 오히려 그들 집에 있는 것보다 김치가 더 많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네 분의부인 선교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나의 첫 임기 4년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선교지에 가기 전, 독신으로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다가 부딪치는 많은 문제 중 하나가 주변에 있는 부인 선교사들과 빚어지는 갈등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달랐다. 비록 부인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할 기회는 많이 없었지만, 그들은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도와주며, 홀로 있는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힘을 북돋워준 귀한 동역자들이었다.
부인 선교사의 어려움을 아시나요?
사실 부인 선교사들이야말로 어찌 보면 독신 선교사들보다 더욱 외로운 위체치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생활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외로움에 지쳐있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남편 선교사는 밖에서 바삐 일하며 자신이 투자한 사역의 열매를 볼 수 있지만,매일 집안에서 가사와 육아, 손님맞이로 분주한 부인 선교사들은 사실상 사역의 보람과 성취를 느끼기 어렵다. 물론 가정사역과 손님접대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사역의 기쁨과 결과에 대한 감사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인 부인 선교사들은 그 두 사역을 ‘내조’로 이해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사역에 대한 만족감이 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현지 적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독신 선교사와 남편 선교사, 부인 선교사가 동시에 언어학습에 덜어갈 경우, 결과는 대부분 부이선교사의 낙오로 이어지게 된다(물론 개중에는 언어부분에서 부인 선교사가 월등한 경우도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부인은 아침에 일어나서 수업에 들어갈 때까지 식사준비, 아이들 챙겨서 학교 보내기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잡다한 집안 일로인해 충분한 예습, 복습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 이러한 일들에서 오는 좌절감과 고독이, 가정에 매여 잇지 않은 독신 선교사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어려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독신 여성 선교사들과 부인 선교사들 간에는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기 쉽다.
한번은 협력 사역을 의논하기 위해 그 네 가정의 선교사들과 함께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자연스럽게 남자선교사들은 후식을 들면서 사역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고, 또 다른 방에서는 부인 선교사들이 모여 ‘보모(아이들을 봐 주는 현지인)’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남자선교사들과 함께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커피를 들고 들어온 부인 선교사 한 분이, “여기보다 저기가 훨씬 이야기하기 편해요. 박 선생, 저기로 갑시다.” 하며 나를 자신들의 자리에 동참시키려 했다. 마침 남자선교사들이 사역 부분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사실 난감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비교적 나이 어린 단기 여성 선교사가 K 선교사 가정에 두 달 동안 머문 적이 있다. 그즈음 K 선교사의 부인은 이 선교사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식사 후 설거지기 문제였다. 그는 식사를 하고 나면 자기 그릇을 고스란히 싱크대에 가져와 놓고 한 번도 씻지 않았다. 어느 날 이 단기선교사가 사역을 위해 K 선교사와 함께 차를 타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돌아서면서, 이 부인 선교사는 독신이 느끼지 못한 또 다른 고독감에 내몰렸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부인 선교사와 독신 선교사 산에는 서로 다른 색깔의 고독감과 외로움이 존재한다.
관계는 하기 나름
J선교사의 부인은 나보다 1년(엄밀히는 3개월) 어렸고, K 선교사의 부인과는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A와 L선교사 부인은 나보다 4,5년 연장자들이었다. 이들과 어니며, 친구로, 또 동생으로 나의 위치는 참 미묘했다. 그러나 그들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결혼하지 않은 나를 따돌리지 않고 끝까지 품어주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되짚어보려니 난감하지만, 지혜의 성령님이 날 그대로 혼자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그들을 통해 도우신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도 선교지에 관련된 일이 생기거나 선교지를 떠올리면 항상 먼저 그녀들이 생각난다. 사역 문제로 전화를 할 때도 먼저 부인 선교사부터 찾아 한참 수다를 떤 후에 남편 선교사를 바꿔 용건을 말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는, 어제 갔다 왔다 하더라도 빈손으로 간 적이 거의 없다. 또한 내가 동료 사역자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놀러 온 것이라는 마음으로 가기 때문에, 주방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식탁에 앉아 달랑 수저 놓는 일만 돕지는 않는다. 그리고 끝없이 쏟아놓는 부인 선교사들의 여러 가지 마음의 소리를 들어 준다. 설사 몇 시간이 걸릴지라도, 아주 흥미롭고 처음 듣는 얘기인 듯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내가 외롭다고 울 때마다 나를 불러 저녁을 함께 하자고 청하는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남편 선교사의 배려, 두말하면 잔소리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은 부인에게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는데, 그것은 선교사들도 다를 바 없다. J선교사 부인의 생일에 일어난 웃지 못 할 일이다. 그날 낮에 나는 깜짝 이벤트용 케이크를 준비하면서, J선교사에게 부인에게 줄 생일선물을 준비하라고 미리 귀띔해 주었다. 저녁 때 J선교사 집에서 성경공부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밤 11시가 이미 지났는데도 공부가 끝나지 않는 것이었다. 생일인데 선물은커녕 다른 날보다 더 늦게 끝난 성경공부로 부인 선교사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는지, 의자 정리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케이크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가 다시 울상이 되었다. 생일용 초가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이 어디서 찾았는지 굵은 희 초를 갖고 와서는 케이크 가운데에 ‘풀’ 꽂았다. 그것을 본 그 부인의 외마다,
“내가 백 살이야????!!”
그날의 생일축하는 그 순간 끝났던 걸로 기억된다. 그녀보다 3개월 빠른 내 생일에 J선교사는 다른 네 가정의 선교사 부부를 초청하여, 내가 전부터 가소 싶어 했던 호텔 커피숍에서 카푸치노를 사주었었다. 그날 함께 했던 네 명의 부인 선교사들은 자신의 생일에도 ‘꼭’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했었던 것 같다. 아마…
박평안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