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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20  통권 66호  필자 : 강정애  |  조회 : 3832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중국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선교
중국 민족성의 이해

중국에서 우연히 젊은 한국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는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발랄한 모습 뒤에 감춰진 긴장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남편은 모회사 직원이고, 부인은 초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중국 생활 3년째라고 했다.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던 이들은 어느 날 교회에 온 중국 선교사의 간증을 듣고 감동을 받아 헌신하고, 환경의 인도하심을 따라 중국에 왔다. 오기 전까지 중국에 대한 이해도 준비도 없었고, 오직 열정과 믿음만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매일 현지인 직원과 충돌이 발생하여 호통치고 욕하다가도, 중국인을 포용하지 못한 자책감에 늘 후회와 회개를 반복하는 생활이 이제는 지겹다고 했다. 도무지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솔직히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뜨거운 열정과 굳건한 믿음, 중국에 머물 수 있는 합법적인 조건을 다 구비했지만 중국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는 경우이다. 만약 이들이 중국 문화의 특징이나 전통적인 민족성을 이해했다면 오늘날 현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전반적인 충돌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고, 동시에 많은 문제들을 명료하게 할 수도 있으므로 효과적인 중국선교의 일역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수 천 년을 지내는 동안 변하지 않은 중국 민족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선교 이전의 기초작업이기 때문이다.

족 성격의 이해 
중국의 한 TV 방송국 기자가 한국을 취재한 내용을 중국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중국기자의 눈에 이채롭게 보였던 것 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은 미소를 머금고 다정다감하게 대화하면서 식사를 한다.”고 설명하면서 한국인의 식사 광경을 카메라에 잡았다. 사실 우리 민족도 무표정에서 벗어난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약 25여 년 전 한국에서는 범민족적 스마일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스마일 운동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표정한 얼굴에 좀더 문명적인 자극을 주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무표정이 도리어 좀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렇지만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인류공통의 행위이고, 식사 중에 미소를 짓는 표정과 무표정은 서로 다른 문화에 의해 조성된 차이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민족이나 자기의 문화를 높이 치켜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우리의 중국에 대한 견해도 종종 자기 민족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개인의 경험을 보편화하기 때문에 중국을 보는 법이 일정한 영역에 국한되기 쉽다. 이러한 태도는 외국생활을 할 때 그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단히 발생하곤 한다. 

민족적인 성격에는 고정된 최고의 표준이 없다. 개인의 성격이 유전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어떤 민족성을 조성하는 문화의 형태도 한 세대, 한 세대를 내려가면서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상호관계를 통해 전통적인 문화가 심각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 어느 민족에 대한 도덕적인 일이 다른 민족에게는 부도덕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민족 성격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철학적인 태도와 우주관에 달려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도덕 행위상의 다른 관점은 심리학이나 과학도 해결할 수 없다. 즉, 민족의 성격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긍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적인 특성은 모두 시간성과 지역성이 있기 때문에 결코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 있어서 전통은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대중국은 전통에 대한 반발을 이상 기치로 내세웠고, 최근 수십 년 이래 전통은 거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명사(名詞)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면 과거 중국인은 대가족 제도에 종속되는 것이 한 특징이었지만, 현재 대가족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해방과 함께 남자들이 가사를 맡아 하거나 법률로 규정된 ‘한 가정 한 자녀 갖기’운동 등으로 인해 남존여비 사상도 희석되었고 수많은 전통은 이제 과거의 묵은 자취에 불과하다. 

유명한 중국의 작가 린위탕(林語堂)은 중국인에 대해, 솔직하며 자연을 사랑하고 인내심과 안정성이 있으며, 어린 아이를 사랑하며 근검하고 가정을 사랑하며, 자기 분수에 맞게 유연자약하며 유머가 넘치나, 보수적이고 향락적이라고 했다. 

린위탕의 스승인 꾸훙밍(辜鴻銘)도 중국인은 냉담한 이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중후한 인정미가 있다고 했다. 소위 중국인의 예법은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중국 예법은 세계에 이름나 있으며, 중국인에게는 성숙한 지성이 있는가 하면,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도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에 한 서양인은 중국인은 성격묘사를 하면서,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신용이 없으며, 시간을 지키지 않고 정확하지 못하며, 타인을 경시하고, 신경이 둔하며 단체 의식이 결핍되었다. 또 동정심이 없고 불성실하며 타인을 위하는 정신이 결핍되고 서로를 신임하지 않고 과도한 보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국인의 감정표현 방식 
중국인은 감정을 표시할 때 아주 신중하며 직접적인 감정표현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내면에 관계되는 생활의 일체이며 상당히 엄격하게 지켜진다.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약간의 감정조차 표시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별이나 사망 시에도 노골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내면의 기쁨이나 슬픔도 왕왕 자기의 기분만 표시할 뿐 반드시 언어와 태도로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인 간에 공개적으로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심지어 부모와 자녀 간에도 공개적으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중국인의 감정이 마비되고 우둔하다고 생각한다. 카시미터라는 선교사는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중국인에게 감정이 결여되었다”고 회의를 느꼈는데, 12년 간 중국에서 생활한 이후부터는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감정을 표시하는 방식은 중국인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런 방식은 외국인에게 습관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성실하다’느니 ‘신경이 둔하다’느니 ‘감정이 마비되었다’는 등등의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감정을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관찰하였으므로 ‘예법이 밝다’, ‘현실적이다’, ‘낙천지명이다’, ‘유머가 있다’는 표현이 나타났다.

신과 체면 중시
위신이라는 말은 ‘미엔즈(面子)’라고 한다. 사람의 얼굴(面)은 사람의 내심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기원은 우리가 명예를 얻었거나 잃었을 때 얼굴에 나타나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거울의 면과 같아서 속마음의 움직이는 모습이 모두 얼굴에 표시되어 나타난다. 어린이도 어른의 표정을 읽을 수 있고, 아무리 그렇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난다. 

‘위신’이란 어떤 일에 대한 성취에 결과로 명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체면’은 나 자신의 인격에 대한 존중과 아울러 타인의 나에 대한 인격의 존중이 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신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명예가 없다는 뜻이고, ‘체면이 없다’는 말이 만약 농담이 아니라면 그것은 모욕이다. 다른 사람에게 ‘체면 좀 생각하라’고 말한다면 하류층이거나 부도덕하다거나 수치심이 없다는 말이 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습관과 도덕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자기의 내심을 감춤으로써 타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면은 진상을 전부 감추어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소위 ‘가면작용’은 진실과 사회적 필요 두 가지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타협이라고 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얼굴, 즉 가면작용은 특히 중요하다. 바로 이것 때문에 중국인은 줄곧 예절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억누름으로써 형식주의에 빠지고, 감정이 마비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므로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인을 쉽게 알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인이 위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이 모두 아는 것이며 이것 때문에 때로 세인들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인지상정이며 결코 중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국인에게 있어서 위신은 어떤 일을 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위신만을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표면상으로는 겸손하여 도덕군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영을 탐내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는 부정적인 결과를 조성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부조라는 왕왕 이런 이유로 발생하는 수가 많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인이 오랫동안 자신을 통제하고 감정의 역량을 예술이나 대자연에 기울여,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들어가지 않고서는 자극할 수 없는 낙천적인 태도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어느 민족보다 낙천지명(樂天知命)하는 민족이며 설사 최소한의 물질적인 조건에 처해 있더라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정을 표시하는 태도는 ‘비에관시엔스(別管閑事)’라는 특유의 민족성을 조성했다. 이것은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앞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말리지 않을 만큼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중국인의 민족성이다. ‘靑官難斷家務事’라는 속담도 있다. 아무리 현명한 관리라고 할지라도 한 가정의 일은 쉽게 재판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늘날도 이 정신은 변하지 않은 채 면면히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면 비록 교육을 위해서라도 일가친척 어린이를 훈계하는 것은 금기시 된다. 이러한 태도는 본인의 내면세계에도 거리감을 둘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확실한 벽을 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외국인에게는 몰인정하게 보이기도 하고 타인에 대한 무감각한 것 같지만 사실 이웃을 존중한다는 뜻이 깊이 내포되어 있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위신과 체면이라는 두 가지는 중국 민족의 내면 깊이 뿌리박고 있는 대표적인 성격이다.

인정미 
체면이나 위신 이외에도 중국인이 특별히 강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정(人情)’ 혹은 ‘인정미(人情味)’이다. 소위 인정은 절친하거나 우호적인 사람에게 표시하는 감정이다. 친한 사람이나 우호적인 사람이 공로가 있으면 그들의 위신을 세워주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인정이며, 조금도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인정이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정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감정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진정한 감정으로써 상대방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인정을 ‘사심(私心)없는 인정’ 혹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인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진심도 없으면서 다만 자기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인정은 사심이 있는 인정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자기의 이익에 관계되거나 혹은 그 사람과 자기의 사이가 벌어질까 두려워서 베푸는 인정은 일종의 상업적인 매매이며, 이것을 ‘사심있는 인정’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 다른 한 가지는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부득이 사람 사이에 인정을 보임으로써 공공관계를 원만히 하려는 인정이 있다. 중국인은 특히 위신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의 상업적인 인정은 가끔 약간 과도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선물을 보낸다든가 공덕을 칭송하는 보편화된 현상을 낳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 중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라는 현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위신이나 체면을 특히 중시하는 중국인에게 이런 여러 가지 인정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정감에 치우치고 논리적 분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위신과 인정을 찾게 되며, 심지어 사적인 일 때문에 공적인 일을 망치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한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해에 얽힌 테두리를 만들고 이 테두리를 벗어나면 그들은 누구에게도 담담하고 냉담한 것이다.

사실 배금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의 중국에서도 여전히 모양은 다르지만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민족성이 여러 형태의 부조화를 조성하며 존재하고 있다. 인정이나 위신을 손상당했을 때 중국인은 적극적인 보복도 불사하게 된다. 아편전쟁 이후 오늘까지 중국의 각종 교과서를 통해 기독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이며 종교는 아편이라는 가치관을 꾸준히 교육하고 있다. 이것은 서구열강에 의해 위신이 손상당한 데 대한 적극적인 보복이라고 볼 수 있다.


명인 배양 캠페인 
중국인이 인의(仁義)의 도덕이상(道德理想)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인격을 존중하는 것과 관계가 깊으며 또한 체면도 관계가 있다. 어느 사람이나 인의가 없어서 인격적 존엄을 잃는다면 바로 이것이 체면을 잃는 것이다. 중국인이 ‘체면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도덕의식의 표현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인에게는 겸허한 행동이 중시되며, 타인을 깔보거나 자기 과장에 빠지는 사람은 수양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자기의 재능과 능력을 낮춤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리라는 희망은 공자가 수신(修身)으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조건을 삼은 이래, 각 개인에게 수양하는 도덕적 책임이 강조되었다. 이런 태도는 바로 자신과 자신의 감정 사이에 얼마 간의 거리를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자신의 수양을 드러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위신도 세워줄 수 있는 두 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위신과 체면이 손상당하지 않고 본인의 존엄이 인정받음으로 인해 사심없는 인정이 발동되면, 이 때 바로 중국인 특유의 밀착된 관계가 형성되어 상상할 수도 없는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위신과 체면을 겸비한 현대 중국인 배양이야 말로 지금 중국의 심각한 과제이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인간의 소질을 높이자(提 高人的素質)”는 기치 아래 문명인 배양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원밍리마오(文明禮貌)’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깊은 친분이 없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동료나 이웃을 만나면 간단한 눈인사나 상대방의 호칭을 부르면서 지나가는 것이 문명방식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건이 맘에 들지 않으면 산 물건이 ‘이상적이지 않다(不理想)’는 이유로 일정 기간 내에 교환해주는 백화점도 있다. 이런 문명방식은 비록 서구의 모방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근본적인 공통의 가치관 즉, 이웃과의 거리를 좁히고 위신과 영예를 중시하면서 체면을 배양하고 인격가치의 존중에 힘쓰는 민족성격의 변화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족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중국은 급변하고 있다. 봉건사상이 타파되고 사회주의와 결합된 시장경제에 주력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대도시는 변모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내일을 꿈꾸지만 민족성은 쉽게 변할 수 없다. 단지 민족성을 표현해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향해 웃을 때 그 웃음 속에 뭔가 요구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 의심이 간다고 말하는 중국인 친구가 적지 않다. 하물며 외국인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때 그들의 심리적인 부담은 얼마나 클 것인가! 주는 행위에는 뭔가 요구하는 뜻이 있으니 나도 무엇인가 줌으로서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갖는 것이 중국인의 민족성 중의 하나이다. 만약 받은 것만큼 돌려주지 못했을 때 그들의 체면과 위신은 손상되는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무조건 받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중국인에겐 냉큼 받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를 중국인의 민족성으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 세상 어느 민족보다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민족성을 발휘할 것이다.

강정애/ 중문학 박사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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