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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20  통권 65호  필자 : 정인갑  |  조회 : 1640   프린트   이메일 
[중국. 중국인]
느긋한 친분 쌓기

일전에 어느 한국인과 한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중국인 친구와 별 일이 없을 때는 심심풀이로 함께 외식을 하곤 하지만 실제로 신세질 일이 생기면 오히려 밥을 먹지 않게 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인은 “沒事吃飯, 有事瓣事(일이 없을 때는 밥을 먹고, 유사시에는 일을 본다)”라고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아주 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어의 ‘沒事吃飯’은 평범한 말이지만 그 속에 스며있는 중국 문화의 근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신세를 질 때 식사를 하자고 ‘친절’하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부탁할 일이 없는 평상시에 밥을 같이 먹으며 느긋하게 친분을 쌓으면서 지켜나가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부친이 생산대의 회계로 일할 때의 일이다(회계는 생산대의 주요 권력자의 한 사람이다). 이 생산대에 속한 한족(漢族) 한 사람이 명절이나 부친의 생일, 또는 우리 집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음식이나 금일봉을 찾아오곤 했다.

그러기를 1년 넘게 하더니, 어느 날 중학을 졸업한 자기 자식을 생산대의 인력거꾼으로 써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산대의 인력거꾼은 당시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좋은 일자리였다. 당시 부친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다. “중국 사람들의 속이 하여튼 우리보다 깊어, 그래서라무니, 부탁을 들어줘도 속이 시원하단 말이야”하며 부친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국인들은 보통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어야 할 일이 생기면 “식사 한번 같이 할까요?”하는 제의를 한다. “식사를 같이 하자”는 “부탁할 일이 있다”의 대용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즉, 한국인은 “沒事吃飯”이 아니라 “有事吃飯”(일이 있어야 밥을 먹는다)”이다. 식사 대접도 신세질 날의 사나흘 전이나 하루전, 심지어 당일에 한다. 더러는 식사대접을 할 것처럼 하다가 하지 않고 먼저 신세를 진 다음에 “한번 잘 모시겠습니다.”하고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더냐 하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한국인은 중국인보다 속이 얕다.

속이 깊고 얕은 것은 당연히 전통문화가 깊고 얕은 데서 기인한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중국보다 얕은 것은 구태여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중국인도 상하이인이나 남방인이 베이징인이나 북방인보다 속이 얕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 “沒事吃飯, 有事瓣事”의 함의(含意)를 터득해 현실적으로 행동에 옮겨보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정인갑 / 청화대학 중문계 부교수, 중화서국(中華西局) 사전편집실 주임
출처 / 베이징저널 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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