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산둥선교
한국교회가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한 것이 국내에서 행한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였다면, 중국 산둥(山東)성 선교는 한국교회가 외국 땅에서 행한 첫 번째 타문화권 선교였다. 물론 한국교회가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만주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1908년 3월에 조선선교연회를 조직하고, 9월에는 남감리 선교연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이화춘 목사를 간도 용정촌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10년에는 미감리교 조선연회에서 배형식 목사와 손정도 목사를 남북 만주에 파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동포를 위한 선교사역이었다.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9월 총회를 조직하였고, 이때 52명의 목사들 가운데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산둥성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때까지 한국교회의 선교는 한반도 밖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한국장로교회가 산둥성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이전의 한국인을 위한 사역들을 더 이상 해외선교 사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중국 산둥에 있는 중국인들을 위한 사역만이 순수한 해외선교로 간주되었다. 한국교회는 이때부터 선교사를 외국 땅에 있는 외국인들 가운데 사역하기 위하여 보냄 받은 자로 보기 시작하였다.
중국 문화의 발상지 산둥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가 파송한 세분의 목사와 그들의 가족은 중국 산둥성에서 중국어로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한국인의 윤리의 표준이 된 중요한 문화를 전하여 준 중국인들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갚기 위해, 공자와 맹자의 출신지요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산둥을 첫번째 선교지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문화유산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산둥 사람들은 복음에 매우 배타적이었다.
한국장로교회는 그 넓은 산둥성 108개의 현 가운데, 미국장로교회 사무실을 통하여 중앙에 있는 라이양(來陽)현(현재는 시)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당시 미북장로교가 이미 라이양에서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이들은 너그럽게도 이곳에서 철수하기로 하였고 한국 선교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선교부가 사용하던 유리한 소유지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중국노회는 각 방향으로 10마일(16km) 이내 지방을 책임지도록 하였고, 그 후 한국선교사들이 성공적으로 일하자 노회는 보다 넗은 지역을 선교지로 지정하여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장로교회가 파송한 세 가정의 선교사는 함께 라이양현은 한국교회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지가 되었다.
한국선교사들은 라이양에 자리를 잡자 곧 그 지역에 있는 관리들을 방문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예의 표시였으나 그 결과 중국 관리는 한국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서민들의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와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선교사들은 도착한지 3년째 되던 해에 세 명의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섯 명의 교인들과 합하여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을 떠나고 유능한 새로운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교회의 사역은 급성장하게 된다.
협력선교의 모델
1917년에 방효원, 홍승한, 1918년에 박상훈, 1931년에 김효순, 1937년에는 방지일 선교사가 각각 파송되어 산둥성 선교를 이어나갔다. 특히 2대 선교사인 방효원 목사는 라이양현 주변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담당하면서 조선선교사회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 라이양 남관에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1923년 말의 통계를 보면 세례교인 519명, 교인수 815명, 25개의 예배처, 19개의 자립하는 학교, 335명의 학생들, 10개의 교회건물, 22개의 성경공부반이 있었다. 선교 20년 만에 한국의 선교지구 안에 단독 노회를 설립하였고, 30년이 되는 1942년에는 35개 교회에 세례교인 1,716명을 얻는 당시 중국선교사상 최대의 기록을 남겼다.
그 후 1957년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추방될때까지, 8명의 목사와 한 명의 여전도사를 위시하여 여러 명의 의사, 교사 등 평신도 조력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던 산둥성 선교사역은 근대 중국교회사에 괄목할 기록으로 남는다. 즉 1933년에는 우리 선교사들의 수고로 개척되고 키워진 교회들이 라이양 노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전체 중화기독교회 126개 노회 중 하나로 수 천명의 서구선교사들이 이룩한 업적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이대영 선교사는 선교지의 전란과 본국이 일본 압제로 말미암은 극심한 어려움 중에 있음에도 27년간(1922~1948)이나 선교지에서 충성하였고, 방지일 선교사는 서구 선교사들이 철수하거나 추방된 공산화가 된 선교지를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던(1937~1957) 선교사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산둥선교는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인들의 첫 타문화권 선교로서, 중국교회들과 중국에 있는 서양선교단체들과의 협력 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교단을 설립하지 않고 중국인 교회에 가입하여 사역하였다. 또한 그들의 사역은 본국 교회 선교부의 감독하에 이루어졌으며, 본국 총회 선교부는 여러 차례 선교현장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지도하였다. 중국에 파송된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 글자를 잘 알았고, 간 지 2년만에 중국어로 설교를 할 만큼 언어에도 뛰어났다. 특히 그들의 사역은 종합적인 팀사역이었기에 우리들에게 좋은 본이 된다.
라이양을 방문하다
중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내 마음 속에 어느날 갑자기, 한국교회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선교하여 괄목할만한 선교열매를 맺었던 그 곳에 가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다. 지금 한국교회의 선교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그리고 그 열매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폐쇄된 중국교회 상황에서 얼마나 알아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땅에 온 선교사로서 선배 선교사들의 열정과 사역을 배우고 싶었다. 당일날 새벽, 나는 라이양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방문할 곳에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현지 지도자의 안내를 받으며 함께 아침에 일찍 출발하였다.
오랜 시간 끝에 라이양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이미 중소도시로 발전되어 있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막연하게 찾아왔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그곳에 있는 아무 교회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찾은 곳이 시장 부근에 있는 하나뿐인 공인 삼자교회였다. 시장 앞 가까이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교회 위치를 묻고 있는데, 마침 옆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자기가 바로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물었다.
우리는 그 가게에서 과일을 사먹으면서 그 아주머니로부터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16년 간 그 교회에 출석하였기에 교회 역사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3년 전 여자 장로가 들어오자 교회에 분란이 생겨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은 남자 장로가 있으나 여전히 평안하지 못한 형편이라고 한다. 또 라이양시에도 이단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특히 ‘동방번개교(東方之閃)’가 극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교회에 갔을 때 문은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한 자매가 나와서 방문이유를 묻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겨우 허락을 받아 교회 안으로 들어갔는데, 허름한 교회 내부에 약 80석 정도 되어 보이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주일이면 2부 예배로 드리는데 자리가 꽉 찬다고 한다. 라이양의 선교사역에 대해 알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그 자매는 어딘가론 두어 번 전화를 하더니 우리가 자기들과 교제하는 교회가 아니므로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때 시장에서 만났던 아주머니가 교회로 들어와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고 생각했는지 안절부절하면서 우리의 정체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지 사역자가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적었던 쪽지를 빼앗더니 돌려주지 않았다. 분위기가 바뀌어 우리는 갑자기 수상한 사람으로 몰렸고 쫓겨나듯이 그 교회에서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했다.
복음의 여운은 남아
그때 과일가게 아주머니의 이야기 가운데, 이 전에 그 교회에 다녔던 모 장로가 라이양시 농화원(한국으로 말하면 농업진흥소)에 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농화원을 찾아가 수소문 끝에 그 장로님 댁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분은 뜻밖의 불청객인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목사였으며, 모태신앙인이었던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우파분자로 몰려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신앙을 지켜왔다는 것이었다. 농화원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나 개인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는 먼저 그에게 라이양시의 교회 현황에 대해 물었다. 공인교회는 한 곳 밖에 없으며 처소교회의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알기로는 한 부락에 2~3개의 처소교회가 있으며 농촌에 교회가 많이 개척되어 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오래전에 이 지역에 들어와 활동한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직접 한국 선교사들을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병원과 학교를 세워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많은 복음의 발자국을 남겼으며, 그 여운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선교사인지 미국 선교사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장마 때 홍수가 나서 강을 건너다가 순교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전해 준 90세가 된 노 형제를 소개해 주었다. 아마 이분이 라이양의 선교역사와 한국 선교사들이 활동한 지방이나 집까지 소상히 알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앞으로 계속 서로 교제하기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 집을 나왔다.
우리는 모 장로가 소개해준 노 형제를 찾아 가기로 하였다. 택시를 타고 주소지를 찾아 약도를 보고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집을 찾았다. 이번에는 전혀 반응이 달랐다. 나이 드신 이 어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더니, 공인교회 지도자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는냐고 했다. 그런 것은 없고 단지 몇 마디 물어보려고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소개해준 모 장로라는 분의 이름과 직접 그린 약도를 보여 주었다. 이분은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 줄 수 없으니 당장 나가라고 하였다. 단지 이 지역 선교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싶을 따름이니 경험을 조금 나누었으면 한다고 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사갖고 간 음료수마저도 기어이 되돌리셨다. 우리는 어르신께 혼줄이 나고 쫓겨나고 말았다. 그 분의 방안에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의 이름이 적힌 액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정부와 어떤 긴장관계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상황에서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만, 이곳까지 찾아온 우리를 이렇게까지 냉대하는데는 섭섭하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라이양시를 방문하였으나 한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이양 구석구석마다 그들의 선교열정과 헌신이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니 신 예수 바(伱信耶蘇吧: 예수 믿으세요)”라는 그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때 세워졌다는 학교나 병원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고, 그것도 미국 선교사가 세웠는지 한국 선교사가 세웠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
러나 한국선교사들이 뿌렸던 복음의 씨앗이 바로 지금 라이양시 부락마다 세워진 교회의 초석이 되었으며, 수많은 복음전도자들을 배출해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선교열매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진리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선배 선교사들의 선교의 열정과 헌신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과연 나는 사역지에서 얼마나 헌신을 심고 있는가? 나의 사역지에도 괄목할만한 선교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지혜롭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가? 이번 라이양시 방문은 나의 사역을 다시금 돌아보며, 선배 선교사들의 영성을 본받아 그들의 사역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시대의 중국 복음화를 바라보며,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일할 것을 다짐해본다.
정한 | 중국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