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 12:43)
사진에 찍히는 자보다 찍은 자를 기억하라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이 영화로 만들어져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원래 ‘최후의 유혹’이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실 때 너무나 큰 고통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리라는 인간적인 심정을 작가가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만일 주님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세상은 영원히 희망을 잃었을 것이다.
선교사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지도 떠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많은 것들로 인해 늘 유혹을 받고 살아간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이 이런 유혹으로 시작되었듯이, 선교사인 우리도 선교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여러 가지 유혹이 시작 된다. 필자도 부족한 사람으로서 이런 유혹과 24시간 365일, 그리고 긴 세월을 싸우며 보내왔다. 때로는 곁에 있는 동역자들과 나를 비교함으로써 강하게 밀려오는 유혹들을 어떻게 이길까 고민하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하며 수없는 싸움을 싸웠지만 지금도 시계바늘의 초침처럼 다가오는 유혹의 속삭임을 부인할 수 없다.
더 나은 선교지의 유혹
가야 할 선교지를 택하기까지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주 앞에 드린 헌신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결정을 해야 할 마지막 순간까지 유혹이 쉴새없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좀 더 살기 좋은 나라, 시골보다는 도시, 도시 중에서도 조금 더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 이렇게 좀더 좀더 하며 생활환경이 나은 곳을 찾게 된다. 미전도종족을 향한 도전 앞에는 소명 자체가 흔들린다. 5대양 6대주에 일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유럽도 선교지요, 미국도 선교지인데 굳이 살기 힘든 미개한 곳(?)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선교지를 선택하지는 않는지…. 중요한 것은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그곳으로 가야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선교비의 유혹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언제부터인가 선교하면 돈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성경은 전대도, 배낭도, 옷도 두벌 이상 갖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선교비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날마다 선교비를 기대하며 선교비가 나오는 통로에 민감해있다.
역설적이기는 해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선교비를 많이 받는 만큼 선교는 못한다. 반면 선교비가 없는 만큼 하나님의 역사는 풍성하게 나타난다고…. 외국 선교사들은 돈 많은 한국 선교사들을(소수이겠지만) 부러워한다. 그러나 선교사가 늘 깨어 있어서 선교비를 잘 쓰지 않는다면, 그는 돈으로 인해 게으름을 피우거나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질 수도 있다. 돈으로 선교한다면 선ㄱ지에서 배척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돈으로 많은 사람을 얻을 수도 있지만, 결국 많은 중요한 사람들을 잃을 수 있다. 좀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는 유혹은 선교가 끝날 때까지 계속 선교사를 따라 다닐 것이다.
선교보고의 유혹
WEC의 창시자 스터드(C. T. Studd)도 선교 보고서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부족한 필자도 지난 날 사역 초기 때의 선교보고서를 읽어보니 낯이 뜨거운 부분이 있어 부끄럽다. 선교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함으로 오는 과장된 부분들과,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진시로가는 거리가 먼 거짓 보고서를 보게 되었다. 선교사에게는 영웅적으로 선교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싶은 강한 유혹이 늘 잠재해 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슬람 선교의 아버지 사무엘 젬머(Sammel Zwemmer)의 마지막 선교보고는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나이다” 라는 한마디였다. 우리도 이런 진실한 모습으로 스스로의 허물을 드러내며, 부족한 모습을 나타내는 솔직하고 정확한 보고서를 만들 수만 있다면….
삶의 유혹
모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살 집을 찾다가, 비교적 싼 가격에 좋은 집을 구하고 나서는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 잠을 설치는 것을 보았다.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비싼 집이 아니라고 설명해야 하니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 늘 두렵고 불안했다. 고국을 떠날 때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사온 것들도 감히 꺼내 놓고 쓰지 못하였다.
이외에도 노동력이 싼 현지에서 겪어야 하는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조금 더 편안한 집, 고장이 안 나는 새 차, 집안 청소나 잡일을 시킬 수 있는 가정부나 파출부를 두는 일 등이 그것이다. 함께 동역하던 서양 선교사가 집안 일을 현지인에게 맡기지 않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던 것이 생각난다.
현지인을 고용하면 몇 가지 장점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현지인에게 집안 일을 시킴으로써 계속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둘째는 선교사가 집안 일에 투자하는 정열과 시간을 복음전파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삶의 유혹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삶의 유혹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바쁘고 돈에 여유가 있어도, 동역자의 입장으로서의 고용이 아니라면 고용은 섬김의 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버트 케인도 그의 책에서, 가정부를 두는 것이 선교사의 생활 중 일부라고 당연하게 진술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싶다.
데이빗 보쉬(David Bosch)의 말대로 성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 올바른 선교라면, 우리는 현지인보다 조금 더 갖고 있는 것 때문에 오는 끊임없는 유혹들을 이겨야 한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현지인들은 부러워하고 욕심을 낸다. 현지인들의 수준에 나를 맞추면 쉽게 그들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될 수 있다. 좋은 신발, 좋은 시계 등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한다. 우리가 주님의 선교방식을 따라간다면 선교현장에서 벤츠 차를 타고도 자유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것이 중고로 헐값에 구입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자녀교육의 유혹
모 선교사는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치려는 심정으로 두 자녀를 데리고 미전도종족을 찾아왔다. 우선 언어를 익히는 동안만 수도에 머무르다가 언어가 가능해지면 원래의 목적대로 미전도종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공부를 마친 후 자녀를 바라보니 막막해졌다. 이 아이들을 누가 맡아줄 것인가? 결국 그 선교사는 자녀교육을 위해 도시에 남게 되었고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자 아이들을 날마다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아예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언어로 인해 부모가 당한 고통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자녀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 싶어한다. 자녀를 위한 좋은 학교를 찾다가 결국 미국이나 영국 등지로 비싼 휴학을 보내는 선교사도 있다. 한국으로의 전학은 아예 포기했다. 이렇게 된다면 장래 한국의 선교 지도자들은 누가 될 것인가?
자식에게 최고의 교육 혜택을 베풀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희생이 없는 선교는 가짜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버드, 옥스퍼드,l 캠브리지, 예일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선교보다 자녀교육이 우선이 된다면 아예 선교지를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것도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명예의 유혹
캐나다의 나이아가라 폭포 옆의 한 마을 어귀에 이런 구절이 적힌 비석이 있다. ‘모년 모월 모일, 허드슨 테일러 이곳을 다녀가다.’ 얼마나 선교사가 귀했던 시절인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 나라만 해도 7,000여 명의선교사가 있으니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곳도 없다. 이제는 선교사가 흔한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한 교회 주보에만 이름이 올라가도 영광인 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명예욕의 유혹을 쉽게 떨칠 수 없다. 지부장, 지역장, 국장, 과장, 사무총장 등의 직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선교영웅’이 되고픈 유혹이다. 이런 유혹 때문에 생겨나는 프로젝트성 선교나 각개전투식 선교가 도리어 선교의 효율성을 막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과장된 선교보고와 선교모금을 위한 선교사의 교회 방문은 오히려 교회나 동료들을 피곤하게 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존경스럽다.
선교사들이여!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이라는 찬송가를 가슴으로 불러보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재환 | 아프리카 감비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