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의 겉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런 얼굴, 그다지 크지 않은 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전형적인 아시아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아차 하면 외국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아무렇게나 여행하기 쉽다. 하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우리와 다른 생활 습관,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닌 엄연한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인(商人)이란 말은 원래 중국의 ‘상(商)나라 사람’이라는 말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商이란 한자에는 원래 ‘의논한다, 흥정한다’는 뜻이 있다. 중국어에는 「샹량(商量)」이란 말이 있는데 ‘의논한다, 흥정한다’는 뜻이다. ‘샹타오(商討)’란 말도 ‘의논한다’는 뜻이다. 중국 상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흥정 습관을 가지고 있다. 흥정을 시작할 때 우선 손님에게 “가격을 먼저 제시해 보라”고 말하는 수가 많다. 상점에 가서 “이거 얼마냐? ”고 물으면 “얼마 낼 건지 (네가) 먼저 말해 보라”고 한다. 파는 가격이 얼마인지 주인인 자신도 입도 벙긋하지 않고 손님더러 먼저 가격을 말해 보라니…. 이 대목에서부터 한국인들은 당황한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면 중국 상인들은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속으로는 “아, 별로 가격 흥정 준비 없이 온 손님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흥정은 대부분 손님에게 불리한 결말을 맺는 일이 많다.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중국의 상인들은 대개 자신이 팔 수 있는 가격의 네 배까지를 가격이라고 매겨 놓는 일이 많다. 그러니까 가격표가 붙어 있는 시장통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1,000위안(元)이라고 붙어 있다면, 용감하게 200위안 정도로 시작해서 250위안 정도에 사면 큰 실패는 안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장에서보다도 훨씬 큰 용기와 간담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물론 가격 표시제를 실시하는 백화점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중국인들은 대체로 우리보다 말이 많은 편이다. 술도 별로 마시지 않으면서도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자기 주변의 참으로 사소한 일들에 관해 쉴새없이 얘기를 한다. 우리처럼 나라 걱정이나 정치 문제나 거창한 주제를 놓고 떠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저 TV는 어떤 것이 좋고, 아무개는 외제 텔레비전을 샀는데 화질이 어떻고 가격은 어땠으며, 나중에 수리는 어떻게 했다는 등 사소한 정보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교환한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은 자신이 무슨 물건을 살 계획이 있으면 사기 전에 이웃이나 친구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눠, 어떤 수준의 물건을 어떤 가격에 사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생각한 뒤에 마침내 상점이나 시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 습관은 정치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는 “결정하기 전에는 무슨 의견이든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결정된 뒤에는 다른 말 말고 따라야 한다.”는 말이 의사 결정의 원칙처럼 되어 있다. (우리는 혹시 과감하게 먼저 결정하고 나중에 뒷말을 하는 편이 아닌지 모르겠다.) 13억이 사는 중국 대륙이 그런대로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고 정책에 관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데는 이런 중국인들의 평소 생활 습관이 바탕이 돼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인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친구나 이웃들과 평소에 지나치리만큼 많은 의견 교환을 하는 생활 습관은 해외 여행 때도 나타난다. 중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 한국 여행 비자를 받기 위해 오는 중국인들 대부분은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온다. 그러나 한국 주재 중국 대사관에 중국 여행 비자를 받으러 오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너도나도 급행료를 지불한다. 또한 많은 한국인이 비자를 받기도 전에 비행기표부터 사놓고는 비행기표를 들고 와 중국인 영사들에게 비행기표를 흔들어 보이며 “급하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내일까지는 꼭 비자를 달라”고 통사정하는 광경이 일상처럼 벌어진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이런 일 처리 때문에 아무 것도 불리할 일이 없는 중국인들과의 상담이나 협상에서 괜히 불리한 입장에 놓이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왜 중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시간’인데 우리에게는 왜 늘 ‘시간이 없는’건지 참으로 궁금하다. 물론 중국인들은 일상 생활을 깔끔히 정리하지 않은 채 꾸려가는 듯하다. 중국인들이 어떤 일은 미리 준비하고, 어떤 일은 정리나 준비없이 아무렇게나 하는지는 좀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지금까지의 결론으로는 대체로 자신에게 커다란 이해 관계가 걸렸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기준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데스크탑 컴퓨터 모니터의 퓨즈가 터졌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220V이고 서울 본사에서 보내 준 데스크탑 모니터는 110V용이었는데, 변압기에 연결된 110V용 스위치 보드에 플러그를 꽂아야 할 것을 그만 220V용에 꽂은 것이다. 나는 퓨즈를 사러 나섰다. 지금이라고 별로 나아진 것도 없지만 2, 3년 전만 해도 중국의 거리에서 퓨즈를 파는 가게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반나절을 헤맨 끝에 조그만 전기 부품 가게에서 모니터에 사용할 수 있는 퓨즈를 ‘판다’는 참으로 반가운 말을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말 놀랄 일이 벌어졌다. 바둑알을 담는 통보다도 더 큰 통 속에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퓨즈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03A용이었는데, 중국인 가게 주인이 내민 통 속에는 0.4A짜리, 0.5A짜리 등이 전혀 분류되지 않은 채 한 통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퓨즈가 든 나무통을 내 앞으로 쑥 밀어 놓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뒤져 가며 한참을 찾아야 했다.
중국인들끼리 살아가는 대원칙 중 하나는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가 앞서 가고 자동차가 그 뒤를 따라가는 경우 비켜주는 자전거는 그리 많지 않다. 답답한 자동차 운전자가 참아야 한다. 좌우 회전을 하는 차량을 직진 차량이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도 보통이다. 또 관공서 민원 창구에 공과금을 내려면 반드시 끝자리까지 맞춰서 잔돈을 준비해 가야 한다. 민원 창구 공무원은 잔돈이 없다며 공과금을 안 받으면 그뿐이다. 공과금을 내지 못하면 얼마 안 가 전화가 끊어지고 가스가 끊어진다. 그래서 중국인들과의 상담이나 협상에는 사전에 세심한 준비와 두둑한 배짱이 필수 요건이다.
발췌: 『중국 중국인 똑바로 보기, 박승준 저, 조선일보 사』 중에서
이 글은 저자의 승인하에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