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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  통권 61호  필자 : 주영찬  |  조회 : 2190   프린트   이메일 
[현지에서 온 소식]
치파오를 입자

중국에 헌신한 지 벌써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그 동안 중국에 대해 많은 책을 보고, 그들의 문화를 공부하고, 직접 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렇지만 아직도 중국은 여전히 나에게 알지 못하는 나라로 남아 있다. 사실 중국에 관해서는 장쩌민(江澤民)도, 주룽지(朱鎔基)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작년에 중국의 총리인 주룽지가 정부 관리들에게 “이제 인민들이 믿을만한 통계를 발표하자.”라고 다그친 적이 있다.

이처럼 중국이라는 나라는 베일에 싸여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중국을 아는 것을 게을리한다면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실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국선교에 왕도가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쉐이떠우 뿌쯔다오(誰都不知道).”라는 대답 밖에 없다. 즉 누구도 무엇이 왕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일민족 문화권인 우리에 반해서, 중국은 300여 개의 다민족 문화와 13억이라는 거대한 인구, 그리고 거대한 인구, 그리고 거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 사역하는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사역전략이 다르고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중국의 사역자로서, 몇 가지 부분에 대하여 실수를 통해 얻은 산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니 완러마?” - 선교사에게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

한국에 와서 언어 때문에 실수한 외국인 선교사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 선교사는 한 교회의 송년예배에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다함께 송년 예배를 드립니다. 이 밤이 지나면 이 년이 가고 새 년이 옵니다. 오는 년을 맞이함에 있어 새 년과 함께 보낼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듯 지나간 년을 과감하게 정리하여야 할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던 송년예배가 이 선교사의 실수로 인해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 선교사는 ‘해’와 ‘년’을 잘못 사용하여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타문화권 사역자로 가서 언어를 배우는 수습 선교사에게는 한 번쯤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필자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중국에 와서 막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언어학교 근처에 있는 목공소에 가서 정수기 상자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어는 나에게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손짓, 몸짓을 통해서 겨우 주문을 끝냈지만 목공소 측은 바쁜 일 때문에 자꾸 지연해서 정한 날짜에 만들어주지 않았다. 첫 번째, 두 번째 들렀을 때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세 번째 목공소에 들렀을 때 용기를 내서 “니 완러마(你完了吗)?”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목공소 종업원이 마구 웃는 것이었다. 나는 그 종업원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언어교사에게 문의를 했더니 “니 쭈어완러마(你作完了吗)?” 라고 했어야 하는데 잘못 표현했다고 알려주었다. 동사를 빼먹은 것이다. 그래서 뜻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다 만들었느냐?”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만 “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느냐?”라는 욕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목공소 직원이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성질이 괴팍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 날이 나의 초상날이 될 뻔했다.

선교사가 처음 현지에 도착하게 되면, 크든 적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문화충격을 받게 된다. 이 같은 문화충격의 경험 중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요소는 결국 언어이다. 만일 언어를 잘 알고 있다면 문화충격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언어를 배움에 따라 소외감, 무기력감 등은 점점 줄어들고 어느 새 현지인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 반대로 언어를 배우지 않고 시간이 계속 지나가면, 생활상의 기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장기간 흘러 갈 수 있다. 그리고 심리적인 압박감과 소외감, 무기력감이 높아질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단일 민족 문화권에서 자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다른 문화권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는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언어를 배우지 않고 복음 전하는 것에는 너무 큰 한계가 있다. 언어는 의사 전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현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러므로 사역지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혹자는 통역자를 내세워서 사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얼마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선교사가 선교지 언어를 배우지 못한 경우, 정상적인 타문화 사역을 하지 못하고 편법적인 수단으로 사역하게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즉 자신이 직접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사서 사역을 하기 쉽다.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역보다는 외관상 드러나는 프로젝트를 통해 드러나 보이기를 원할 것이다. 결국 이런 사역자들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자

필자가 중국에 헌신하고 나서 중국에 들어가기까지만 해도 중국인을 향한 나의 사랑이 누구보다도 뜨겁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뉴스를 듣고, 중국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뜨겁고 벅차오르는 감격을 종종 느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막상 중국에 들어간 후 약 1년이 지나자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이 싫어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대할 때마다 나의 생각 속에 있는 잣대로 그들을 열심히 재곤 하였다. 남을 속이기 좋아하는 부정직한 모습, 자주 씻지 않는 모습, 아무데나 마구 침 뱉는 모습하며···. 이런 것들은 나의 비판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 사람들은 왜 이래?”라는 비판조의 말들로 바뀌게 되었다. 중국인을 품고 사랑하기 위해 온 나에게 그들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바뀌고 만 것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의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지시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다는 의미는 선교사에게 시사하는 영적인 부분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자기가 자라왔던 환경과 문화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문화의 배경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정한 순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사무엘 모펫은 “사랑은 선교의 기본이지만 순종은 선교의 실천”이라고 했다. 곧 순종을 통해서 선교가 실행되는 것이다. 마치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셨던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순종이 없으므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적인 문화와 세계관으로 그들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기준으로 본(emic view) 그들은 모두가 바뀌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바뀌어야 할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닌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내가 가나안의 시선(etic view)으로 그들을 보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지역과 환경에 맞게 발달되어 온 그들의 문화를 하루아침에 한 개인이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것보다 더 무모한 것이다. 우리 용감한 한국 사람들은 이런 용기를 과감하게 펼쳐 보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사명이라는 이름 하에 더욱 더 그렇게 하기를 즐겨한다.

‘치파오’를 입자 -복음은 중국인의 문화에 상황화 되어야

중국에서 전도할 때 그들에게 종종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보았는가?” 라고 질문하곤 하였다. 그럴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 그것 서양종교 아닌가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어보았다. 이 대답은, 적어도 믿지 않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생각 속에 기독교라는 것은 서양인의 종교로서 자기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 즉 기독교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들이 이렇게 인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중국에 있으면서 국악인 임동창 씨의 강의를 비디오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동양의 음악과 가락 중에서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의 가락은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띠고 있다고 했다. 그의 예화 중의 하나가 우리가 즐겨 불렀던 ‘두꺼비 동요’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이 동요의 가락은 일본식과 우리나라 것이 엄격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즐겨 불렀던 가락은 일본식이 우리에게 접목된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강의를 통해 필자는 내가 사역하는 소수민족의 문화를 인식하는 데 큰 동기를 발견했다. 내가 사역하는 소수민족 문화를 연구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회교 사원, 즉 모스크를 방문하고 나서 회교가 중국인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일반적인 모스크의 형태는 모두가 지붕이 둥그스런 돔 모양을 띠고 있다. 둥근 돔은 회교 사원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모스크는 이런 모양이 아니다. 한 결 같이 불교의 절(寺) 모양을 하고 있다. 이름도 아예 칭전쓰(淸眞寺)라고 해서 절 이름으로 바꾸었다. 즉 이슬람이 중국적인 문화에 맞게 변형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둥그런 지붕이 절 모양이 되었다고 해서 모슬렘의 근본적인 교리가 바뀌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가락이 한국인에게 맞는 것처럼 중국인에게 맞는 중국인의 가락이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본질이 변해서는 안되지만, 그들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인이 한복을 입을 때, 일본인이 기모노를 입을 때, 중국인이 치파오(旗袍)를 입을 때 안정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교회하면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십자가를 내 걸지 못하는 곳도 많다. 가령 회교권이나 티벳지역에서 십자가를 내 걸었다가는 돌맹이 세례를 받기에 알맞다. 이런 지역은 상황에 맞게 교회의 모습도 변화되어야 한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는 이처럼 중국인화 되기 위해 노력했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해안에 머물러 있을 때 중국인이 입는 치파오를 입고, 채두변발을 하고 중국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한국의 개척교회 문화나 모델을 더 이상 중국에 심는 것은 우리가 중국의 상황과 문화를 알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아니 우리의 교회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것을 그대로 전수한다면 기독교는 여전히 ‘서양종교(외래종교)’로 남을 것이고, 그들의 민족을 구원하는 종교로 인식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자기들과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외국 사람이 자기 나라에 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몇 명의 원주민들이 선교사에게 가서 세례를 받아주었다. 그 몇 명의 세례받은 자들로 인해 감격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 선교사는 이 사실을 본국의 파송교회에 보고했다. 이렇게 감격하는 선교사를 보면서 원주민들은, “세례를 받는 것이 선교사에게 그렇게 기쁜 일인가? 그러면 선교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매주 세례 받아주겠다.”고 한 일화가 있다.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선교사역은 어떤 것일까? 한 사람이 주님을 영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까?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믿어주는 중국 사람을 필자는 많이 만나 보았다. 우리는 어쩌면 세례를 받아주겠다고, 믿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인해 기뻐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님의 말씀처럼 진정한 기쁨은 마귀가 쫓겨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현지인들의 세계관의 변화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화와 현대화의 물결로 인해 다양해지고 있는 중국의 문화와 세계관을 연구하여, 문화인류학적인 통찰을 가지고 복음을 상황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중국 민족 가운데 가득한 그 날까지 말이다.

주영찬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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