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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  통권 61호  필자 : 메이쩡즈(梅增知)  |  조회 : 2122   프린트   이메일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 교회 국내 선교사역의 역사정 과정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신 선교 사명에 있어서 그 당시 진행순서는 예루살렘→유다→사마리아→땅 끝(행1:8)이다. 다시 바꿔 말한다면 선교사역의 발전과정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문화와 문자를 공유하는 본토에서, 그렇지 않는 타문화 지역으로 발전해 갔다l. 이 선교전략이 중국 국내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면서 그 단계는 현지→인근 도시지역→전국 각지→전세계의 순서대로 되었다. 중국 내 선교사역의 과정을 회고해 보면 이 네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환경과 조건적인 제한으로 중국 내 교회가 국격을 넘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는 없었지만, 선교전략의 앞 세 단계는 비교적 큰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 내 교회는 중국 가정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삼자교회의 정책은 복음사역을 단지 교회 내로 제한하기 때문에 ‘선교’라는 말을 논할 수 없는 상황이다.

 950년대 각 성(省)에서 가정교회들이 일어났다. 그 당시는 교회의 성립에 대해 감히 고려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선교사역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각 가정교회 집회는 몇 가정이 핵심이 되어 친숙한 이웃과 신도들이 합하여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엄중한 박해가 있어서 가정교회 사역은 암암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여행통제가 심하여 왕래가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비록 신앙의 자유를 운운하기는 했지만 전도는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고 교회는 자연히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전도사들이 개별적으로 인근 도시나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를 제외하고는 교회의 국내 선교사역은 기본적으로 첫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즉,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주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

1970년대 초, 중국 사회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왕래가 가능해지면서 각 지역 성도들 간의 상호 교제가 활발해졌고, 이는 각 지역의 교회사역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선교사역도 제2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인근 도시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얼마 가지 않아 정부의 통제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통제가 가정교회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못했으나, 각 교회 간의 왕래가 제한을 받다보니 선교사역의 제2단계로의 발전에 괄목할만한 성과는 이루지 못하였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사인방(四人幇)이 쫓겨나자 중국의 사회활동은 큰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명확하게 신앙의 자유정책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 정부는 이전과 같이 종교활동을 박해하고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년간 박해 속에 신앙을 지킨 각 지역의 신도들은,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허락하신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수년 간 문혁이 가져온 위기감은 더욱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사명감과 긴박감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일순간에 가정교회는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성도들의 열심도 복음사역 중에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정부, 당,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나름대로 큰 위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복음사역은 전에 없는 큰 열매를 거두었고 성도 수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감동적인 상황에서, 연로한 많은 성도들이 비록 물러날 나이가 되었지만 과거 수년의 아픔과 복음의 빚을 안고 자발적으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대다수 인근 도시, 혹은 같은 언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로써 현지에서 시작된 복음이 발전하여 전면적으로 인근 지역에까지 전파되는 제2단계 선교 사역의 큰 계기를 이루었다. 가정교회의 사역도 더 이상 집회소와 몇몇의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다운 모형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자발적으로 전도하는 사역자들을 중심으로 더 큰 범위로 교회가 확산되었고 여러 집회장소와 연결되기도 하였다. 

1979년을 전후로 하여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석방되어 나오면서 중국 교회의 선교사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의 영향력과 교회 내의 관계가 서로 밀접해지면서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고 이로써 국내의 선교사역은 점차 제3단계인 전국 범위로 발전되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가정교회와 자유전도는 크게 흥왕하였고, 여기에 석방된 사역자들까지 합세하여 자신들의 사역범위를 재정립하게 되면서 서로간의 경쟁과 성도 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아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더욱 열심히 일하자.” 이에 먼 지역의 성도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전국 각지로 왕래하면서 교회는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다. 이제 중국 교회는 제3단계인 전국적 범위의 전도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 교회는 환경적인 제약 때문에 자유롭게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제4단계의 세계선교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많은 가정교회들이 일찍이 전국적 범위의 전도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정교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역자들은 사역의 범위를 현지나 인근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복음을 중국 전역에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교회의 선교모형

상하이(上海) 선교모형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크고 번영한 도시로 전국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도 수는 인구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가정교회도 대부분 작은 규모이다. 그러나 신도 수에 비해 교회 사역자가 비교적 많고, 그들의 문화수준, 신학기초, 사역경험도 비교적 풍부해서 전국 각 지역의 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상하이에서의 전도사역은 주로 사역자 중심으로 각 지역의 사역을 연결하고 있다. 처음에는 몇몇 은퇴한 노사역자들이 70년대 후기에 자신들의 고향이나 인근 도시에 복음을 전하였다. 80년대부터 많은 사역의 선배들이 감옥에서 석방되어 사역에 다시 참가하게 되면서, 그들은 더 넓은 지역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선교사역 또한 전국 각지를 대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원저우 교회와 비교하여 상하이 교회는 큰 교회와 많은 성도 수라는 배경 없이 주로 사역자들의 은사와 재능으로 각 지역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허난(河南)성 교회의 선교모형과 비교할 때, 상하이 사역자들은 도시 생활에 익숙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지역도 많다. 그래서 고생과 어려움을 잘 견뎌내며 강인한 지구력을 가진 허난 교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온 사역자들 가운데는 영적으로 깊이 있고 견문이 넓은 이들이 많아 환영을 받고 있다. 그들은 각 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적 권위를 가지고 초지역적인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상하이 사역자들은 중국 교회 지역선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원저우(溫州) 선교 모형
60년대 초에 부흥하여 문혁의 대환난을 거치면서 원저우 교회는 더욱 성숙해졌다. 70년대 들어 많은 성도들이 사업차 출장 근무의 기회를 통해서 각 지역 성도들과 연락하기 시작하였다. 80년부터 사회경제의 개혁바탕을 틈타 원저우 교회도 전면적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인근의 도시에서 전국으로 발전하였는데 주로 아래와 같은 경로를 통하였다.

(1) 원저우 지방경제는 주변 도시들 중에서 비교적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외지인들이 원저우에 와서 일을 하고 있다. 원저우 교회는 처음에 이 외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는데, 이들을 위한 전도대회, 차량동원, 모임 후 식사제공 등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 고용주가 되는 성도는 자신의 고용인들이 복음집회에 참석하도록 격려하였고, 심지어 집회 참석 수당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복음이 외지 노동자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원저우 교회는 이들의 주소를 받아서 사역자들이 그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돕게 하였다. 몇몇 외지 노동자는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사역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적극적으로 권면하기도 하여 그 가족들과 이웃들이 믿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2)원저우 지역의 일용품 생산은 중국 내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상품들은 전국 각지로 판매되며, 원저우 사람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좌판을 벌이며 돈을 벌기도 한다. 80년대부터 시작하여 원저우 상인들의 행적은 전국 각지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믿는 성도로서 각자 자신의 지역으로 가서 그들의 지방장언으로 유대를 이뤄 교회를 세우고, 서로 간의 긴밀한 연락과 협조로 주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한다. 동시에 그들은 원저우 모교회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원저우 교회에서 사역자를 파송하여 함께 일을 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전파, 새집회장소 설립뿐 아니라 이미 세워진 교회의 사역을 더욱 공고히 한다. 이로써 원저우인들의 행적이 전국으로 이어지고, 원저우 교회의 선교사역 또한 전국 범위로 발전하고 있다.

(3) 60년대부터 시작하여 원저우 교회는 신도들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할 뿐 아니라 교회 조직관리상에 있어서도 앞선 발전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들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 조직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풍부한 인력과 물질은 선교사역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원저우 교회의 국내 선교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80년대 초 허난(河南)교회도 원저우 교회로부터 인력과 물질의 도움을 입었다.

원저우 선교모형의 특징은 사역자들이 큰 교회와 많은 성도 수를 뒷받침으로 하여 성도들이 주동적으로 복음전파 사역에 참여하고 있고, 사역자들간에 상호협조하여 봉사함으로 원저우 선교모형은 중국 교회의 선교사역이 제3단계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허난(河南)선교 모형
중국 교회의 부흥을 논할 때 대체로 원저우와 허난 교회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지역의 교회가 중국 교회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나타낸다. 허난성은 중국에서 본래 빈곤 지역에 속한다. 과거 황허(黃河)와 화이어(淮河) 두 강이 자주 범람하여 수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허난 사람들은 매년 몇 개월은 외지의 성으로 가서 생계를 이어가곤 했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 허난 선교 모형의 방법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허난 교회는 개인의 간증과 경험을 중시하는 반면, 신학적 기초는 비교적 부족하다. 따라서 허난 교회 사역 모형은 대체적으로 개인의 경험을 전하는 방식으로 국내 선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들의 장점은 전도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열심히 전파한다는 것이고, 특별히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잘 적응하여 정한 목표를 달성하고서야 귀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부분 파송된 사람들의 신학적 기초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급한 마음으로 초신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는데, 그들은 금방 배운 몇 가지 이외에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지식도 없고, 진리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지식이 없고, 진리에 대해서 그들 자신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 있기도 하다. 그 결과 진리에 있어 한쪽에만 치우친 면이 있고, 심지어는 이단에 쉽게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도들에게 특별한 영적 추구 또는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한다. 그러한 것들을 모방하려는 것 자체가 그들 사역의 한 부분이며, 사역의 영향력을 넓히는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현지 교회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현재 중국 내 몇 개의 주요 이단은 거의 허난성에서 발원하였거나 아니면 허난성이 주요 근거지가 되고 있다. 그들이 겸허하게 진리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사역을 한다면 선교사역에 있어 중요한 영적 군대가 되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 기회로 G형제과 그의 동역자들이 사역 도중에 신학훈련을 받았는데 그들은 허난성에서 사역하던 사람들이었다. G형제는 허난성 F현의 사람으로 현지 교회의 사역자였다. 수년 전 교회에서 그를 파송하여 외지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도록 하였는데, 그에게 달랑 주소 하나와 이름만 주어 보냈고, 그는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당시 이 지방에 와서 기거하였다.

그는 그저 기거할 장소면 있고 굶주리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 있다면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었다. 그 후 집회를 시작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사역에 대한 사명감도 확실하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어느 곳이라도 찾아갔다. 몇 년 간의 사역 결과, 그들의 사역 범위는 3개 성, 2백여개의 집회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들이 새로 세운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원래 있던 집회소를 이어 받아 인도한 것이었다.

이들의 사역방법은 찬양과 경배였다. 신자가 있든 불신자가 있든지 간에 가는 곳마다 자매들이 율동과 찬양을 한다. 이러한 사역은 문화생활이 결핍된 농촌에서는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원의 진리에 대한 신학적 기초가 없기 때문에, 불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고 알게 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찬양과 경배를 하던 중 G형제는 마음속 깊이 진리 탐구에 대한 열망이 일어났고, 함께 사역하던 사람들과 같이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적합한 지속적인 훈련과정이 없었다. 이 때 나는 그들에게 큰 격려와 도움이 되었다. 이전까지 그들은 이와 같은 훈련을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허난에서 온 사역자들은 열심히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고 훈련을 마친 후 여러 곳에서 복음사역을 훌륭히 감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회의 선교사역은 전국 각지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세계선교의 강인한 군대

이상 세 가지 선교모형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단지 이 세 지역의 교회와 전도인들만이 중국 내 선교사역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최근 몇 년 간 전국 각지의 성도들이 주동적으로 복음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선교모형은 각 지역의 동역자들간에 보편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중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그들 사역의 열심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과거 100년 동안 세계선교 사역에 있어 중국은 계속하여 수혜자의 입장이었으나,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지금 중국의 성도들은 선교 사역에 있어 부담감을 가지고 그 나름대로 사역에 동참하여 열매를 거두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지금도 가장 큰 선교지로서, 여러 해 동안 해외 교회들이 중국을 향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고 그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로 지켜볼 때 중국 내 선교 사역은 여전히 중국 성도들이 직접 감당해야 할 것이다. 최근 실제적인 훈련을 통해 해외선교에 대한 의식을 강화하였고, 또한 풍부한 선교경험이 축적되었다. 언젠가 환경적인 조건이 허락된다면 그들은 분명 세계선교의 강인한 군대로 세워지게 될 것이다.


 

출처 | 『展望中華』1999년 4월호, 6월호
<中國國內敎會在宣敎事工上的歷程>

번역 | 정유경 ·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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