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는? 사전적 의미로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한 나라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한 나라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우선합니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은 지역이 광대하고 역사가 유구한 나라입니다. 중국학자들은 보통 중국 문화를 제도문화, 물질문화, 정신문화 등의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눕니다. 제도문화에서는 정치, 경제, 관직, 종법(宗法), 과거, 교육, 결혼 등의 분야를, 물질문화에서는 의복, 건축, 교통, 과학기술 등의 분야를, 정신문화에서는 학술, 종교, 문학, 예술 등의 분야를 다룹니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중국의 어떤 문화 산물을 대표하는 (또는 처음 시작했던) 인물들을 통해 중국 문화를 이야기합니다. 그 ‘문화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중심으로 배경을 이해하고, 그의 생애와 활동을 발판으로 관련된 문화의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진시황(秦始皇)과 통일제국 진시황은 천하를 가졌지만 가정사는 불우했습니다. 자신의 실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성장했고, 어머니는 난잡한 남자관계를 즐기는 여인이었습니다. 진시황의 최대 업적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점입니다.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10년 동안 한(韓)나라→조(趙)나라→위(魏)나라→초(楚)나라→연(燕)나라→제(齊)나라 등 여섯 나라를 무력으로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는 이로써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770~221) 500여 년 동안 제후(諸侯)들이 할거하여 전쟁을 벌이던 국면을 끝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군주 중앙집권 국가를 건립합니다. 천하를 통일했을 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皇帝)’라는 칭호로 자신을 부르게 했습니다. 지방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분봉제(分封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여, 중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눠 행정 관원을 두어 천하를 통치했습니다. 법률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레의 궤 폭을 통일했으며, 문자의 서체를 통일했지만, 법가를 제외한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폐기해서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왕희지(王羲之)와 서예 글씨를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 왕희지입니다. 왕희지라는 이름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중국의 서예가 중국 문화의 정신을 뚜렷하게 드러낸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왕희지(王羲之, 303~361)는 고대로부터 진(晉)나라까지 전해 내려오던 서예 기법을 집대성해 서성(書聖)으로 추앙받습니다. 그의 서예가 풍기는 미학은 한마디로 ‘유려한 아름다움’으로 정리됩니다. 왕희지의 글씨는 역대로 중국 제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남조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그 첫 번째 인물인데, 그는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서예 작품을 1만 점 넘게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당나라 태종 이세민입니다. 그는 천하의 왕희지 작품을 모두 사들이라고 명해 2,290점을 모은 뒤 그것을 모두 자기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따라 왕희지의 친필은 세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당 현종(玄宗)과 음악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762)는 당나라의 6대 임금입니다. 현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제정한 연호가 개원(開元)으로,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현종은 당나라를 번영으로 이끌어 이 시기를 ‘개원의 치세(治世)’라고 부릅니다. 현종은 음악에 관한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 듯합니다. 그는 음악 이론에 정통해 작곡할 수 있었고, 호금, 피리, 갈고(羯鼓)와 같은 각종 악기를 손수 연주하기도 했답니다. 현종이 자주 연주한 악기 가운데 하나는 갈고였습니다. 갈족(羯族)에게서 유래한 갈고는 양가죽으로 메운 양면을 두 개의 나무막대기로 두드리며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리듬이 빠르고 격렬한 데다 음량이 풍부해 빠른 가락의 악곡에 적합합니다. 그래서 전장에서 병사를 고무하는 악기로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갈고는 악기의 특성상 악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아마 현종 또한 악대를 지휘하고 훈련할 때 직접 갈고를 연주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현종이 중국 음악에 미친 영향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현종은 궁중 연회용 음악인 연악(燕樂)을 발전시켰습니다. 둘째로 현종은 법곡(法曲)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기관으로 이원(梨園)을 설치했습니다. 법곡은 관현악과 가무가 결합한 대형 가무곡 가운데서도 특히 우아하고 악곡이 뛰어난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 현종은 작곡가로서 여러 곡을 편곡하거나 작곡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현종은 즉흥적인 작곡에 능해 각종 악기를 활용해 연주하는 곡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곽희(郭熙)와 산수화 중국에서 산수화가 발전한 데에는 위진 현학의 영향이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진 시대에 들어와 산수가 심미의 대상이 되고, 사람의 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산수를 추구하는 주된 목적이 됩니다. 이는 장자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예술 분야에서 자기가 편안히 나아갈 세계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예술가가 추구할 일이고, 그 대상이 산수라는 인식과 맥을 같이합니다. 곽희는 북송(北宋)의 화가 겸 회화 이론가로, 자는 순부(淳夫)이고 지금의 하남성 맹주(孟州)시 사람입니다. 평민 출신으로 초년에는 도교를 신봉하여 산수를 벗 삼아 유람하다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1068년 송나라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화원(畵院)으로 들어가 소전병풍(小殿屛風)을 그렸고, 후에 한림대조직장(翰林大詔直長)의 벼슬을 지내며 궁정화원의 대표적인 화가로 명성을 날립니다.
곽희는 산수화의 가치를 이렇게 논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산수를 벗 삼아 노닐며 속세를 초월하고 너그러운 심성을 기르는 것이 군자가 정신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두가 산수에 은거한다면 세상을 이끌어갈 사람이 없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부득이하게 조정에 몸을 두더라도 산수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산수를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산수화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순화시키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어서 곽희는 산수화를 어떻게 배울 것인지에 대해 전통과 자연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전통을 배울 때는 한 사람의 대가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두루 섭렵한 뒤 자신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전통보다 더 강조한 것은 자연입니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문화를 이끌어 왔던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세대를 이어서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위에 소개한 몇 사람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공자, 노자, 장자, 오자서, 굴원, 조고, 진승, 사마천, 관우, 완적, 장화, 갈황, 혜능과 선종, 이백, 두보, 왕안석 등과 쑨원, 루쉰으로 마무리됩니다. 글의 꼭지마다 ‘생각할 거리’를 제시해서 중국 문화를 더욱 깊게 들여다보고, 우리 삶이 중국 문화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