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9월 22일부터 29일까지 제4차 로잔대회가 인천 송도에서 열렸다. 이번 제4차 로잔대회는 “2050년까지 모든 열방 제자화와 세계 형성이라는 목표 아래 세계교회가 촉매가 되는 협력을 이루기 위해 로잔이라는 플랫폼에 따라 추진되는 다년간의, 글로벌, 다중심적 프로세스”였다. 이번 호와 다음 호 특집으로 제4차 로잔대회를 다루려고 한다. 이번 호는 제4차 로잔대회를 통해서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귀한 글을 써 주신 오형국 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세계교회가 함께 더 광범위하게, 더 낮은 곳을 향한 섬김의 여정을 쉬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호 목차] I. 제4차 로잔대회는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1. 로잔운동의 성격: 선교운동이며 동시에 신학운동 2. 2024년 현시점의 영적 상황판단 3. 복원해야 할 로잔의 전통 1) 회개와 개혁의 모티브 2) 급진적 제자도의 전통 3) 간과되어 온 케이프타운의 성취 (1) 우선성(priority), 궁극성(ultimacy) (2) ‘21세기 교회개혁’과 “HIS” Ⅱ. 제4차 로잔대회는 “무엇을 했는가?” 1. 서울 선언(Seoul Statement) 2. 격려와 교제(empowering & connection) 3. 이슈 그룹 [다음 호 목차] III.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복음주의의 새길” 1. 20c 한미 복음주의의 신학과 세계관 비판 - Ra Seung Chan(라승찬)의 Next 복음주의 1) 개인주의의 영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 2) 자본주의와의 동일시 3) 강자친화적 기독교 _재봉건화 2. Next 복음주의의 담론과 운동: INFEMIT 1) 변혁적 제자도(Transforming Discipleship) (1) 화해와 총체적 선교 (2) 계급 사회 속의 그리스도 2) OCMS(옥스퍼드 선교연구훈련원) _무관학교 3) Regnum Books _무기고 4) Stott Bediako 포럼 3. 한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와 선교, 어디로? 들어가는 말 로잔운동의 50주년이기도 한 제4차 로잔대회는 2024년이라는 현시점이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복음주의 선교운동이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시기였으므로 이 대회를 통해서 의미 있는 전환의 계기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고,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개최지가 한국이며 또한 국제본부 대표가 한국계라는 특이점 때문에 한국이 로잔운동의 발전에서 뭔가 기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제 서울 로잔대회가 종료되고 여러 가지 보고와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전반적으로 로잔운동의 여러 맥락이 입체적으로 조망되기보다는 각자의 입장과 관심사에 따라 자화자찬과 비판적 분석이 엇갈리고 있다. 개방적인 정보공개가 없었고 인간적·정치적 관계에 걸려 심층분석의 의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로잔운동을 하나의 신앙 전통으로 바라보는 다맥락적 접근보다는 대체로 대형 집회 운영의 효율성, 현장의 만족도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70년대에 태동한 로잔운동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적 가능성의 비전과 신학적 기준을 제공했다. 그러므로 로잔4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21세기 복음주의가 처한 역사적 전환기에 그러한 임무를 수행했는가를 척도로 삼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글은 중복을 피하고자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가능한 한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1) 4차 로잔에서는 무엇이 이루어졌어야 했는가? 2) 4차 로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3) 로잔 이후의 복음주의는 어떻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가? I. 로잔4는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1. 로잔운동의 성격: 선교운동이며 동시에 신학운동 “선교는 신학의 어머니(mission is mother of theology)”라는 말이 있다. (G. 바르넥) 근래의 많은 선교집회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성찰(re-thinking mission) 또는 상상(re-imagining)을 표제로 내걸고 있다. 진정한 신학은 데이비드 보쉬의 정의대로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맞닥뜨림(encounter with the world)’ 속에서 일어난다.1) 선교적 사건 속에서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는 복음의 표현양식(a formula)을 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50년 전 로잔운동의 출발 역시 과거의 선교적 관행을 단순재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선교의 모라토리엄 등 교회 안팎의 도전 속에서 세계선교의 신학과 전략을 구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해는 특히 도식적 전도와 양적 성장주의에 익숙한 한국교회에 절실하다. 이미 90년대에 풀러(Fuller)신학교의 찰스 벤 엥겐 교수는 한국과 같은 젊은 교회(young church)일수록 선교의 사상가(thinker)가 필요하다고 조언했으며, 랄프 윈터 박사는 1995 서울 세계선교대회(Global Consultation on World Evagelization, GECOWE ‘95)에서 한국이 향후 21세기에 선교대국이 될 것이지만 연구와 훈련의 인프라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로잔4에 대한 평가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학적 방향성에 무관심하며 선교운동으로만 인식하는 이들은 선교적 동기부여와 격려, 현장 사역을 위한 네트워크 (connection) 관계 형성, 감성적 영성 부흥, 사상보다 헌신의 자세 고양, 억압된 심령에서 자신감의 회복 등을 중시한다. 이러한 입장은 선교사역의 내용에서 개종주의의 좁은 인식이 주를 이룬다. 이들에게 문서는 중요하지 않다. 리더십도 특별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문서는 이정표 로드맵, 즉 지도와 같은 것이다.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이라는 책에서도 보듯이 현 위치 파악, 이미 지도가 그려진 지역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도 지도는 필요하다. 2. 2024년 현시점의 영적 상황 판단 ‘20세기 복음주의’의 위기는 단순하지 않다. 도덕적 자세를 가다듬고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하는 방식의 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1970년대 로잔운동이 시작될 때는 서구 중심 선교에 대한 모라토리움(실행 유예)이 거론될 만큼 기독교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면 복음주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상세한 논의를 이 지면에서 다 할 수 없지만 풀러신학교 라승찬의 《The Next Evangelicalism》(2008), 데이비드 거쉬(David P. Gushee)의 《After Evangelicalism》(2020) 등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이 요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구원론에서나 세계관에서 철저히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으며, 둘째 20세기의 자본주의 확장 시대에 형성된 복음주의는 기독교와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신념과 성향을 보이게 되었고 소비주의 문화에 탐닉하였다. 셋째로 교회성장주의와 맞물려 사회적 강자와의 유대를 추구하는데 이는 미국에서는 인종주의와 연계된다. 미국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평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남부의 바이블 벨트 지역 교회들은 남북전쟁(1861∼65) 이전에도 노예제도를 정당화했고, 짐 크로법(Jim Crow Law) 등 인종주의를 옹호하는 등 사회적 정의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을 계기로 80%를 넘는 자칭 복음주의자들이 신앙과 도덕의 진정성보다 당파적인 선택으로 투표했다는 사실이 나타나면서 복음주의의 정치화 문제가 심각히 대두되었고, 이는 Evangelical이라는 명칭 자체를 계속 사용할 것인가를 심각히 논의할 정도가 되었다. 이는 일부 비판적 집단의 논의가 아니라 미국교회의 주류 신학자들의 아젠다가 되고 있다.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는 2016년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1970년대 초반 대학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 시절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견고한 근본주의 사고방식의 대안을 의미했다. 그 후에 나는 장로교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고든-콘웰 신학교에 진학했다. 이 신학교는 그레이엄(Graham), 해롤드 오켄가(Harold Ockenga), 하워드 퓨(J. Howard Pew) 등의 신복음주의자들(neo-evangelicals)이 설립한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이 운동의 뜨거운 에너지는 결국 1990년대 중반에 미국 기독교회의 지배적인 분파인 주류 개신교를 침식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복음주의자”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지만, 이제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위선자”와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내가 1970년대에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내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나를 이렇게 부른다면, 나는 근본주의자라는 뜻이 된다.2) 한국에서는 개신교회를 향한 ‘개독교’, ‘노답’ 등의 풍자언어와 태극기를 상징으로 한 정치적 극우와 연계된 노령의 기독교인들, 이러한 교회를 떠난 수백만의 가나안 성도, 청년층에서 기독교인 인구가 3∼5%에 불과한 현상 등 한국교회의 모습과 비교할 때 높은 기시감을 느끼게 됨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3. 복원해야 할 로잔의 전통 1974년의 로잔 언약과 일련의 문서들은 개신교 신조의 역사에서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후 가장 중요한 신앙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잔의 희년, 즉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로잔의 전통들 가운데서 그동안 간과되었으나 오늘의 영적 과제를 위해 더 깊은 성찰과 천착이 필요한 요소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었다. 1) 회개와 개혁의 모티브 제1차 로잔대회는 사회적 책임 사역을 복음전도와 분리하며 소홀히 한 것을 회개함으로 시작했으며, 마닐라 제2차 로잔대회에서는 국가 단위의 관점에서 놓친 미전도종족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했다.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의 선언문 기초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현대선교의 최대 장애물은 다름 아닌 교회 자체라는 역설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현실을 직시하며 회개와 21세기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로잔에서 천명된 회개의 메시지들은 “∼로부터(from)”에서 그치지 않고 “∼을 향한(to)” 내용을 제시한 면에서 의미 있다.3) 이러한 맥락에서 “총체적 선교를 추구하는 한국 복음주의자들(KEEIM)”이 발표한 입장문의 회개 조항은 한국교회가 돌이킬 것과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고백하며 이후에 지향할 방향을 제안하고 있다.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으나 근래에 가장 급격하게 퇴행과 감소를 하는 한국교회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겸비하게 자신의 허물과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세계교회에도 타산지석이 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입장문 3항 “우리의 회개” (1) 한국교회는 성장주의, 개교회주의, 리더들의 윤리적 실패와 권력의 사유화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일상과 신앙의 분리, 세속적 성공 추구, 개인화된 신앙, 종교적 소비주의 등의 모습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총체성에서 벗어난 교회의 모습을 방조해 왔음을 회개합니다. (2) 한국교회는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에 처한 이웃들의 고통에 둔감했습니다. 또 분단 체제 속에서 자라난 갈등과 대립의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살아내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3) 총체적 선교는 죄악 속에 고통당하는 인간과 피조세계의 다차원적인 필요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교회가 선교를 개인 전도와 해외선교로 제한하고, 사회적 관심과 행동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새로운 필요와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총체적 선교의 구체적 담론개발과 실천에서 동떨어져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4) 생태계를 파괴하면 인간의 미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인류는 무한 탐욕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생태계를 망가뜨려 다음 세대가 살아갈 미래를 빼앗고 있습니다. 환경파괴의 이면에 각종 착취와 유린과 불평등이라는 구조악이 있지만, 우리 역시 생태적 정의 실현에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기도와 영성 부흥으로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로잔준비위원회가 대형 기도대회(2023.7)를 조직하였지만,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궁핍한 실상에 대한 회개의 깊은 성찰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주의와 승리주의 시대에 풍미한 축제(celebration)의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보다 여전히 우위에 있지 않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4) 2) 급진적 제자도의 전통 로잔운동은 1974년의 제1차 로잔대회 중 르네 파디야(René Padilla) 등 남미 복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 제자도 선언(Theological Implication of Radical Discipleship)”을 발표한 바 있으며, 2010년 제3차 로잔대회가 열린 케이프타운에서도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선언문 외에 대회 중 전체 집회 강연을 통해 “21세기 종교개혁의 필요성: 겸손, 진정성, 검약적 단순성(Humility, Integrity, Simplicity)”을 발표했다. 존 스토트는 《Radical discipleship》을 유작으로 남겼고,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설교도 곳곳에서 관행과 현상 유지를 타파하는 급진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장외에서 “아파르헤이트 애가(Apartheid Lamentation)” 등 회개와 개혁을 위한 담론을 산출해 왔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변혁적 선교를 주창하는 INFEMIT(Interna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sformation)가 조직되었다. 존 스토트가 지원하고 르네 파디야, 콰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등 다수 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이 연대하였다. 이것은 단지 인적 연대만 아니라 연구훈련 기관인 OCMS(Oxford Center for Mission Studies)와 콘텐츠를 생산하는 Regnum Books를 운영하며 세계 기독교와 다음 세기의 복음주의를 위한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건강한 교회와 헌신적이고 경건한 개인들의 사례가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평판은 심히 부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제의 원천(upstream)으로까지 올라가 본질을 개혁하는 급진성(radical)을 기피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의 현저한 예시는 존 스토트의 유작 《Radical discipleship》이 원제목대로 번역되지 못하고 <제자도>로 표기된 경우에서 찾아본다. 건전하지만 차이를 만들어 낼 영향력이 없는, 이른바 ‘안전한 무딘 칼’이라고 할 것이다. 3) 간과되어 온 케이프타운의 성취 2010년 3차 케이프타운 대회는 몇 가지 중요한 성취를 남겼다. 그러나 이 대회 직후 로잔운동 1세대의 인물들 다수(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 르네 파디야, 로날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 등)가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하면서 적어도 로잔 지도부의 신학적 연속성은 단절을 겪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존 스토트와 남미 복음주의자들의 전통은 사라지고 빌리 그래함의 미국적 복음주의 전통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케이프타운 대회 이후 2010∼2024년간 케이프타운의 성과는 지속적으로 천착 되지 못하고 거의 잊히고 만 것이다. 그러면 케이프타운의 성취는 어떤 것들인가? (1) 우선성(priority), 궁극성(ultimacy) 케이프타운에서는 전도 우선성과 총체성의 불안정한 병립에 대해 1974년 1차 대회 이후 36년 만의 해결책이 제시된 것이다. 신학위원장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 전도 우선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적 우선성과 실천적 우선성을 나누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양자의 동등한 가치를 주장하면서 우선순위를 설정한다는 것은 일관성(consistency)이 모자란 논리적 오류이고, 사역 현장에서는 전도 우선성 주장이 사회적 실천과 효과적인 창의적 선교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는 ‘궁극성’이라는 용어로써 복음 전도는 많은 바큇살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사역을 관통하는 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외형상 우선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작용해야 한다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2) ‘21세기 교회개혁’과 “HIS”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선언문 외에 대회 중의 전체 집회 강연을 통해 “21세기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발표했다. 이때 제시된 것이 HIS, 즉 겸손(humanity)과 정직(integrity), 검약적 단순성(simplicity)의 제자도이다. 이 강연은 케이프타운의 집회 중 가장 많은 조회수를 얻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Z57kCNQ6oQ 그런데 크게 아쉬운 점은 검약적 단순성이 1974 로잔 언약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1984년 Simple Life Style 문서를 비롯하여 로잔운동의 중요한 이념이었음에도 무시되고 오해됐다는 점이다. 어느 한국의 로잔집행부 인사는 Simplicity의 검약적 단순성을 신학적 단순성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Ⅱ. 제4차 로잔대회는 무엇을 했는가? 로잔대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소를 살핀다. * 신학 선언 신학 선언은 운동의 현 위치를 파악하고 신학적 방향과 선교적 실천의 비전과 전략, 추구할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 격려와 교제(Empowering & Connection) 사역 현장의 열악한 상황에서 분투하는 사역자들이 격려받고 비전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예배와 기도, 교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각자의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는 다중심성(poli-centricity)의 배려가 필요하다. *이슈 그룹 (Issue Group) 구체적인 신학적, 사역적 이슈를 놓고 실제적인 경험과 지혜를 나눔으로 실질적인 사역의 개발을 이룬다. 1. 서울 선언(Seoul Statement) 1) 의견 수렴의 절차와 발표 방식 서울 선언은 내용에서나 선언문의 작성 및 발표 과정에서 모두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발표가 대회 첫날에 이루어졌고 바로 둘째 날 수정본이 발표되었다. 상식과 관례에 의하면 로잔대회의 선언문은 신학위원회가 기초한 초안이 대회 기간 중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보완 후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서울 선언은 대회 첫날에 발표되었고, 이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자 행정상의 실수로 해명되었으나 바로 다음 날 수정안이 다시 발표되었다. 대회 기간 중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것은, 집행부의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참가자 중 300여 명의 서명으로 수정요청이 전달되었다. 여기에 크리스 라이트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부언한다. 2) 내용에서 하나님의 선교에서 교회의 선교로의 퇴행, 오늘의 영적 상황과 선교적 과제에 대한 인식의 불균형 등이 지적되었다. 집행부의 의견과 희망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신학위원회의 독립성은 매우 취약해 보였다. 신학위원장 지명에서부터 예상된 것이었다. 신학위원장은 스리랑카와 르완다에서 각 1인이 지명되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서울 선언에서는 선언문 기초자가 명시되지 않았고 신학위원의 명단 역시 비공개로 하였다. 비공개 이유는 위원들이 명단 공개를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짐작할 수 있다. 3) 서울 선언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 먼저 비교적 젊은 세대 참석자들로부터 비판적 반응이 나타났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들이다. 나는 이 문서가 새로운 세대가 선교적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케이프타운 선언처럼 ‘우리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선교에 동참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에 더 관심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수호해야 합니다.’라는 것처럼 보이고, 이것이 방어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입니다. 이 문서는 우리가 실제로 글로벌 남반구에서 씨름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 중 일부를 실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1925 강단에서 나오는 일부 사항은(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문화와 현실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글로벌 교회의 대표성이 부족합니다. ‘서울 선언’은 ‘글로벌 사우스(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개발도상국)’에서 우리가 실제로 씨름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논의되는 내용들이 특정한 한 문화와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세계교회를 대표하는 데 부족합니다. 이 문서가 다음 세대들이 선교적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동기 부여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 세대는 케이프타운 서약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에 더 관심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문서는 ‘교회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수호해야 합니다’처럼 느껴집니다. 너무 방어적입니다. 보다 종합적으로 정리된 견해는 일본 IVF의 카주사 오카야가 대회 직후 〈Church Leader〉 지에 기고한 “로잔에서 다수 세계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가 있다.5) 로잔에서 파리들의 목소리: 다수 세계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 제4차 로잔대회 폐회사에서 마이클 오(Michael Oh, 국제로잔운동 총재)는 우리에게 오물만 보고 그 속에 머물러 있는 “파리”가 아니라, 깨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보는 “벌”이 되라고 촉구했습니다. 수년 동안 저는 로잔운동과 복음주의와 사회 활동을 충실하게 통합하려는 열정에 끊임없이 격려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 5,000명이 한 장소에 모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자체로 큰 성과입니다. 하지만 비서구권에 속한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는 4차 로잔대회에서 정말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비서구권에 속한 많은 지도자가 무대 뒤에서 모여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래서 마이클 오의 발언을 들었을 때 저는 “그럼 우리가 파리인가?”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공간이 부족하여, 저는 다수 세계 지도자가 말한 요점 중 일부만 간략하게 언급할 수 있습니다.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상(Mammon of Consumerism and Capitalism)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충실히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돈을 관리하는 방법도 포함됩니다. 저는 사업계에서 일하는 모든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감사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축복이 됩니다. 직장 사역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4차 로잔대회에서 한 가지 진전이었습니다. 동시에 돈은 쉽게 우상이 될 수 있고 통제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소비주의와 자본주의가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마음을 영적으로 형성해 왔고, 형성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특히 선교가 세상 방식(또는 시장)과 얽힌 방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비서구 지도자들의 유산에 대한 축소된 표현(Diminished Representation of the Legacy of Non-Western Leaders) 로잔 50주년은 다양성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복음의 힘을 기념하는 날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묘사된 지배적인 서사는 빌리 그레이엄과 선교 동원의 유산이었습니다. 로잔 운동 전체의 형성에 기초를 둔 수많은 세계적 리더의 유산(예: 르네 파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 콰메 베디아코 등)은 무시되었습니다. 이는 다수 세계의 많은 사람이 기록하고 인식하는 서사(예: <로잔 이후의 변혁적 선교>, 알 티존(Al Tizon))와 상반됩니다. 로잔대회는 다양한 운동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서양 리더십과 동원 사역의 유산 중심으로 통합한 서사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다양성과 다중심적 성격을 수용하기 위해 정확히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세계적 대표성 부족(Lack of Global Representation in Worship ) 저는 게티스(제 아내가 항상 그들을 듣습니다)와 한국 ‘이사야 61’ 밴드의 에너지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노래의 약 80%가 서양 찬송가/예배라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다중심적 선교에 중점을 둔다면, 우리는 모두 세계교회의 노래를 배워야지 세계교회에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특히 한국 노래가 거의 불리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그리고 한국 노래는 최고의 예배 노래 중 하나입니다). 탄식(Lamentation)의 부족 제4차 로잔대회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박해에 관한 이야기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공유된 간증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공유된 직후 기쁨과 천국에 대한 가사가 담긴 승리의 예배 노래가 불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박해를 미화하거나 승리주의 속에서 고통의 현실을 흐려서는 안 됩니다. 탄식이 없는 희망은 속임수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의 대가를 깨달을 때만 오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 다음 세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디지털 세계의 발전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회의는 종이 없이 진행되었고, 회의 앱은 협업 액션 허브와 함께 기술의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상당한 디지털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소유하지 않았거나 인터넷 연결이 기껏해야 2G인 지역에서 온 대다수의 세계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협업 도구에 대한 접근이 디지털 리터러시가 높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다면, 어떻게 그들의 목소리를 포함할 수 있을까요? 침묵시킨 목소리들(Silencing of Voices) 마지막으로 루스 파딜라(Ruth Padilla)가 콘퍼런스에서 받은 대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설교 내용에 대하여 조직위원회가 설교자의 동의 없이 임의로 전 참가자에게 사과 메일을 발송했다가 항의가 있자 이에 대하여 다시 사과를 표명함 _역자 주) 식민주의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모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발언, 수퍼세셔니즘(Supersessionism)에 대한 완전한 부인 등 고통을 줄 수 있는 다른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유일하게 부정되었다가 사과를 받은 것은 이 발언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복잡한 상처를 고려할 때 의견 불일치와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향식으로 침묵하고 검열하는 것은 값싼 용서로 이어질 뿐입니다. 불편함은 단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씨앗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편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편함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파리가 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파리는 수분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파리를 없애고 생태계를 파괴하면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많이 잃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상처를 덮어주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세상과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곳을 비추기 때문에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 그리스도의 몸이 그 깨어짐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격려와 교제 전체 집회와 예배를 통한 북돋음과 교제는 참가자들 대부분이 만족하였다. 단 예배에서 서구의 찬양곡들만이 연주된 것에 대해서는 다중심적 선교 시대의 고려가 취약하였음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었다. 3. 이슈 그룹 화해, 성 문제 등 민감하고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는 소그룹에서는 귀중한 유익이 있었다. 다만 그러한 인식과 발견들이 전체적인 흐름에는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움이었다. 아래에 두 개의 이슈 그룹 참가자의 소감을 전재한다. 1) 화해 그룹 이번 4차 로잔의 특별한 경험 중 하나는 “화해”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화해에 대한 깊은 목마름에 부어지는 성경의 원리와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나사렛 평화 센터의 Rula는 그리스도인들이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Share fact - forgiveness - Justice - Shared future”로 설명했다. 나는 다양한 패널들의 전쟁과 갈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비탄을 느꼈다. 과연 Share fact가 Fair fact의 합의로 도출할 수 있을까? 나아가 용서와 정의를 넘어 공유된 미래를 그리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오늘날 민족 갈등의 사실(Fact)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서구 식민지 역사를 배경으로 함을 알 수 있다. 이번 대회 때 기도 제목으로 올라온 내용들만 봐도 그렇다. 아프리카의 말도 안 되는 국경선으로 인한 민족 갈등, 미얀마 로힝야 난민의 원인, 특히 최근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문제의 근원은 영국과 프랑스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진행했던 무책임한 식민지 정책에 있다. 제3세계는 서구의 폭력과 사랑을 함께 경험했다. 이른바 Big Stick diplomacy! 큰 몽둥이 같은 군대를 보내되 부드럽게 말하여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과 조약을 맺게 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학생 자원 선교운동 SVM의 강사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들도 그 영향력 안에 있다. 그들 중 여러 명은 조선의 광산채굴권을 넘겼고, 중국에 아편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으며, 제중원 밖에서 지나친 영리 의료 활동으로 미국 선교부의 경고를 듣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조선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식민지의 폭력과 선교사의 사랑을 함께 경험한 제3세계 교회는 공유할 수 없는 사실들을 가지고 화해자로 서야 한다. 2) Sexuality 이슈 그룹 이번 대회 세 번째 홀-미팅 오전 시간에 유튜브에서는 당시 섹슈얼리티와 젠더 주제를 발표하고 있던 본 로버츠(Vaughan E. Roberts) 목사가 동성애자로 그리고 성적 모호성을 옹호하는 자로 그에 대한 비난과 비평의 동영상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발표 중 영국 옥스퍼드에서 LGBTQ 대상의 특수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본 로버츠 목사는 자신이 청소년기부터 동성애를 느끼기 시작했으나,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이는 죄로 인해 “창조에서 성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설계(God’s original design of sexuality in creation)”를 이탈한 것으로서 “성은 거룩한 것이며, 이는 세상의 그 어떠한 세계관이나 문화의 흐름에도 변할 수 없는 말씀 계시로서, 성교는 남자와 여자에게 결혼 안에서만 허락된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이다”라고 반복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이어 이성애자들의 음란, 간통, 포르노 등을 지적하며, 이성애자들과 동성애자들을 이분법적인 선과 악으로 단순히 분리해 정죄하기보다는 우리 모두 타락한 성적 지향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함께 고백하고 회개하며, 성적 모호성을 가진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사랑과 섬김으로 적극 섬기는 것이 문제 본질에 대한 올바른 접근임을 강조했다.
본 로버츠 목사와 함께 주목되는 또 한 분의 참가자는 GAP〜12, Sexuality and Gender 분과를 3일 동안 인도한 올로프 에드징거(Olof Edsinger)다. 그는 스웨덴 복음주의 연합의 사무총장이며 정체성, 섹슈얼리티, LGBTQ를 주제로 한 책을 포함해 약 20권의 책을 집필한 전문가다. 그는 인격적인 신앙과 복음적 신학, 깊은 학문적 지식과 통찰력 그리고 목회학적인 자세로 소그룹 모임을 인도했다. 올로프는 모임 내내 10여 명으로 구성된 5개의 논의 그룹에 본인의 최종적 전략이나 제안보다는 서로를 경청하며 복음적인 해답을 소그룹이 스스로 찾아가도록 대화의 장을 조성했다. 그는 자기가 여는 말문에서 교회의 성과 젠더의 이슈는 오늘날 제3의 성적 혁명(3rd Sexual Revolution)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각으로 조명해 볼 때 이미 초대교회와 로마제국의 대립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과 젠더는 본 로버츠의 본 발표 동영상은 다음을 참고하라. ‘‘Restoring Biblical Sexuality’, https://lausanne.org/video/restoring-biblical-sexuality-vaughan-roberts(09 Oct, 2024).]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미주 1) cf.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Orbis, 1991). 2) 팀 켈러, “복음주의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Mark Noll, D.Babbington, G.Marsden eds., Evangelicals: Who They Have Been, Are Now, and Could Be(2019) 3) cf.짐 월리스의 <회개>(IVP); 박형진, “회개운동으로서의 로잔운동”, <복음과 선교> Vol. 62 (2023); 박보경, “로잔운동으로 보는 교회개혁”, <선교신학> Vol. 49(2018). 4) 축제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에 대해서는 Ra Seung Chan, Next Evangelicalism(2009, IVP). 5) Kazusa Okaya, Lausanne and the Voice of the ‘Flies’: Concerns From a Majority World Church Leaders, October 1, 2024.
▩ 사진 출처 | ttps://www.threads.net › @2030hodu
▩ 오형국 목사 | 청년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