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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  통권 266호  필자 : 김북경  |  조회 : 1916   프린트   이메일 
[기획]
중국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 핍박과 선교사 추방의 3대 사건 소고

[편집자 주]
1807년 영국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로버트 모리슨은 개신교 최초의 중국선교사로서 마카오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개신교 중국선교가 시작된 지 올해로 217년이 된다. 세계선교 역사에서 한 국가 안에서 수천 명의 선교사가 추방된 것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다. 필자는 중국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 핍박을 크게 3주기로 보았다. 첫 번째 1900년 의화단 사건, 두 번째 1950년 삼자운동(三自運動)과 문화대혁명(1966∼1976) 그리고 세 번째 기독교의 중국화로 시진핑(習近平)이 2017년 10월 제19차 당 대회를 통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종교의 중국화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며, 종교가 외세의 간섭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견지하고 있다. 알파요 오메가인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중국교회 핍박의 주기를 살펴봄으로써 중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용어 사용에 있어 ‘의화단 사건’ 또는 ‘의화단운동’을 혼용하여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이시다.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류의 타락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다. 하나님 구원 역사의 주요 기관인 교회 역사는 구원 역사이지만, 동시에 세상 역사의 궤적과 같이하며 나아간다.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핍박과 환난은 여전하지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신 예수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담대히 헤쳐 나가야 한다. 환난과 핍박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세계선교의 역사에서 한 국가 안에서 수천 명의 선교사가 추방된 것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다. 이 글은 중국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 핍박과 선교사 추방의 3대 역사적 사건을 조망하고, 오륙십 년을 주기로 핍박이 반복되었는데, 이렇게 반복된 핍박의 주기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
 1900년

 두 번째
  1950년 

 세 번째
 2017년

 의화단 사건

 삼자운동과 문화대혁명(1966∼1976)

 기독교의 중국화 


1. 의화단 사건과 선교사의 수난
중국 기독교 선교 역사상 최악의 재난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는 의화단운동은 서양의 종교와 나아가 ‘서양’ 자체를 배척하고자 했던 종교운동이었다.1) ‘순청멸양(順淸滅洋), 즉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도와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 Revive the Qing and destroy the foreigners)’이라는 구호 아래 반양교(反洋敎) 투쟁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2) 

1900년 의화단 보고서에는 “천주교와 예수교가 신성을 훼방하고, 위로 중화의 군신과 아래로 중화의 백성을 압박하였기에 신인의 분노를 가져왔다. 이에 의화신권(神拳)을 연습하여 중원을 보호하고 서양을 몰아내며 교민을 살해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라고 했다.3)

그 당시 의화단은 서양과 기독교를 동일시하여 교회와 선교사 그리고 기독 신자와 건물까지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청나라를 돕는 것(부청)과 서양의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것(멸양)은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청나라는 제국주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부청으로는 멸양이 안 되고, 멸양을 위해서는 반청(反淸)을 해야만 했다.

■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불린 선교사
제국주의가 파송한 선교사는 침략의 하수인으로 종교를 이용하여 침략 활동에 종사하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시비를 제대로 가리지 못한 채 대다수 인민은 야만적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영어로는 의화단 사건을 ‘Boxer Rebellion(권투선수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이 무술과 체조를 중요시하는 것을 보고 “권투선수(Boxer)들 같다”고 표현한 데서 이른다. 이 의화단 사건으로 4만 명이 넘는 가톨릭 및 개신교인과 선교사들이 사망하였는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의화단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중국 북서와 북동 지역의 선교지 폐쇄에만 초점을 맞춰 연구가 되었다. 

하지만 북부뿐 아니라 광둥(廣東)과 중부 지역에서도 의화단을 피해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잠정적으로 폐쇄하였고, 많은 선교사가 상하이(上海) 조계지나 일본으로 피난하였다. 결국 의화단 사건은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고 의화단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4)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의화단 운동이 발생한 것에 대해 당시 중국 선교사들은 그 책임이 본국의 힘을 빌려 선교 사업에 사용하였던 자신들에게 일부 있음을 인정하고, 1900년 9월에 뉴욕에서 초교파 선교사 대회를 개최하여 향후의 선교 방법과 선교 정책에 대해 새롭게 논의하였는데, 이때 초교파적 선교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5)

그리하여 기독교 역사가 그러했듯이 이 사건 이후 중국교회는 더 크게 성장하였다. 1900년대까지 개신교 선교사가 1,796명이었고 신자는 12만여 명이었는데 1920년에 와서는 선교사가 6,600명이 사역하고 신자는 366,000명으로 급증하였다.6) 이 숫자는 세례교인을 말하므로 그냥 출석하는 자의 신자 수를 합하면 1920년에는 806,926명이 되었다(중국 목사 수가 345명이 됨).

2. 1949년 신중국 건설과 선교사 추방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뒤 중국교회는 격변(激變)을 경험하게 된다. 우야오쭝(吳耀宗)을 중심으로 반제애국(反帝愛國), 교회혁신(敎會革新)을 근간으로 하는 신중국의 종교정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7) 그리하여 중국교회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삼자교회는 양회(兩會)의 관리를 받는다. 양회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회(이하 삼자애국운동회)와 중국기독교협회’이다. 교회 내부의 행정적인 일과 관리는 ‘중국기독교협회’가 하고, 교회 외부의 일 중에도 기독교와 관련된 일이라면 ‘삼자애국운동회’를 통해 관리하게 한다. 삼자(三自)란 ‘스스로 치리하고(自治), 양육하고(自養), 전도하겠다’(自傳)는 뜻이다.

1949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마침내 1951년에 모든 외국 선교사를 추방하기로 결정8)하였는데 이는 수천 명의 외국 선교사를 대피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의 외딴 내륙 지역에서 마지막 선교사가 되어 출국한 방지일 선교사의 생애와 사역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 중국에서 마지막 출국한 선교사 방지일 선교사
1937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총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부친 방효원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던 중국 산둥성을 중심으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졌다. 서구 선교사들은 모두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 선교사는 마지막까지 선교현장을 지켰다. 교인들이 처형당하고, 교회가 폐쇄되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5,000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공산화되면서) 나 혼자만 남아 9년을 사역했어요. 중국 정부가 홍콩으로 나를 추방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9)

방지일 선교사는 최후까지 사역했던 유일한 외국인 선교사로 21년을 사역하고 1957년 귀국했다.

◥ 추방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국 사역 동역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방지일 선교사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이가 방지일 선교사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외국 선교 운동은 끝났지만 기독교의 복음운동과 생명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듯이 회복력 있는 신자 집단이 가정교회를 이루면서 문화혁명 시기와 같은 고난의 풀물불을 잘 견디고 유지되었다.10) 그들은 선교 관련 교회와 특히 토착 독립 기독교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3. 2017년 전후로 선교사 대대적 추방
‘차이나에이드(ChinaAid)’의 설립자인 밥 푸 목사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으로 등장한 2013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제1기 집권 시기에 1,500여 개 교회의 십자가가 철거됐고, 공안들의 교회 파괴와 목회자 납치·체포·실종 등 현재 중국 기독교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 이후로 경험한 적 없었던 핍박을 받고 있다”고 중국의 박해 실태를 알렸다. 이러한 종교탄압 정책은 종교전파를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행되어 선교사들 또한 대거 추방되고 있다.11)

2017년 기준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8,875만 명인데 기독교인의 수가 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일부 통계들이 있다.12) 심지어 공산당원 중 기독교인이 나오는 것에 대해 중국 정부가 선교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실정이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시 시민 15%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중국 복음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기독교를 철저히 관리하는 걸 골자로 하는 ‘기독교의 중국화’가 진행되는 증거가 바로 선교사 추방으로 나타나고 있다.”13)

■ 추방이 아닌 하나님의 재배치
중국의 정책 변화에 따른 선교사 추방은 한국교회의 전략적 실수도 아니고 선교사 개인의 보안 조치의 실수로 발생한 일도 아니다. 결국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전략적 선교사 재배치를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비자발적 철수의 위기는 중국교회를 단련해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하며, 중국 신자들과 가정교회는 단련의 기회가 될 것임이 자명해진다.

한국선교사들의 대규모 철수는 한국교회의 지난 30여 년 중국선교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시행착오나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국교회가 지금까지 성장하는 데는 한국선교사들의 역할이 실로 지대했다. 한국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장 많았던 때는 최소 5,000명이 넘는 선교사가 사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중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한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비자발적 철수의 위기를 전략적 재배치로 풀어갈 때 우선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선교중국을 위해 계속 직간접으로 힘쓰고 한국교회는 선교중국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내외적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핍박과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흥왕해지는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망을 주는 메시지이다. 바로 임금이 일 단계는 고역을 시키고, 이 단계는 산파를 시켜 남자아이를 죽이려 하고, 삼 단계는 자발적으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하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말살 정책을 썼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날로 흥왕하고 번성하고 마침내 가나안을 향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도자 모세를 따라 출애굽을 한 것이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긴 인류 역사와 교회사 속에 빈번하게 나타났던 일이다. 특히 중국의 교회사 속에서 성도와 교회는 핍박과 잠시 평안한 시기를 번갈아 가면서 경험해 왔으며, 오륙십 년의 주기 가운데서 그 핍박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고, 알곡들을 통해 그 시대 교회가 부흥하여 30배 60배 100배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몽학 선생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아서 거대한 하나님의 선교를 꿈꾸는 우리에게 시행착오를 줄이게 하는 큰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우리가 기뻐 날뛰거나 의기소침해지기보다는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서 좀 더 조절하며, 역사의 큰 손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생과 교회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갈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미주  
1)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영어: Boxer Uprising, Boxer Insurrection, Yihetuan Movement)은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山東) 지방, 화북(華北)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2) 서양자, 《중국 천주교회사》, (대구: 가톨릭신문사, 2001년), p. 423.
3) 이은자, 《근대 중국의 반기독교운동》, (서울: 고려원, 1992년), p. 107.
4) 의화단의 활동과 행동으로 당시 국제 사회에서 ‘청나라는 미개한 국가’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동시에 해외 열강들의 잔인한 세력 과시는 그들이 난공불락이며 우월하다는 이미지를 심어놓았으며, 청나라의 자신감과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1860년대 이래의 반기독교운동에서 시작해 의화단 단계에서 절정에 이른 반외세 운동은 결과적으로 청나라 조정의 대외 의존을 심화시켰다.
5) 이혜원, 《의화단운동이 한국 개신교 선교현장에 미친 영향》,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3호 2010. 9월호), pp. 215-251. 
6) 김수진, 《중국 개신교사》, (서울: 홍성사, 1997), p. 28. 도표를 참고하라.
7) 김영산, 《중국 삼자신학》, (서울: 영문출판사, 2004) 참조하라.
8) 1953년까지 모든 개신교 선교사는 중국의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역사가 캐슬린 L. 로드윅(Kathleen L. Lodwick)은 1809년과 1949년 사이에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포함하여 약 50,000명의 외국인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에 참여했다고 추정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Protestant_missions_in_China).
9) 김철영, “영원한 현역 선교사 방지일 목사 간증”, 뉴스파워, 2007년 1월 13일. 
10) 김영산, 《가정교회 신앙과 생활》, (서울: 영문출판사, 2004), 참조하라.
11) 윤지언, “중국 내 한국선교사 집단 추방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미션투데이(2018년 8월 21일). (https://www.missio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02).
12) 한국중국선교협의회(KCMA)는 중국 크리스천(가톨릭 신자 포함)은 1억 347만 945명으로 인구(13억 5,583만 7,457명)의 7.63%에 달한다고 밝혔다. 중국 본토가 공산화한 1949년 당시 기독교·가톨릭 인구가 433만 8,900명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60여 년 만에 23.84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삼자교회(정부 공인교회) 2,870만 4,556명, 가정교회(정부 비공인교회) 5,313만 9,279명 등 8,233만 4,875명에 달했다. 가톨릭 인구는 삼자교회 737만 4,118명, 가정교회 1,327만 4,886명 등 2,113만 5,070명으로 집계됐다. 
13) 장창일, “중국의 선교사 추방 사태 대안은 선교사 재배치”, 국민일보, 2018년 12월 3일.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889656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889656).







사진 설명 및 출처 | (아래) 교회 간판과 십자가가 부서져 있는 모습. ⓒ오픈도어 [크리스천투데이 재인용]
 김북경 선교사 | 고신대 선교목회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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