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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3  통권 264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303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중국의 개항과 개신교 선교(4) 선교 기반 확대

개항 이후 개신교 선교의 성과
개항 이후 중국에서는 영국과 미국 개신교 각 교단에서 선교사를 대거 파송하였고, 다른 나라 개신교단에서도 중국선교에 속속 가담하였다. 1846년 스위스 파색회(巴色會, The Basel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아 광동에서 선교를 개시한 함베르그(T. Hamberg), 레체르(R. Lecher)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개항 이후 개신교 선교는 개항장에 거점을 두고 복음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 의료기관, 구제시설 등을 개설 운영하면서 중국에서의 선교 성과를 올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1960년 북경조약으로 중국 내 선교가 완전히 자유롭게 허용되기 전 중국에 진출하여 활동한 각국 개신교단 선교회는 20여 개, 선교사는 150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내지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기 어려운 환경이어서 중국인 신도의 양적 질적 성장은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중국인으로서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중국 개신교회 확장에 중요한 기여를 한 대표적 인물로는 양발, 양진덕, 하진선, 용굉 등을 꼽을 수 있다. 

양발 
양발(梁發, 1789-1855)은 양아발(梁亞發)로도 불리는데, 광동 광주 서남방에 인접한 고명현(高明縣) 농민 출신이다. 그는 광주로 이주하여 붓 만드는 일과 목판인쇄의 일을 하던 중 1812년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어로 번역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등을 인쇄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기독교에 접근하게 되었다. 1815년 밀느 선교사가 말라카로 사역지를 옮길 때 함께 이주하여 문서 인쇄 사역의 실무적인 조력을 하였고, 1816년 11월 3일 밀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는 1814년 로버트 모리슨에게서 세례를 받은 채아고(蔡亞高)에 이어 두 번째 개신교 중국인 신자로 기록된다. 1819년 결혼한 후 1820년에는 그의 아내 여(黎) 씨가 세례를 받아 개신교 중국인 최초의 여신도가 되었고, 그의 아들 양진덕(梁進德)은 최초의 유아세례 교인이 되었다. 

                                         ▲양발 [사진 출처 | 바이두]

양발은 말라카 영화서원(英華書院, Anglo-Chinese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1823년 모리슨에게서 중국인 최초의 전도인으로 광주로 파송받았으며, 1826년 모리슨에 의해 목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그는 고천청(古天靑)과 함께 광동 고명현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서방 과학지리 지식을 교육하였다. 1834년 모리슨이 죽은 후 당국에 체포당하였으나 브릿지만의 도움으로 풀려난 뒤 다시 말라카로 가서 문서 선교사역을 이어 나갔고, 1839년 광동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1855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문 교리서들의 저작 출판에 힘써서 중국 개신교 초기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19년에 출간한 《구세록촬요약해(救世錄撮要略解)》는 37쪽의 소책자이지만, 십계명과 시편 등 성경 구절들을 포함하여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지침을 담았고, 중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전도 서적으로 기록된다. 이어 1828년 광주에서 출간된 《숙학성리약론(熟學聖理略論)》은 자신이 가지게 된 기독교의 신앙에 관한 자술을 담았고, 1829년 말라카에서 출간된 《진도문답천해(眞道問答淺解)》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소개하였고, 1831년 출간된 《성경일과초학편용(聖經日課初學便用)》은 영외학회(The British & Foreign School Society)가 편찬한 성경교재를 중문으로 번역한 책이다. 

1832년 광주에서 출판된 《권세양언(勸世良言)》은 235쪽에 9만 자로 비교적 충실하게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담은 책인데, 뒤에 태평천국을 건국한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에 대하여 본격적인 접근을 하게 한 책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구복면화론(求福免禍論)》으로 책 이름을 바꾸어 싱가포르에서도 다시 출판되었다.

양발은 문서 출판 사역뿐만 아니라 직접 전도에도 열성을 보였다. 1830년에는 같이 일하던 인쇄공 굴앙(屈昻)에게 전도하여 세례를 받고 선교사역에 동역하게 하였으며, 1831년에는 부친 양충(梁沖)도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 등 그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 10여 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교정책이 유지되고 있던 당시 직접적인 대면 전도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그는 친분을 통한 전도, 문서를 통한 전도의 방식을 동원하였다. 특히 과거 시험장에서 응시자들에게 서적을 나누어 주는 일을 중점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태평천국 홍수전도 과거 시험 응시 후 그가 배포한 《권세양언》을 받아 접하게 된 것이다. 양발의 아들 양진덕은 브릿지만이 운영하던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뒤에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의 통역원을 거쳐 해관(海關)에 근무하며 중국 양무 사업에 일조하였다.
  
하진선, 용굉
하진선(何進善, 1817-1871)은 그의 호를 따서 하복당(何福堂)으로 더 알려져 있으며, 광동 불산(佛山) 남해(南海) 출신이다. 부친이 말라카 영화서원에서 조판공으로 일하는 동안 하진선도 영화서원에 입학하여 레게 선교사 등으로부터 신학과 히브리어, 희랍어 등을 배웠고, 졸업 후 레게 선교사의 교육 사역과 선교 업무를 도왔다. 1843년 레게 선교사가 영화서원을 홍콩으로 옮길 때 동행 귀국하여 그를 도왔고, 1846년 10월에는 홍콩의 합중예배당(合衆禮拜堂)에서 런던선교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양발에 이은 두 번째 중국인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은 후 존 찰머스(John Chalmers, 湛約翰, 1825-1899) 선교사와 함께 고향 불산에 교회를 세웠다. 그의 자녀들은 일찍 서구 학문을 접하면서 뒤에 두루 중국 근대화 과정에 큰일들을 맡게 되는데, 그중 하계(何啓)는 런던 유학을 다녀온 뒤 향항아려씨의원(香港雅麗氏醫院)을 설립하였고 뒤에 개혁파 지식인으로서 명성을 알리게 되었다.

                                       ▲하진성 [사진 출처 바이두]

용굉(容宏, 1828-1912)은 광동 향산현(香山縣) 출신으로 홍콩의 모리슨학교에서 귀츨라프 부인, 미국선교사 브라운(S.R. Brown) 등의 지도를 받았다. 용굉은 1847년 브라운 목사가 미국으로 귀국하는 일정 때 동행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만손 아카데미로 전학하였고, 1850년 예일대학에 입학하고 1854년 졸업 후 중국 해외 유학의 선구를 이루었다. 용굉은 양무관료 증국번(曾國藩)의 막료로서 중국 학생들의 중국 유학을 적극 건의하였고, 뒤에 워싱턴 주재 공사관에서 중국 유학생 감독관을 지냈고, 중국 개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용굉 [사진 출처 | 바이두]

다양한 선교
이 시기 개신교 선교단은 복음 선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육 부문에서는 각급 학교를 개설하여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근대 지식 문화의 중국 전파에 기여하였다. 1851년 미국성공회가 상해에 설립한 남자학교는 상해 성요한대학(聖約翰大學)으로 발전하였고, 1859년 미국 이미회가 복주에 세운 볼티모어여학교(Baltomore Female Seminary)는 중국 최초의 여학교로 기록되고 있다. 

의료 부문에서는 각종 의료시설을 개설 운영하면서 중국인들의 건강 구제를 도왔다. 미국 장로회 하퍼가 1851년에 개설한 시료원, 광동에 개설한 안과병원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출판 부문은 내지 선교가 막혀 있던 상황에서 선교사역의 중점을 이루었다. 

1843년 매드허스트가 개설한 묵해서관(墨海書館, London Missionary Society Press)은 1860년까지 약 171종의 서적을 출판하였는데, 그중 약 80%인 138종이 기독교 서적이었고, 나머지는 서학 소개 서적이었다. 

1844년 미국 장로회 콜 선교사가 마카오에서 창설한 오문화화성경서방(澳門花華聖經書房, The Chinese and American Holy Classic Book Establishment)은 1845년 영파, 1859년 상해로 옮기면서 상해미화서관(上海美華書館,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으로 개칭되었다. 1858년부터 실무를 맡은 윌리엄 갬블(William Gamble, 姜別利, 1830-1886)은 중문 활자를 개발하여 방대한 출판 사무를 이끌며 중국 개신교 선교사역에 큰 동력을 추가하였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권세양언(勸世良言)》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담은 책 [사진 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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