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장로회 중국선교의 시작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본부(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에서도 중국선교에 동참하였다. 1838년 로버트 오르(Robert W. Orr)와 존 미첼(John A. Mitchell)이 중국선교를 위해 파송되어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으로 들어가 선교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건강이 나빠져서 미첼은 1838년에 죽고, 오르 역시 현지 사역이 어려워져서 부득이 1841년 미국으로 복귀하였다.
미첼의 빈자리를 채우고 중국선교 인력 보강을 위해 선교본부에서는 1840년 맥브라이드(Thomas L. Mcbryde) 부부를 추가 파송하였다. 이들은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중국 마카오로 들어가 중국선교에 합류하였다. 이후 하문(廈門) 외해의 섬 고랑서(鼓浪嶼)로 옮겨 가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건강 악화로 1843년 미국으로 복귀하였다.
미국북장로회 선교본부는 중국선교를 위해 추가 파송을 계속하였다. 1841년 제임스 헵번(James C. Hepburn M. D., 合文) 부부를 파송하였고, 1842년 월터 로리(Rev. Walter Macon Lowrie, 婁理華, ‘로리’는 ‘로리에’로 표기하기도 함)를 파송하였다.
헵번 부부는 1841년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중국선교를 준비하였고, 아편전쟁이 끝나고 개항장에서의 선교 가능성이 확인되자 1843년 개항장이 된 복건성 하문의 고랑서로 사역지를 옮겨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건강을 잃게 된 헵번 부부는 부득이 1846년 미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월트 로리는 제퍼슨대학 재학 시절 선교에 헌신을 결심하였으며, 1837년 대학을 수석 졸업한 다음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1841년 11월 9일 목사안수를 받았다. 로리는 1842년 1월 19일 중국으로 출발하여 5월 27일 중국에 도착하였고, 복건성 하문에서 중국선교를 진행하고 있던 맥브라이드를 만나 중국선교를 위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 선교본부는 중국선교 인력의 분산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로리는 싱가포르로 임지 이동을 하라는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로리는 싱가포르행을 준비하다가 이를 대신하여 중국 내 또 다른 개항장인 절강성 영파(寧波)로 이동하여 제임스 G. 맥카티(James G. McCarthy) 선교사의 사역 팀에 합류하였다.
로리는 중국어를 빠르게 익혔고, 사전 편찬과 중국 고전 번역에도 역량을 발휘하여 1847년 성경개역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역동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로리는 1847년 8월 19일 상해에서 열린 성경개역위원회에 참석한 뒤 영파로 돌아가다가 해적의 습격을 받아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였다.
미국 성공회의 중국선교 미국성공회 선교위원회(The Domestic and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 in the United States)에서도 중국선교를 위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835년 헨리 록우드(Henry Lockwood)와 프란시스 핸슨(Francis R. Hanson)을 파송하여 중국 광동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중국 현지선교가 아직 쉽지 않음을 확인하고 싱가포르로 사역지를 옮겼고, 다시 바타비아(Batavia)로 이동하여 사역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건강 악화로 1838년 사역에서 은퇴하였다.
1837년에는 윌리엄 분(William Jones. Boone, 文惠廉, 1811-1864)이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바타비아로 합류하였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South Carolina)의 월터보로(Walterboro)에서 태어난 그는 1829년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한 뒤 버지니아신학교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 1837년 3월 3일 미국 성공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837년 1월 17일 미국성공회는 그를 중국선교사로 선임하였으며, 7월 8일 부인 아멜리아(Amelia)와 함께 보스턴을 출발하여 10월 22일 바타비아 사역지에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미리 사역하고 있던 록우드와 핸슨을 만나 중국어를 익히며 중국선교를 준비하였다.
분은 1840년 마카오로 사역지를 옮겼고, 1842년에는 개항장으로 개방된 복건성 하문의 고랑서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중국선교에 돌입하면서, 이곳을 중국 성공회의 선교 거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1844년 10월 26일 미국 필라델피아 성베드로교회에서 주교로 선임되었고, 1845년 사역지를 상해로 옮겨 1864년까지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격 번역에도 기여를 하였으며, 1851년 중국 최초의 성공회 신부 황광채(黃光彩, 1827-1896)를 서품하는 등 중국 성공회의 발전에 선구적으로 기여하였다. ▦
♣사진 설명 | 로리가 참여한 위판본 성경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