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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3  통권 260호  필자 : 변성래  |  조회 : 1190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중국 내셔널리즘》- 민족과 애국의 근현대사
_오노데라 시로 / 산지니


* 내셔널리즘(nationalism): 흔히 민족주의·국민주의·국가주의 등으로 번역됩니다. 민족주의는 그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동경 또는 고무(鼓舞)의 감정을, 혹은 증오 내지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는 내셔널리즘이란 하나의 정치원리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근대 중국의 각 시대에 내셔널리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사용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내셔널리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유교에 기반한 전통적 중국왕조의 세계관은 초월적 존재인 천(天)으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은 1인의 유덕자(有德子)가 천자(天子), 즉 황제가 되어 ‘천하(天下)’를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황제의 신민(臣民)이 됩니다. 그들의 생활 범위는 느슨하게 중화(中華)중국(中國)이 되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적(夷狄) 또는 화외(化外)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내셔널리즘의 태동 (1895~1911)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여 강화교섭이 시작되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강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마침 회시(會試, 과거의 최종단계) 수험(受驗)을 위해 베이징(北京)에 체류 중이었던,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캉유웨이(康有爲)는 강화 거부, 천도(遷都)를 통한 철저항전과 변법(變法, 정치개혁)을 호소하는 상주문을 작성했고 함께 과거를 치르기 위해 온 사람들의 지지를 얻습니다. 캉유웨이는 광저우(廣州)와 상하이(上海)에서 한역(漢譯)된 서양 서적들을 접하면서 그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캉유웨이의 주장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서양과 일본을 모방하여 나라를 개혁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것입니다. 

1898년 캉유웨이는 베이징에서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해 활동합니다. 여기에서 국(國)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이 시점이 중국 내셔널리즘의 시작점인 듯합니다. 캉유웨이는 국가의 정권(政權)과 토지, 인민과 종류(種類, 민족)의 자립, 성교(聖敎)의 보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주권과 영토와 국민 그리고 유교로 대표되는 전통문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반대파의 논리도 무시 못 합니다. 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지키려 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왕조국가에 길들여진 신민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라고 하는 개인과 청이라고 하는 한 왕조에 대한 충성과 영토, 국민과 주권으로 이뤄진 국가와 전통문화에 대한 충성이 서로 괴리될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한 탓이겠지요.


국명과 국사의 창조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광둥(廣東)성 출신, 신해혁명 뒤 귀국하여 정계와 학계에서 활동하였고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를 중심으로 서양사상에 접촉했던 지식인들이 최대 과제로 삼은 것은 그때까지의 중국왕조와는 다른 서구적 근대국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들은 가장 기본적인 국명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 커다란 땅덩어리가 그 당시에 국명이 없었다? 이해가 안 가는 대목입니다. 량치차오가 한 말입니다.(우리나라를 부르는) 일반적 통칭으로는 제하(諸夏)라고 하거나 한인(漢人)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인(唐人)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왕조의 이름이다. 외국인이 부르는 명칭으로는 진단(震旦)이라고 하거나 혹은 지나(支那)라고 하는데, 이 모두 우리 스스로가 명명한 이름은 아니다. (…) 중국(中國)이라고 부르거나 중화(中華)*라고 하는 것도 자존자대(自尊自大)로, 남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 삼자 모두 결함이 있는 가운데 부득이하게 우리가 구두로 말하기 익숙한 명칭을 사용하여 중국사(中國史)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 중화(中華): 한(漢)민족이 주위 민족을 야만(野蠻)시하고 자기네 나라가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문명한 나라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 


문혁과 애국주의 

시간을 건너뛰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시기로 가봅니다. 문혁 시기에 중국대사관이 주재국에서 공공연히 마오쩌둥(毛澤東)사상과 반소, 반미 선전을 행하면서 현지국에 거주하는 화교와 화인과 유학생들의 내셔널리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그들이 전개한 과격한 선전활동은 당연히 현지 정부와 사회와의 마찰과 충돌을 초래하게 됩니다. 일례로 모스크바에서 중국인 유학생과 관료 간에 유혈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그 보복으로 베이징의 소련대사관이 항의 시위를 하는 홍위병에 의해 포위되기도 했습니다. 

중일전쟁 중에는 해외 화교와 화인 사이에서도 중국 내셔널리즘이 고조되어 본국에 대한 귀속 의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문혁이 시작되자 중국 정부는 동남아시아의 화교와 화인들에게 마오쩌둥사상을 선전하고 현지국의 공산당을 원조하는 등 ‘혁명의 수출’을 도모했습니다. 


시진핑 시대와 국뽕

국뽕(자국에 대한 환상에 도취되어 자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로,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 무언가에 기분 좋게 취해 즐기는 상태를 나타낼 때 소위 뽕 맞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서 비롯된 단어)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옮깁니다. 현재 중국 인민들의 마음 상태를 보면 추상적인 느낌의 내셔널리즘이란 단어보다는국뽕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듯합니다. 

2018년 11월 18일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허인리(何引麗) 선수는 결승선 직전에서 에티오피아 선수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승선을 500m 앞둔 지점에서 갑자기 한 자원봉사자가 뛰어들더니 그녀에게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건네주려고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선수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이던 허인리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또 다른 자원봉사자가 트랙 안으로 뛰어들더니 그녀에게 중국 국기를 억지로 건네주었습니다. 허인리는 어쩔 수 없이 오성홍기를 받아들었지만 상당히 큰 국기를 들고 뛰는 게 쉽지 않았던지 몇 초도 안 되어 이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에티오피아 선수는 이 틈을 타 허인리를 앞지르기 시작했고, 결국 허인리는 5초 차이로 우승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자원봉사자의 황당한 행동으로 우승을 놓친 허인리였지만, 국기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중국 누리꾼들의 비난에 사과까지 해야 했습니다. 한 누리꾼은 국기를 제멋대로 땅바닥에 던진 것은 국기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라며 대회 성적이 국기보다 중요하냐고 질타했습니다. 이에 허인리는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 국기를 던진 것은 아니며, 국기가 비에 흠뻑 젖은 데다 팔이 뻣뻣해 국기를 떨어뜨린 것뿐이라며 이를 사과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더구나 자원봉사자가 국기를 건넨 것은 돌출 행동이 아니라, 대회 주최 측이 애초에 계획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한 대회 관계자는1위부터 3위를 기록한 중국인 주자는 반드시 중국 국기를 걸치고 결승선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방침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전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중국인들에게 중국공산당이 앞장서서 국뽕을 투입하는 것은 공산당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자극하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을 사전에 덮어버리려는 시나리오가 아닐까요? 물론 내가 태어난 나라,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권장할 만한 일이지요, 그러나 종종 중국인들의 나라 사랑은 좀 지나치고 황당하 기까지 합니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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