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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  통권 256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774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미국공리회 중국 선교의 시작


미국공리회
미국공리회(美國公理會,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는 1810년 미국 뉴잉글랜드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주도하여 조직한 해외 선교 단체이다. 출범할 때의 공식적인 이름은 ‘미국 해외선교위원회’였으나 중국 현지에서는 ‘미국공리회’로 줄여서 통칭하여 쓰였고, ‘미부회(美部會)’라고도 불렸다. 공리회는 처음에는 인디언 사회와 미국이 새로 진출한 영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하와이 선교가 중심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이 늘어나면서 실업인들의 요청에 따라 미국공리회도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었고, 영국 런던선교회가 이끌고 있던 중국 선교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미국공리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선교에 헌신한 초기 대표적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엘리야 브릿지만
엘리야 브릿지만(Elijah C. Bridgeman, 裨治文, 1801-1861)는 매사추세츠 출신으로 앰허스트대학과 안돌프신학원을 졸업한 뒤 데이비드 아빌(David Abeel, 雅裨理, 1804-1846)과 함께 미국공리회의 중국 선교사로 첫 파송을 받았다. 그는 1829년 10월 6일 목사안수를 받고 아빌과 함께 1830년 2월 19일 중국 광주에 도착하였다. 광주에 도착한 뒤 그는 미리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 런던선교회 모리슨 선교사에게서 중국어 교사를 소개받는 등 큰 도움을 받았고, 출판과 교육 사역에 동참하였다. 1843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홍콩에서 열린 성경번역회의에도 참여하였고, 1847년부터는 개항장 상해로 이주하여 성경 번역 사역에 전념하였다. 

브릿지만은 1856년 영국왕립아주학회북지회(The North Chin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에 참여하였고, 1857년부터 1859년까지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861년 세상을 떠나 상해에 안장되었다. 그는 20여 년간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각종 문서 선교뿐만 아니라 특별히 선교 단체를 조직하여 선교 역량을 모으는 데 크게 헌신하였다. 중국 선교에 합류한 미국 선교사들은 그가 조직한 4개의 선교 단체를 통해 중국 선교의 기반을 이루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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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브릿지만(사진 출처/바이두)

광주기독도연합회
1830년 광주에 도착한 브릿지만은 함께 도착한 아빌과 함께 광주기독도연합회(廣州基督徒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당시 광주 13행(行)을 통한 무역을 하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 기독교인들을 규합하여 조직하였고, 중문 성경 번역 출판을 비롯한 중국 선교를 위한 지원 조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모색하였다. 브릿지만은 광주기독도연합회의 지원으로 1832년 《Chinese Repository(中國叢報)》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아편전쟁 기간에는 마카오로 옮겨 간행되었고, 1844년에는 홍콩에서 간행되다가 1845년부터 광주로 복귀하여 1851년까지 간행을 이어 나갔는데, 중국 관련 역사와 현황 자료를 영문으로 수록함으로써 중국 선교와 중국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재화실용지식전파회
재화실용지식전파회(在華實用知識傳播會, 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dge in China)는 익지회(益智會)로도 불렸는데 1834년 11월 29일 광주에 거류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영국 상인 제임스 매디슨(James W. Matheson, 1706-1878)이 회장, 미국 상인 올리펀트(D. W. C. Olyphamnt, 1789-1851)가 경리, 모리슨이 중문 서기를 맡았고, 브릿지만도 영문 서기를 맡아 제반 실무 추진에 구체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에서 서양의 실용 지식을 중국에 보급 계몽하는 일에 힘썼고, 브릿지만은 이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 사회에 세계사, 세계 지리 및 세계 지도 관련 정보를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브릿지만은 이 회의 지원으로 《중문광동방언촬요(中文廣東方言撮要, A Chinese Chrestomathy in the Canton Dialect)》를 간행한 바 있다. 또한 브릿지만은 《연방지략(聯邦志略)》을 저술하여 미국의 지리, 교육, 교회 등에 대한 내용을 집성하여 중국에 미국 사회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모리슨교육회
모리슨교육회(馬禮遜敎育會, Morrison Education Society)는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1834년 세상을 떠난 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힘을 모아 1836년에 설립되었다. 영국 상인 란셀로트 덴트(Lancelot Dent, 顛地, 1799-1853)가 회장, 윌리엄 자딘(William Jardine, 查頓, 1784-1843)이 경리를 맡아 이끌었는데, 브릿지만이 비서를 맡아 실질적인 회무를 주도하였다. 이 교육회는 모리슨학당(馬禮遜學堂)을 세우기 위해 준비하는 차원에서 카를 귀츨라프(Karl Friedich August Gutzlaff, 郭士立, 1803-1851)의 부인 완스탈(Wanstall, 温施蒂)이 운영하던 여학교에 남학당을 부설하도록 지원하였고, 미국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파송되어 온 사무엘 브라운(Samual Robbins Brown, 布朗, 1810-1880)이 1839년 11월 4일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공식적인 출발을 이루었다.

모리슨학당은 개교 당시 재학생 6명에 불과하였으나 아편전쟁 중 홍콩으로 옮겨 운영하는 과정을 거쳐 1843년에는 43명으로 재학생이 늘어났으나 1848년 모리슨교육회가 활동이 중단되면서 이듬해 학당도 운영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 학당에서는 8년 학제로 중국어, 영어, 지리, 역사, 수학, 음악 등 미국 사립학교의 초등 과정을 영어로 운영하였다. 1947년까지 교장을 맡았던 브라운은 해외 유학생 파견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는데, 용굉(容閎, 1828-1912)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용굉은 1841년 모리슨학당에 입학하였고, 184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854년 예일대학을 졸업한 중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다.

                           ▲모리슨학당 (사진 출처/바이두)
  
중국의약전교회
중국의약전교회(中國醫藥傳敎會, China Medical Missionary Society)는 영국과 미국 상인들의 기부를 바탕으로 1838년 2월에 조직된 의료선교회이다. 이 단체의 성립은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 토마스 칼리지(Thomas R. Colledge)가 앞장서고 브릿지만과 파커 선교사의 협력을 바탕으로 출범하였다. 피터 파커(Dr. Peter Parker, 1804-1888)는 브릿지만이 미국공리회에 강력하게 요청하여 1834년 중국으로 파송받아 도착한 의료 선교사이다. 그는 1835년 11월 광주의 양행 13행 중 하나인 신두란가(新豆欄街)의 풍태행(豊泰行) 건물 3층에 의원을 개설하였는데, 이는 서양 선교사가 개설한 중국 최초의 병원이다. 중국의약전교회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미국 주요 도시와 런던, 에든버러, 글래스고 등 영국 주요 도시에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중국으로의 의료 선교사 파견이 절실함을 홍보하였다.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베이징 미국공리회 교구건물 (바이두 캡처)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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