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감독 린쥔양(林君阳, 1980∼ )이 연출한 이 영화는 2023년 제25회 타이베이 영화제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미술 디자인상, 시각효과상, 특수효과상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하여 주목을 받았다. 린쥔양은 푸런(辅仁)대학에서 영상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타이베이예술(台北艺术)대학 영화창작대학원에서 감독학을 전공했다. 2019년 제54회 대만 텔레비전 드라마상 진중장(金钟奖)에서 《우리와 악의 거리(我们与恶的距离)》로 감독상을 수상하였으며, 2023년 총통 후보자의 선거 캠프에서 벌어지는 정치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人選之人—造浪者)》를 연출하여 인기를 구가했다.
린쥔양은 연출뿐 아니라 각색, 편집, 촬영에도 참여하고, 인류학자가 답사하듯 현장조사를 꼼꼼히 챙기며 현대 도시인의 삶과 사랑에 관심을 기울였다.
《역병》은 2003년 SARS로 타이베이 시립 허핑(和平)병원이 봉쇄되어 14일간 수많은 의료진과 환자와 가족들이 강제로 집중 격리되었는데, 이때 57명의 의료진과 97명의 민간인이 감염되고, 30명이 사망한 실제 사건을 다루었다. 당시 주타이베이 한국 대표부는 ‘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일일 동향’을 공지사항에 올리며 타이베이시장 마잉주(馬英九)의 조치를 신속하게 전하였다.
의료인의 헌신과 권익에 대한 질의 코로나19 이후 감염병을 다룬 영화가 속속 등장하였다. 대만에서 코로나19를 다룬 영화 《폭포(瀑布, The Falls)》와 사스로 봉쇄된 허핑병원 사건을 다룬 《국제브리지사외전: 화평귀래(國際橋牌社外傳:和平歸來, Hoping)》 텔레비전 드라마 등이 비교적 주목을 받았다. 감염병을 다룬 작품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비평적인 시야로 중앙 및 지방정부의 역할을 팩트 체크한 것이다. 둘째는 역경 극복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역병》은 후자에 속한다.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의 헌신뿐 아니라 택시기사나 기자 등 시민의 자발적인 지원 활동도 높이 평가했다.
베이타이연합(北台联合)병원 흉부외과 주치의 샤정(夏正, 王柏杰 분)은 퇴근해서 딸의 생일파티에 서둘러 가려고 택시를 탔다가 교통사고로 위급한 환자에게 수술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돌아온다. 하루라도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샤정은 첫 번째 격리 해제 명단에 포함된다. 하지만 사스에 감염되어 격리된 환자들을 수용한 B동 병실에서 임산부가 수술이 필요한데 의사들은 핑계를 대며 아무도 지원하지 않자 샤정은 자발적으로 격리 해제를 반납하고 수술집도를 결심한다. 샤정은 사스에 감염된 임산부의 수술을 위해 고글을 벗는 위험을 무릅쓴다. 샤정은 수술을 마치고 나와 복도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딸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아호, 나의 아들(阳光普照)》에서처럼 햇살은 희망의 메시지다. 감염병과 싸우다 죽은 이를 위로하고, 언젠가 감염병을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실렸다.
남자 간호사 안타이허(安泰河, 曾敬骅 분)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에 참여하려고 홍콩에 갈 계획이었다. 병원이 봉쇄되기 전에 감염 환자가 발생한 B동 병실에 사스 의심 환자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동료 의료진은 그를 보균자로 의심하고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안타이허는 어쩔 수 없이 확진 환자를 수용한 B동 병실에 가게 된다. 그는 B동에서 감염 환자와 밀접하게 접촉한 결과 사스에 감염되어 격리된다. 하지만 앞방에 쓰러진 감염 환자를 위해서 응급처치로 회복을 도와주었다.
대만 921대지진(1999년 9월 21일 대만 중부 난터우(南投)지역에서 발생한 규모 7.6의 대지진) 때 부모와 여동생을 잃고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안타이허는 환자와 그들 가족에게 온 정성을 다하였다. 췌장암 말기 환자 린쭈야오(林祖耀, 王明台 분)는 위중한 상황을 가족에게 숨기고 치료도 거부하자 안타이허는 화학치료를 권유하고 아들에게도 아버지가 가족과 작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했다.
의료인은 모자가 달린 전신 보호복, 마스크, 고글, 장갑, 덧신 등을 입고 묶고 벗고 씻기를 반복했다. 안타이허의 얼굴에는 마스크 줄 흔적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영화는 전신 보호복을 입고 거친 숨을 내쉬는 의료인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였다.
A동에서 리신옌(李心妍, 项婕如 분)이 자살을 시도한 췌장암 환자 린쭈야오를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를 하는 그 순간, B동에서는 안타이허가 사스에 감염된 수간호사를 살리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장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리신옌과 안타이허는 환자의 회복에 실패한다. 엄중한 바이러스 앞에 선 의료인들은 자신을 보호할지, 환자를 구할지 고민한다. 바이러스는 사람 간 존재하는 공간뿐 아니라 심리적 공간도 단절시킨다. 인턴 의사 리신옌은 안타이허를 사랑하기에 홍콩에 함께 가겠다고 한다. 리신옌은 췌장암 환자 린쭈야오가 병실에서 자살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실제로 영화는 허핑병원에서 시민 한 사람이 자살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리신옌은 휴식 공간에서 환자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의료진들을 욕하며, 이기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안타이허도 샤정이 의사면서 환자에게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욕한 적이 있었다.
영화는 또한 봉쇄된 병원의 일부 의료진이 흰색 플래카드를 병원 외벽에 걸고 환자와 접촉을 거부하며 파업하는 장면과 의료진의 인권을 주장하며 병원에서 무단으로 빠져나간 의료진들의 모습도 그렸다.
잡지사 기자 진유중(金有中, 薛仕凌 분)은 베이타이연합병원에 입원해서 폐가 회복되어도 사스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서 퇴원하지 않았다. 특종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자처럼 보였다. 샤정이 진유중에게 특종 뉴스 때문에 병원에 갇힌 것이 후회스럽지 않냐고 묻자 진유중은 학교 다닐 때 기자가 되고 싶었고 특파원, 종군기자도 해보았는데 지금은 바이러스와 전쟁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고 말하며 뿌듯해했다. 샤정이 병원 내 발생한 최초의 감염자를 찾기 위해 병원 진료기록을 조사할 때 진유중은 이를 도우며 취재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기자에서 사명감으로 무장한 기자로 탈바꿈하며 뉴스 기사를 송고했다.
택시 기사 장궈룽(江国荣, 张永正 분)은 의사 샤정이 차에 그냥 두고 내린 딸의 생일선물을 가져다 주려고 병원에 들어왔다가 갇히게 된다. 수간호사인 엄마를 찾으러 온 어린 소녀를 돌봐준다. 마스크를 씌워주고, 엄마를 찾는 것을 도와준다. 택시 기사 장궈룽은 병원에서 격리되어 불평불만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 것을 자처하여 의료진과 같은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장궈룽이 도운 소녀의 어머니는 바로 안타이허가 B동 병실에서 응급처치에도 살려내지 못한 수간호사였다.
《역병》은 중국 영화 《중국의사(中国医生)》처럼 의료진의 헌신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의료진과 시민의 헌신에 대한 공감뿐 아니라 일부 의료진에 대해 비판적 시야를 보여주었다.
대만의 정부 기구인 감찰원(監察院, the control yuan)은 허핑병원 사건을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현재도 피해자의 인권침해를 조사 중이다. 의사 샤정은 택시 안에서 대만이 사스에 대한 3가지 제로원칙(台湾三零坚守)을 고수한다는 잡지의 내용을 접한다. 앞서 광둥과 홍콩에서 유행하던 사스가 대만에서도 발생하자 사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대만 사회에는 불안과 공포가 조성되었다. 당시 대만 정부는 사스로 인한 사망, 감염의 지역 사회 확산을 억제하는 원칙을 고수하였고, 타이베이시장 마잉주는 허핑병원을 봉쇄 조치하여 확진자 외 수많은 의료진과 민간인이 격리됐다. 이에 항의하는 의료진을 항명자로 취급하였다.
허핑병원 소화기 외과 주치의 저우징카이(周經凱)는 병원에서의 격리를 거부하고, 의심 환자는 집에서 10일 격리한다는 WHO의 건의에 근거해서, 타이베이시의 봉쇄령을 거두라고 요구했다. 저우징카이는 도망간 의사라는 오명을 쓰고, 중과실 책임을 물어 해고당하고, 대만달러 24만 원의 벌금형에 3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7년 동안 소송하면서 대만달러 200만 원을 사용하였다. 그 후 17년 동안 타이베이를 떠나서 대만 동부 작은 마을의 의사로 지냈다.
당시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병원에 갇혔지만, 병상은 400여 개에 불과하고 의료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보름간이나 봉쇄된 것이다.
의료인은 누가 보호해주냐고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누구도 의료인의 생명과 가족의 행복을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샤정, 안타이허, 수간호사 등 의료인이 감염된다. 영화는 20년 전 희생하고 지켜주신 분들에게 바친다는 자막을 올렸다. 샤정의 딸은 세상에 아픈 사람이 없어서 의사인 아빠를 매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생일 소원을 빌었다.
감염병은 영화의 영문 제목처럼 ‘폭풍의 눈’이다. 사회 전반에 대한 위협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공할 만한 위협으로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감염병인 사스는 2003년 대만에,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는 한국을 덮쳤다. 3년간의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얼마 전에 갓 해제되고 일상은 회복되었지만 언제 또다시 엄습할지 모르는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1세기 들어서 백신, AI 등 비약적인 과학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인간의 연약함이 노출된다. 우리에게 공동체 의식의 헌신과 더불어 절대자와 자연에 대한 겸허함이 필요한 듯하다.
ko/2023/08/eye-of-the-storm-2023-movie-on-netflix- movie-review-gloomy-chronicle-of-a-global-contagion/ 김영철 | 한양대학교 중국학과 교육전담교원 |